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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읽는 세계사 1부 테베~쿠스코

맑은 바람 2020. 3. 12. 20:47

1부 테베~쿠스코

 

이야기꾼 크리스토퍼 히버트(1924~ 영국 레스터셔 출생)의 글을 만나다.

옮긴이 한은경

--2002년에 나온 책을 2020년 3월 3일 코로나19가 한창 창궐하고 있는 때에 읽기 시작하다.

 

*인류문명 5000년사를 간직한 세계 21개 도시는 어디일까?

1.테베2.예루살렘3.아테네

4.로마5.콘스탄티노플

6.항저우7.쿠스코8.피렌체

9.톨레도10.암스테르담

11.파리12.런던13.상트페테르부르크14.베네치아15.빈

16.뉴올리언스17.도쿄

18.베를린19.모스크바20.뉴욕21.시드니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도시의 발전과정에서의 외양과 사회생활

--도시의 기원

--도시의 근간이 되는 문화의 본질

--도시에 반영되는 민족정신

-- 탁월한 역사적인 인물이 부상하던 시대/황금시대의 도시 조망

--유명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해주는 심도높은 여행 안내서

 

*역자의 말

히보트는 방대한 정보수집능력을 가지고 역사적 흐름의 맥을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이 책을 통해 역사 History=이야기Story 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1.파라오 시대의 테베(룩소르)

B.C.2000~B.C.1200

테베의 한 가문에 의해 이집트는 통일되고 그것이 12왕조다.(중왕국시대)

13왕조의 혼란과 퇴보의 시기를 거쳐 다시 테베에서 아모세 1세가 18왕조를 세우고 신왕국시대를 열게 된다.

아모세1세--아멘호테프1세--투트모세1세--투트모세2세--하트셉수트.--투트모세3세

*카르나크의 아몬신전의 탑문

*아부심벨 신전

*아멘호테프 신전:아메호테프 3세를 위한 신전/ 이집트예술이 꽃피운 시기/평화와 번영의 시기

고왕국시대 조각의 기본자세:

주름,감정,열정을 담지 않았다.대상의 본질만을 표현했다.

중왕국시절:신성에 인성을 더했다.

신왕국시대:예술성 추구, 단순 직설적 표현에서 벗어남

*테베노동자들의파업--

BC 1170년경 역사상 최초의 파업

"식량과 연고를 달라!"

*개와 고양이는 신의 보호를 받는 동물로 여겨져 귀하게 대접받았으며 미라로 만들어 묘지와 신전에 놓았다.

 

(읽는 재미는 있으나 필사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2.다웟과 헤롯시대의 예루살렘

BC1000~AD60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바뀜

젊은 농부 사울의 등장:히브리인의 12지파의 단합을 주장하여 암몬족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된다.

후에 필리스티아군대에 세 아들을 잃고 그도 자살한다

이때 살아남은 이가 사울왕의 사위 다윗이다.

그는 필리스티아장군 골리앗과 싸워 영웅으로 떠오른다.

사울의 질투로 내쫒긴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대왕으로 추대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유대왕 다웟은 영토를 늘리기는 했지만

이스라엘과의 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솔로몬이 대를 잇는다.

솔로몬(BC960~BC932)은 정적을 암살하는 무자비한 왕이었지만 경제부흥을 위해 힘썼다. 이집트의 말이나 전차를 그의 신하들과 맞바꾸기도 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언약궤를 넣어두었던 성소와 궁전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솔로몬은 방대한 재산을 축적하기는 했지만 윤리적으로 타락하여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다.

기혼샘물의 물을 저수지로 끌어들인 히스기야왕의 예루살렘 복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의 침공, 바빌론의 침공을 받고 노예로 끌려가 70년만에 풀려났으나 예루살렘은 복원되지 않은 채로 BC445년경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의 몸종 느헤미야가 유대총독이 되어 돌아와 유다이즘의 부흥을 도모한다.

이어 에즈라에 의해 엄격한 초기종교로 돌아갔으나 BC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예루살렘을 장악했고

BC250년경 프톨레마이오스대왕이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후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의 안티오코스--로마의 폼페이우스--등의 침략을 받았으나 로마가 위임한 헤롯왕은 매우 의욕적으로 활동하여 극장, 원형극장, 공원, 정원, 유대교도들을 위한 사원건축에 힘썼다.

헤롯왕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AD70년에 로마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은 거의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2000년 유대민족의 유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3.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BC480~BC404

페리클레스:위대한 웅변가이자 인기가 많은 군사지휘관이지만 과묵, 냉담, 거만했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페리클레스의 아테네사랑은 따를 자가 없었다.

"시장과 의회로 향하는 길 이외의 다른 길에서 그를 본 사람이 없다."(플루타르코스)

--법 앞에 평등하다.

--개인적인 삶에서 관대하며 자유롭다.

--일이 끝나면 우리는 영혼의 모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BC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승리를 거둔 후 아테네인들은 아크로폴리스에 불후의 명작인 <파르테논 신전>을 세운다.

*파르테논은 처녀라는 뜻

<아테나니케신전>:페르시아와의 전쟁 승리 기념

<엘렉테움>복잡한 형식, 세부적인 장식미, 정교함으로 유명

<헤파이스토스신전>현존하는 도리아식 6주신전의 가장 완벽한 전형

도편추방제:투표에 의해 인기잃은 저명인사를 10년간 추방하는 제도

BC430년 페스트 창궐

페리클레스도 페스트에 감염,잠시 회복되었으나 6개월 후 죽음.

 

4.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의 로마 53~117(64세)

콜로세움과 베네치아 광장 사이의 곧게 뻗은 포리 임페리알리 대로는 트라야누스황제 때 확장한 길이다.

당시 영토는 스코틀랜드에서 북아프리카 사막까지, 이베리아반도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그리고 카스피해에서 나일강 남쪽까지 퍼져나갔다.

이때 수도 인구는 100만이었고 대부분 외국인 노예였으나

직업도 다양하고 돈을 모아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돈없는 노예들은 6층짜리 임대아파트(인술라)에 살기도 했다(2000년 전에 6층짜리 아파트라니!)

이 건축물은 값싼 자재로 허술하게 지어 붕괴나 화재가 잦았다.

64년 네로황제 때는 로마 최악의 화재가 났는데 6일간 지속되어 시의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로마엔 600개의 공공분수가 있고 하수관, 공중화장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물부족을 느끼는 경우는 없었다.(이 글을 읽다보면 로마거리를 돌아다니는 기분이 든다. 가끔 인술라 고층에서 바로 눈앞으로 똥항아리가 날아오는 광경도 보면서)

부유한 원로원 의원과 그 부인의 의식주를 중심으로 한 일상이 깨알같이 소개되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연회를 즐기고 토하고 또 먹고,

목욕을 즐기고, 독서실, 전시실, 산책로의 예술작품들을 감상하고~~

매음굴도 공식허가 장소였다.

원형극장에서는 매일 살륙이 벌어져 로마인들의 피를 끓게 했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기독교의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자 바실리카 노바를 지어 그들이 예배를 볼 수 있게 했다

316년, 그는 동쪽에 새로운 로마제국건설을 결정했다.

그가 죽은 후 로마는 쇠퇴했다.

410년 서고트족에게 점령당했다. 그후 로마의 건물들은 무너져 내리고 강이 범람했으며 전염병이 돌았다.

 

5.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콘스탄티노플

330~565

(점점 재미있어지누먼~)

비잔티움이라는 작은 마을은 26km의 좁은 해협인 보스포루스에서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마르마라해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이곳을 지나 흑해의 검은 물로 유입되었다. 이 시의 북쪽으로 강어귀를 따라 8km만 더 가면 트라키아언덕으로 이어졌다. 트라키아사람들은 이곳을 '골든 혼'이라고 불렀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천연 항구의 하나인 이곳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육로를 총괄하고 흑해연안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 에게해와 지중해에 이르는 여러 항구로의 수로를 지배했다.

BC 7세기에 비자스라는 그리스이민자들이 이미 이곳의 지리적인 중요성에 대해 인정한 바가 있다. 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북쪽으로 항해하던 중 이곳을 발견한다.그래서 정착하여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이라 불렀다.83쪽

콘스탄티누스는 이곳을 자신의 제국에 걸맞는 기독교도시로 만들었다.공사는 324년 시작되어 6년동안 강행군으로 진행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제국의 수도라고 선언했다.

1000년 제국의 시작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황제 때 제국을 재구성했다.

북아프리카를 되찾고 행정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으며 페르시아도 물리쳤다.

법을 바로세우고 부정부패와 투기 등을 근절시켰다.

이에 반발한 청색당(지주,젊은 귀족-이국적 의상)과 녹색당(사업가, 상인, 공무원,하층민이 지지)은 유스티니아누스에 반대하여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했다.

감옥을 침입, 간수들을 죽이고 죄수들을 풀어줬으며 성당에 불을 지르고, 대형병원의 환자들을 몰살했다. 콘스탄티노플은 화염에 휩싸였고 폭도에게 무방비상태로 버려졌다.

능력되는 사람들은 보스포루스를 건너 아시아 해안으로 피신했다.

폭도들에게 보위되어 피신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황제에게 황후 테오도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한 남자가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황제가 도망자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불명예입니다.---만약 황제께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고 싶으시다면 그 일은 쉽겠지요.바다가 바로 저기 있으니까요. 여기 배도 있습니다.그러나 안전한 곳에 도착하신 후에 과연 안전보다 죽음을 더 원하지는 않으실지 생각해 보십시오---저는 이 보라색 옷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저를 만나는 이들이 저에게 황후라 부르지 않는 날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이에 감동산 황제 일행은 마침내 폭도들을 제압한다.

유스티아누스는 궁전을 재정비, 관리를 2만이나 수용할 수 있는 황제의 도시로 바꾸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 도시도 지진과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반도의 남쪽 경사로에 세워진 성세르지우스와 바쿠스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황사절에게 위탁된 교회로 뛰어난 아름다움과 독창성으로 유명했다.

"그 대리석의 광채는 태양보다 더 찬란하며 어디에나 금이 풍부하게 사용되었다."

성이레네교회는 니카폭동(532년)

당시 소실된 최고의 건물로 비잔틴 교회 중에서 가장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후에 대부분 이슬람교사원으로 바뀌었다.

물론 최고의 건축물은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성당이다.

"내가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완성할 가치가 있다고 보시고 또한 솔로몬을 뛰어넘을 만하다고 보신 하느님께 영광을!"

빈부의 차이가 심했으며 부유한 집에서는 4세기에 이미 포크를 사용했다.(프랑스, 영국,이탈리아는 16세기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물건)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극장공연은 매우 외설적이었다.

황후 테오도라도 이런 음탕한 배우 출신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그의 의도와 달리 한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6.송대의 항저우1138~1279

**BC 3500년경 수메르 문명

--이집트문명--크레타와 인도문명--중국문명(상--주--진--한--수-당--송)

항저우 '하늘의 도시'라는 뜻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화려한 도시'--마르코 폴로

송나라 고종 때 (1138년) 여진족은 북쪽(금나라)을, 송은 남쪽을 다스리기로 동맹을 맺어 항조우가 수도가 된 것이다.

 

절정기 때의 항저우 인구는 그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100만명에 육박함.

(저자는 중국편에서는 마르코폴로의 이야기를 주로 인용하고 있다. 동방견문록도 이 기회에 제대로 읽어보아야겠다.)

도로, 배수시설, 통행금지시간,새벽을 알리는 승려들, 짐꾼, 인력거꾼, 마차,강가의 짐배, 낚시배, 평저선, 시장풍경, 풍부한 먹거리, 식당, 인육전문식당도 있었다 한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50가지가 넘는 곡주를 즐겼고 술취한 사람도 많았다.

매춘부들이 넘쳐났으며 한번이라도 접촉한 외국인들은 그 경험을 절대 잊지 못해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마르코폴로)

부잣집 여인들의 전족,가난한이들의 집과 옷차림,잘 훈련된 소방원,기와집에 사는부유한 이들의 정원과 실내장식--

황제의 궁전, 항저우의 거리,

서호의 선상찻집이나 유람선,

결혼풍속, 축첩제도, '보완적인 남편'(불교의 승려)

도덕적방종과 사치가 극에 달함

'서호에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일이 언제나 그칠까'(소동파)

송나라 석기와 도자기는 중국인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예술품이다.

서구문명을 앞지르는 문명과 과학과 기술이 있었으며 활판인쇄술도 발전했다.

한편 어느 시절에나 그랬듯이 극도의 빈곤층도 함께 존재했다.

송은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에게 넘어갔다.(1279년)

 

7.잉카시대의 쿠스코

(1300~1533)

1526년 스페인 탐험가 피사로와 잉카인의 만남

외래인들은 전대미문의 화려한 잉카 문명을 접한 것이다.

''잉카'는 황제라는 뜻?

몽고족의 유목수렵인의 후예들은 BC 25000년경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 BC9000년경에 안데스산맥에 도착했다.

여기도 계급피라미드 최하위층에 농민이 있고 그들은 개인재산이 거의 없이 연명해야했다.

농민의 자식은 태어나면서부터 혹독한 삶을 조용히 받아들이게끔 교육받았다.

인신공양은 그들이 담담히(?) 받아들인 의식의 하나였다.

잉카 아타우알파의 최후-스페인 군사들에 이용당하고 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을 처형 후 스페인사람들은 3350m의 고원분지에 자리잡은 쿠스코에 발을 딛는다.

쿠스코의 재건:9대 잉카인 파차쿠티

퓨마모양의 도시, 금과 은으로장식된 응접실,금은 대야가 있는 목욕실--그들에게 금과 은이 지천이었다.

난공불락의 요새 사크사우아만--지진에도 잘 보존된 요새

스페인수비대는 이 요새 안에서 원주민과 대치, 마침내 쿠스코를 식민지로 끌어들인다.

 

 

--2부

8.피렌체

 

9.톨레도

 

10.암스테르담

 

 

11.파리

 

12.런던

 

13.상트페테르부르크

 

14.베네치아

--3부

15.빈

 

 

16.뉴올리언스

 

17.도쿄

 

 

18.베를린

 

19.모스크바

 

20.뉴욕

 

21.시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