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407쪽/2011년 출판
역사적 배경: 신유박해 (1801년) 순조 때
김훈의 <자전거여행> 덕분에 섬진강을 두루 여행하며 옥정호도 만났고 김용택선생 근무지도 찾아보고 요강바위도 가보았다. 책이 이끄는 여행이 참 즐거웠다.
여러 해 전 홍도 흑산도를 여행할 때 흑산도 버스투어를 하는 중에 먼발치로 <정약전 유배지>를 보았다. 맘이 자꾸 끌려 흑산도를 다시 한번 가봐야지 생각 중에 이 책을 만났다. 천주교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 황사영 그리고 그의 백서- 이 책에 의하면 황사영이 그리 큰 활약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리 비중이 큰 인물로 부상했는지, 사회적 신분이 높아서인가? 그보다는 흑산도와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의 유배생활이 궁금했는데 기대에 못미쳤다.
역사적자료가 부족한 걸까, 작가의 필력이 떨어진 걸까?
(10쪽)곤장 삼십 대 중에서 마지막 몇 대가 엉치뼈를 때렸다.그때, 캄캄하게 뒤집히는 고통이 척추를 따라서 뇌 속으로 치받혔다.고통은 벼락처럼 몸에 꽂혔고, 다시 벼락쳤다. 이 세상과 돌이킬 수 없는 작별로 돌아서는 고통이었다.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거기서 끊어졌다.고통은 뒤집히고 또 뒤집히면서 닥쳐왔다. 정약전은 육신으로 태어난 생명을 저주했지만 고통은 맹렬히도 생명을 증거하고 있었다.
매를 맞을 때 고통은 번개와 같았고 매를 맞고 나면 고통은 늪과 같았다.
(14쪽)남녀가 음습한 소굴에서 한데 뒤엉켜서 아비가 지어준 이름을 버리고 이적의 사호로 서로 부르고 응답하면서 끙끙거렸다. 그 패역한 마음과 무도한 행실을 민간에 퍼뜨려 임금을 능멸하고 국본을 위협하고 강상을 더럽힌 것이 그들의 죄상이었다.그들이 세상을 부수려 했고 부수어지지 않는 세상을 버리려 했으므로 그들의 죄는 세상전체의 무게와 맞먹었다.
(굶주리며 착취 당하고 살던 조상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읽는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세월이 흐르고 양태가 달라졌을 뿐 지금도 그때처럼 핍박과 굶주림 속에 허덕이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36쪽)사행을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신들을 상대로 아전과 역관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는 또 어떤가?
(<자전거여행>에서의 시적이고 낭만적인 글을 기대했었는데 우리 조상들의 민낯을 들여다보니 고통스럽다)
(48쪽)정약종-이한직-황사영-마노리
(50쪽)사공 문풍세:나는 문풍세요. 바다는 죽을 자리고, 배는 죽을 자리를 넘나드는 널빤지요, 배에서는 사공의 말에 따라야 하오. 귀양가시는 선비도 장교도 마찬가지요.
배에서는 여기가 어디냐, 방향이 맞느냐, 언제 도착하느냐, 바람이 어떨 것이냐를 묻지 마시오. 그게 사공을 대접하는 법도요.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프로의식을 느끼게 한다. 어느 분야에서건 진정한 프로는 아름답다.)
(56쪽)전라도 서망 땅:가문 해에도 땅의 소출은 일 년을 견딜 만 했고 바다가 가까워서 해물이 넉넉했다. 바닷바람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서 가을에는 쌀익는 냄새에 미역향기가 섞였다.
이곳에 늙은 소작농의 아내 오동희가 천주교를 믿고 동네 과부들에게 전교했다.
황사영:임금 앞에 불려나온 소년은 16세로 과거에 급제한 소년 황사영이었다.그는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혼인하여 정씨 집안의 가족이 된다.
(69쪽)마재 물가 마을에서, 처숙부들은 황사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천주교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황사영에게는 갈 수 없는 먼 나라의 새벽 강물소리 같기도 했고, 또 다급한 육신의 목마름 같기도 했다.
황사영은 처숙부 정약종이 말하는 신이란 강물과 같아서 현재를 모두 거느리고 흘러서 미래의 시간으로 생성되는 지속성으로 여겼다. 그때 황사영은 글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자신의 마음으로 직접 이해했고, 몸으로 받았다.
(71쪽)우포도대장 이판수와 박차돌
박차돌은 관아의 창고를 파먹은 돈으로 공명첩을 사서 작은 벼슬도 얻었으나 邪學죄인으로 문초를 당하다가 이판수가 도중에 거둔다.
삼각산 사기막골 젊은 숯쟁이는 아비가 천주쟁이라서 불려와 곤장세례를 받는다.
그는 배교하고 비밀회합에 오는 이들을 불었으나 거짓 진술로 여겨져서 곤장 끝에 죽는다.
(82쪽)정약전은 사리마을 조풍헌집에 거처가 정해졌다.
별채는 띠지붕 두칸 방에 툇마루 한쪽과 아궁이와 굴뚝뿐이었다. 흙벽에 싸리발을 둘렀고 바닥에 멍석자리를 깔았다.
돌담장이 수평선에 닿아서 검은바다와 붉은 바다가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다를 달리는 물의 소리가 공간에 가득찼고, 높이 나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89쪽)보리밭 두렁에 심은 콩은 모종 수를 헤아려 세금을 매겨서 흑산진에서 가져갔는데 본영인 우수영도 모르게 흑산 별장이 정한 세금이었다.
아침을 굶은 사내들이 바람을 마시면서 배를 몰아 바다로 나갔고 부녀들이 산으로 올라가 칡이나 더덕을 캘 때 더덕을 파먹는 산개들과 다투었다.(참말로 짠해서 읽기가 괴롭다!학고재 편집부에서 엮은 연대기만 보더라도 걸핍하면 대기근, 역병, 도적들의 횡행, 민란, 역모, 홍수, 전염병, 가뭄, 관리들의 세금착취 등이 이어지니 평민들이 제정신 차리고 살기가 쉽겠는가?)
**흑산을 다스린 관리:우수영에 딸린 종오품 별장(무관, 수령급)
(100쪽)임술년에 먼 섬에서 진인이 태어나서 강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육지로 건너와 빗자루로 쓸어내고 새 세상을 세우는데 그때 천하만민의 원통함이 풀리리라.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신유년의 닭이 울어서 계명산천이 밝아온다. 새들이 펼쳐지고 새 목숨들이 움터서 마을을 이루리라. 말세의 환란에는 마음만이 피난처니 신유닭이 울 때까지 마음밭을 잘 가꾸라. 밭전자 가운데 들어있는 십자가가 새 세상의 깃발로 펄럭이고 밭 전자 속에 숨어있던 하느님이 세상으로 건너와서 새밭을 이루니 사람들의 밭이 하느님의 마당이 되니라.
(영화 <저산너머> 에서도 김수환의 아버님이 '마음밭' 이야기를 한다).
(102쪽)서울에서, 황사영은 생업이 없었다. 황사영은 날마다 바빠서 밥벌이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109쪽)육손이 면천되다:정약현 집에서 따라온 육손이는 황사영이 노비 생활에서 풀어주어 제천 배론으로 옹기를 구우러 들어간다.
(103쪽)주여,이제 섬마섬마 섬마로 혼자서서 따로따로 걸음으로 주님께 걸어가옵니다. 주여 손을 잡아 주소서.
(119쪽)흑산도에서 유일하게 글을 깨친 이: 창대, 황사영의 이미지를 지닌.
(119쪽)영조-사도세자-정조
(135쪽)너는 무 배추 조개젓을 파는 자로 근본이 빈대와 같이 천하고 구더기와 같이 더럽다. 비틀리고 또 어긋나고자 하는 기운이 몸 속에 가득 차서 너의 패역한 무리들과 뒹굴며 소굴을 이루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살았던 장삿군이 받은 대우다.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인권 모독적인 표현이다.)
(142쪽)아리:경기도 교하의 관비.교하현감이 파직되어 떠나면서 아리를 사노로 삼았다. 위조문서를 만들어.
아리어미는 파주 현청의 관노였고 아비는 임진강 건너 나루터에 딸린 진노였다. 어미는 젖어미로 소문이 나 장단에서 예닐곱 명의 상전의 아이들을 젖먹여 기르고 그곳에서 죽었다.
아리는 현감부자에게 간음을 당하고 몰래 집을 떠난다.
(166쪽)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됨만 못하다.--정약현의 교육철학
(185)섬에서 유일하게 정약전의 말벗이 될 수 있는 창대:창대는 섬에서 태어나서 서너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고요히 들여다보아서 사물의 속을 아는 자였다.
(195)어획량을 속인 죄로 옥에 갇히는 섬사람들:
사실이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착취하는 관원들, 소나무 한 그루 마음대로 베지 못해 집을 짓거나 관을 짜는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음
(204)극악한 참언:이제 곧 때가 이르면 서양의 큰배들이 무수히 바다를 건너와서 조정을 겁박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리라는 요망한 말이었다. 서울에 잠입한 청국인 신부 주문모는 곧 들이닥칠 서양의 배들을 인도하기 위해 미리 온 길라잡이 겸 선발대이고 황사영이 그를 도와 터를 닦고 있다는 말도 남쪽에서 돌았다.
(206)개국이래로 국본이 이토록 망가진 적은 없었는데, 첫째는 굶주려서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의 참상이고 둘째는 무민하는 요언의 창궐이었다. 요언의 뿌리는 굶주림이었고 그 두가지는 실상 한가지였다.
(207)대비(정순왕후 김씨)가 내린 자교:
아, 저 먹을 것 없는 백성들은 어찌 수습할 것인지, 나는 잠들지 못한다.--아,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아, 구덩이를 파서 거적을 깔고 누워서 풀을 엮어서 덮으니 어찌 추위를 견디느냐,
구휼소에서 얻어먹는 죽은 솥 하나에 좁쌀 한 사발을 넣고 풀뿌리를 섞어 끓였으니 어찌 허기를 면하겠냐.--
아이의 고기를 먹은 자들을 붙잡아 문초하니 아이를 죽여서 먹은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를 주워서 구워먹은 것이라고 항변하니, 아 어찌 차마 들을 수있는 말인가. 어찌 죄를 물을 수가 있으며 어찌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학의 무리들은 어찌 죽기를 좋아하고 형틀에 엎드리기를 요 위에 눕듯 하며 어찌 산 자의 입으로 사후를 말하며 헤매고 더듬기를 소경처럼 하느냐.
--몇년 째 가물어서 산천이 타들어가고 논밭이 오그라져도 마침내 고요히 비가 내리지 않겠느냐. 감영과 관아 근처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감영 마당만 들여다보지 말고 멀리 사람을 보내서 이 마을 저 마을에 비가 내리고 안 내린 정황을 살펴서 비가 내리는 족족 파발을 보내서 시급히 알려라--
강토가 가물어서 타들어가니 내 육신이 생선처럼 구워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280)정약전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창대는 약전의 숨냄새를 맡았다. 멀리 끌려온 사내의 누린내가 깊었다.그 냄새 속에서 창대는 정약전의 몸속의 적막을 맡았다.
(전에는 이런 표현이 뭔가 신비롭고 멋져 보였다.지금은 아니다.기교적으로 느껴진다.)
(296)순매이야기:섬에 유배온 죄인의 핏줄로 태어나서 남편을 바다에서 잃고 다시 유배온 죄인에게 개가하는 팔자가 순매는 쓰라렸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쓰라림은,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남편이 타고 나간 배는 나무토막으로 흩어졌고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끝내, 라고 하지만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죽음을 긍정하기는 삶을 긍정하기보다 어려웠다. 산에서 칡을 캐거나 어린 소나무를 뽑아낼 때, 순매는 바다에 뜬 고깃배를 보면서 울었다.저 생선 한 마리처럼 작은 것이 어쩌자고 수평선을 넘어다니면서 생선을 잡는 것인지 순매는 배들이 가엾고 또 징그러웠다.
(327)대비의 자교:
내가 말하고 또 말하여도 마침내 교화를 따르지 않는 무리들에게 극률을 쓰려 하니 너희 수령과 방백들은 사학의 종자를 박멸하여 찌끄러기가 남아서 다시 창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329)주문모의 죽음:새남터 형장
(336)흑산에는 상록수가 밀생했다. 동백숲과 소나무숲은 폭양 속에 힘이 뻗쳐서 검게 빛났다. 소금기에 단련된 잎들이 번들거렸고 바람이 불면 숲은 뒤척이며 수런거렸다. 멀리서 보면, 햇빛이 좋은 날 섬은 먹빛으로 번쩍거렸고 흐린 날에는 시커먼 바윗덩이로 떠 있었다.
--흑산은 마지막 항로지표였다.해안 단애가 섬을 빙 둘러 막았고 파도가 사나운 날 멀리 가는 배들은 흑산에 접안하지 못했다. 원양으로 가는 배들에게 흑산은 마지막 섬이었고 하얀 바다와 잇닿은 검은바다의 섬이었다. 흑산의 검을 흑자가 단 한개의 무서운 글자로 이 세상을 격절시키고 있었다.
(337)-나는 黑山을 玆山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 정약전은 종이에 검을 玆를 써서 창대에게 보여주었다.
-같은 뜻일 터인데----
-같지 않다.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玆山)이다.
-바꾸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黑은 무섭다. 黑山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玆山)의 물고기다.**1815년 <자산어보>완성, 1816년 정약전 죽음
(365쪽)황사영 백서(1801년)의 일부:
이 나라의 병력은 너무나 약하고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배 수백 척에 정예한 군대 오륙만과 대포와 날카로운 무기를 싣고 이 나라 해안에 이르러 천주의 위엄을 세우시고 천주의 벌을 행할 뜻을 보여주십시오.
--황사영은 두 자짜리 명주폭(길이 62, 너비38cm의 흰비단)에 글자 일만 삼천 삼백여 개(한 줄에 110자씩 121행 13311자)를 써넣었다. 글자들은 울부짖고 애걸했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북경에 파견된 구베아주교에게 보내는 密書--참말로 믿는 양반의 정신상태가 이러했으니 나라가 망할 조짐이 아닐 수가 없다. 오호, 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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