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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황금과 피의 화가

맑은 바람 2021. 9. 1. 20:57

황금과 피의 화가
시공디스커버리총서/자닌 바티클지음/송은경 옮김/169쪽/1997년 9월5일초판1쇄/2009년 초판12쇄/

읽은 때 20210825~ 0901

(카뮈의  자전적 소설 '최초의 인간'에 감동하고 몰입은 했으나 깨알글씨와 내용의 진지함으로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했다. 이 그림 반, 글반의 화가 이야기가 쉼표 역할을 단단히 해준다.)

제1장 아라곤 사람, 프란시스코 고야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1746.3~1828.4)향년 82세/초상화의 대가/사라고사 외곽 지역 푸엔데토도스에서 도금의 대가인 아버지(호세  프란치스코 데 파울라 고야)에게서 출생/마드리드 카예 델 데센가뇨 1번지에서 45년 이상 거주/여기서 1784년에 아들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태어났고, 1795년 알바 공작부인이 다녀갔고, 1812년 웰링턴 공작이 초상화를 그리러 옴/1785년 산  페르난도 아카데미 회화부장 대리직에 임명/1786년 왕실 공식화가/
1788년 카를로스 4세 등극/1789년 4월 궁정화가에 임명됨/큰병 끝에 청력을 상실함/1799년 10월 수석 궁정화가가 됨

 

(16)1766년에서 1771년 사이, 고야는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다.(20세~25세)
**테피스트리:무늬를 놓은 양탄자
(22)빚 지고는 못사는 고야
1775년 마드리드에 정착한 고야는 사라고사의 친구들과 서신교환을 하고 선물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열적이고 관대하고 열광적이며 통찰력 있고 게다가 삶에 대한 애착도 끔찍한, 참으로 친밀한 한 인간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23)충분한 댓가를 받으며 일하던 고야는 잠시 만족감에 빠졌다. 하지만 굳이 자기재능을 직물을 매개로 발휘해야 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이 찾아들었다.
(24)고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국왕 카를로스 3세(1716~1788)가 다스리던 때였다./그가 엘 파르도궁을 대규모로 확장했기 때문에 이때 고야는 궁의 방들을 장식할 테피스트리 밑그림들을 수없이 청탁받았다.

 

(24-2)고야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
*사파테르--부유한 독신사업가/고야가 큰돈을 모은 후에 투자방법을 의논함/후에 아라곤 귀족에 봉해짐/서신교환을 많이함
*바이에우--궁정화가/고야가 동등한 위치에 오르는데 반대함(?)/고야의 처남
*후안 마르틴고이코에체아--
*피그나테이--왕실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인물
*호베야노스--후원자/마드리드 수석재판장/후에 7년간 추방됨
*카바루스--에스파냐 최초의 국립은행인 산 카를로스 창설/후에 백작에 봉해짐
*무스키스--후원자/재무장관/1785년 사망
*플로리다블랑카--후원자/법률가/재상
*페냐피엘 후작부부--1785년부터 30년간 후원자가 됨/후작부인은 에스파냐 상류사회의 꽃
*마누엘 고도이:(1767~1851)향년 84세/고야의 후원자/왕실경비대원/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정부/군총사령관/재상까지 지냄.
*페르난 누녜스 백작-후원자
**에칭etching:부식 동판 인쇄(물)/식각 도안/식각법/부식 동판/산의 부식작용을 이용한 판화

제2장 '일루스트라도스'시대의 에스파냐
**일루스트라도스illusionist :환각법을 쓰는 화가
(38)초상화가로 떠오른 고야:인물의 심리적인 폭이나 통찰력의 깊이가 놀라움/실물에 가까운 사실적 묘사 중시


제3장  위험한 행운
1789년 프랑스혁명, 카를로스 4세와 사촌간인 루이 16세가 에스파냐에 피신할 수 있게 도와달라 전갈을 보냄
(70)그가 그림을 그린 것은 '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에 산란해진 상상력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해서'/재정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충동과 창작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야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앉아 있는 대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자신이 직업상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는 것을 자타에게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제4장 궁정화가
1799년 10월 수석 궁정화가에 임명됨/사파테르에게 수석 궁정화가로 승진한 사실을 알리며 "왕실은 나한테 푹 빠졌다네"라고 말했다.


(94)나에 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든 간에 한결같이 진지한 자세로 그것에 임한다는 것. 적을 만들 필요도 없이, 누구에게 종속되지 않고 일한다는 것이다. 나는 남의 비위를 맞추고 싶진 않다--고야
(거만하고 권위적인 귀족들과 변화무쌍한 왕의 측근으로 살면서 그 자리를 성공적으로 지킨 고야의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실성이 있을까?)
(94-1)고야의 변함없는 철학:돈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예술의 자유는 경제적 자립 여부에 달려있다고 고야는 확신했다.
돈이야말로 고야 자신을, 그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제로 그가 온갖 정치적 격변을 목격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작업을 통해 축적한 재산과 재계와의 접촉 덕분이었다. 이같은 관계는 또한 그가 궁정이라는 제한된 세계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폭 넓은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성장하고 있던 중산계층의 초상화 작업이 차츰 그의 주요 일거리가 되었다.

제 5 장  어둠 속으로
(100)고야의 전쟁참사 시리즈 중 가장 잔혹한 그림:
'1808년 5월 2일'
'1808년 5월 3일'
"유럽의 압제에 맞서 찬연히 봉기한 우리 동포의 저 유명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나의 붓으로 기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관청에 요청한 후 그림/이 그림들은 전 에스파냐 국민을 민족주의의 열기로 단결시켰다./고야는 고발성 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기록과 증언

**카프리초스:‘변덕’이라고도 번역되지만, ‘자유로운 상상’이란 뜻
고야의 작품 '카프리초스'에 대한 해석:
(162-163)지성있는 사람들은 이 풍자판화들 하나하나에 어떤 수수께끼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사실 온갖종류의 인물 400명이 등장하는 데다 80점에 이르는 이 컬렉션은 도덕적 시구 80편을 조각한 교훈적 작품, 혹은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미치는 80가지 편견과 악에 대한 풍자적 조약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회 최고위층의 악행부터 범죄 집단의 악행에 이르기까지 이 비범한 작품에서 그는 모든 악들을 예리하게 조롱했다.
구두쇠, 호색한, 용기도 없으면서 큰소리치는 인간, 무지한 의사, 변덕스런 노파, 더러운 노인, 부랑자와 느림보, 창녀와 위선자, 한마디로 말해 바보와 게으름뱅이와 악한의 온갖 행태가 능수능란하게 묘사되어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해볼 많은 재료를 제공해 준다./어떤 나라에도 이런 류의 풍자물은 없다고. 아니 견줄 만한 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고야가 이 컬렉션을 구상하고 새기는 데 걸린 시간에 초상화를 그렸다면 800점은 그렸을 것이다./고야의 독보적인 솜씨와  재치로 빚은  이 작품에는 무려 400가지 형상의 인간과 동물이 등장한다./이 풍자 판화들은 악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보여주면서 우리의 잘못을 그 응분의 곤봉으로 때려준다. 이렇게 얻어맞음으로써, 우리는 먼저 억제하는 법을 배우고 다음으로 끔찍한 결과를 모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인간 존재에 관한 이처럼 진실된 희극에서 이보다 더 큰 효용이 어디있겠는가?--1811년 그레고리오 곤살레스 아사올라의 <세마나리오  파트리오티코>에서 

(상처한 후 며느리 친척인 레오카디아 웨이스와 동거하며 그녀를 모델로 한 것이 <라 마놀라>다. 35년을 함께 산 본부인의 초상화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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