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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카뮈

맑은 바람 2021. 8. 25. 00:34

.알베르 카뮈/김화영 옮김/미메시스/2014.10초판1쇄/398쪽/읽은 때 20210812~0825

(노벨상 수상 후 계획한 대작 '최초의 인간'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는 바람에 미완성작으로 남는다.
사후 책이 나오자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16개국에서 번역 출판했다 하니 적어도 남은 가족들은 그 끔찍한 가난의 굴레는 벗어났으리라.

본문의 분량이 얼마되지 않아서 좀더 무게감을 주려고 한 걸까?  상당 분량의 쪽수가 삽화로 채워지다니(절반 정도) 삽화를 활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가?
난 아무래도 삽화가 빠지고 활자로만 엮어진 것이 더 좋은데--
읽어 나가다가 삽화 때문에 맥이 끊어질 정도니--김화영 이름만 보고 샀는데--
'이야기는 주인공 이름만 바꾸고 카뮈 자서전이다. 그의 출생 시기, 온전하지 못한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와 장소를 사실 그대로 썼다.
카뮈는 노벨상 후에 자신의 삶을 펼쳐보이고 싶다고 생각했나 보다. 어느 인생이 소설 한 권이 되지 못하겠느냐마는 감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룬 카뮈가 온몸으로 느끼고 살아온 삶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텐데--)


제1부 아버지를 찾아서
(42)나이 40에 처음 찾아온 아버지의 묘석 앞에서: 스물아홉에 죽은 아버지, 자신은 마흔 살--그러자 그때 문득 굽이쳐 와서 그의 가슴 속을 가득 채워놓는 정다움과 연민의 물결은 고인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향하여 아들이 느끼는 영혼의 충동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어린아이 앞에서 다 큰 어른이 느끼는 기막힌 연민의 감정이었다.
(60)외할머니의 기억:시큼한 늙은 살 냄새, 일그러진 발을 바라보며 느꼈던 구역질
(우리 아가들도 내 얼굴의 땀냄새 때문에 뽀뽀를 하지 않으려 한다. 한 성깔하는 할머니도 "됐다, 오지마라"하며 손키스를 날린다)
(63)파리를 떠나 아프리카로: 숲이나 시냇물같은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그 변두리 달동네는 마치 가난하고 추한 멍울들을 벌여놓은 불행한 암처럼 차츰차츰 이물질을 이끌고 가서 도시의 한복판에까지 이르는데 그곳에 가면 화려한 무대장치 때문에 밤낮으로 그를 감옥처럼 가두어 놓고 불면의 밤 속으로까지 찾아들어 오는 시멘트와 강철의 숲을 때로는 잊어버리게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탈출했다. 그는 바다의 거대한 등 위에서 숨을 내쉬었고 위대한 평형을 이룬 태양 아래서 물결치듯 숨을 내쉬었고 마침내 잠을 잘 수 있었고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어린시절로 그가 살아가는 데나 모든 것을 극복하는 데 항상 힘이 되어 주었던 빛과 열기 가득한 가난의 비밀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66)어린시절의 친구들:금발의 날렵한 피에르, 시력이 나쁘지만 싸움실력이 만만치 않은  막스, 스페인 이발사의 아들 장과 늘 웃음 가득한 조제프, 장은 무엇이나 주워모았고 조제프는 가진 것을 잘 나누어 주었다
(80)해변에서 놀던 날:순식간에 그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대번에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힘차게 혹은 서투르게 헤엄을 치며 서로 고함을 쳐댔고 거품을 내거나 침을 뱉어댔고 용기를 내어 물 속 깊이 들어가 보기도 하고 물 속에서 누가 오래버티나 내기도 했다. 그들은 삶에서나 바다에서나 지배자였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호화로운 것을 받아서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부유한 재산을 가진 영주처럼 그것을 무제한으로 쓰는 것이었다.
(82)해변에서 늦도록 놀다 집에 왔을 때:할머니가 어디 갔다 오는 거냐 하고 물었다. 피에르하고 같이 산수 숙제 했어요.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머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고 아직 모래투성이인 양쪽 발목을 만져보았다. "해변에 갔다 왔구먼, 이 거짓말쟁이"
할머니는 그의 등 뒤로 가서 방 문 뒤에 걸려있는 황소 힘줄이라고 하는 조잡한 채찍을 벗겨들고 그의 종아리와 엉덩이를 서너 번 고함치고 싶을 정도로 아프게 후려쳤다. 잠시 후 그는 입안과 목구멍 속에 눈물이 가득한 채, 불쌍히 여긴 삼촌이 떠준 수프 접시를 앞에 놓고 눈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하려고 전신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할머니에게로 잠시 눈길을 던지고 나서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수프 먹어. 이제 됐다. 이제 됐어."
그제야 그는 울기 시작했다.
(84)어머니:알제리로 돌아와서 만난 어머니는 일흔두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꼿꼿했고  극도로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직은 원기가 있어 보이는 인상 때문에 10년은 더 젊게 보였는데 거동은 나른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지닌 여윈 체구의 집안 내력인지 온 식구들이 모두 다 이러해서 늙음도 이들에겐 별로 힘을 쓰지 못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의 부드러운 강인함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고된 노동을 해 왔지만 어린 코르므리가 뚫어지게 바라보며 탄복해 마지 않았던 그 젊은 여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98)자크의 교장선생님이셨던 르베스크씨(아버지와 같은 부대에 배속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피로를 잘 견디고 과묵한 사람
(102)마른전투:아랍인과 프랑스 인들로 구성된 알제리 사람들의 무리들은 빗발치는 포탄들 밑에서 매일같이 수백 명의 고아들을 만들어냈으며 그후 아버지 없는 아들 딸들은 가르침도 유산도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137)외삼촌 에르네스트: 통만드는 노동자로서의 그 힘든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영과 사냥을 좋아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자크를 사블레트 해변으로 데리고 가서는 그를 자기 등 위에 올려놓는 즉시 초보적이지만 힘찬 평영으로 헤엄을 쳐서 난바다로 나갔다.
**난바다: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151)삼촌과 사냥터에서: 자크에게는 지금도 가슴 속에 황홀한 그리움이 솟구치는 도취의 시간이 그제야 시작되는 것이었다./골짜기의 반대편에서 몇 발의 총성, 사냥개한테 놀라 메마른 소리를 내며 푸드덕 날아오르는 먼지색의 자고새 무리, 거의 동시에  반복되는 두 발의 총성, 개가 앞으로 달려나갔다가 두 눈에 광기 어린 불을 켜고 주둥이에 피와 깃털뭉치를 가득 물고 돌아오면 에르네스트와 다니엘이 그것을 낚아챘고 자크는 흥분과 두려움으로 가슴 두근거리며 그걸 받았다./에르네스트는 언제나 원숭이처럼 날렵했는데 이번에는 거의 자기 개만큼이나 빨리, 개하고 똑같이 고함쳐대면서 달려가 죽은 짐승의 뒷다리를 잡아 쳐들고 멀리서부터 신이나 헐떡대며 오고 있는 다니엘과 자크에게 보여주었다./한계도 없는 영토 위에서 경계도 없는 시간 동안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빛과 하늘의 광대무변한 공간 속에서 정신이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자크는 자신이 세상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부자라고 느꼈다.

(자연의 아이는 재물 따위에 파묻혀서 사는 아이들이 부럽지 않았다.) 
(172)카트린과 에르네스트:(자크 엄마와 외삼촌) 그들은 살이 아니라 피를 나눈 남편과 아내로서 둘다 불구로 인하여 사는 것이 그토록 힘들어진 가운데 서로 도우면서, 비록 짧은 토막말이나 간간이 던지며 무언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정상적인 부부들보다도 서로의 마음 속을 더 잘 읽으면서 한데 뭉쳐서 살아왔다.
(188-189)베르나르 선생과 가난한 아이들의 학교생활:
언제나 흥미진진한 수업/교실 안에서 딴 데 정신을 파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베르나르 선생의 교육방법은 품행의 면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할 줄 모르지만 반대로 수업만은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파리들까지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그는 항상 적절한 순간에 보물이 가득 든 그의 장 안에서 수집 광석들, 식물표본, 나비들, 그리고 표본으로 만든 곤충들, 학생들의 산만해지려는 주의력을 환기시킬 만한 것들을 꺼내놓을 줄  알았다./산수과목의 경우 그는 암산 콩쿠르를 통해서 학생들의 두뇌가 빨리 회전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가장 먼저 정답을 말하는 사람은 월말 성적에 점수를 가산받았다. 그외에는 능숙하고 정확하게 교과서를 활용했다. /교과서들은 언제나 본토에서 사용하는 것들이었다./눈덮인 지붕, 살을 에는 듯한  추위, 그들에겐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교과서에서 읽고 있었다./오직 학교만 자크와 피에르에게 그런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학교에서 그토록 정열적으로 좋아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집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가난과 무지로 인하여 삶이 안으로 닫혀 버린 것처럼 더욱 견디기 어렵고 더욱 음울했으니까 말이다. 가난이란 출구가 없는 요새와 같은 것이다.
(190)학교는 그들에게 단순히 가정생활로부터의 도피장소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베르나르 선생님의 반에서는 적어도 학교는 어른들에게보다는 아이에게 훨씬 더 근원적인 내면의 굶주림, 즉 발견에의 굶주림을 채워주고 있었다.
제르맹 선생님의 반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가장 높은 배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들이 나름대로 세상을 발견해 나갈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선생님은 단순히 그가 월급을 받고 가르치도록 되어 있는 것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 속에서 그들을 단순 소박하게 맞이해 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그 삶을 살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그가 사귀었던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으며 자신의 사상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는 교실에서 단 한번도 종교에 대하여, 또 어떤 선택이나 신념의 대상이 되는 것이면 어느 것에 대해서나 절대로 비방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도둑질, 밀고, 무례함, 불결 등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그만큼 더 강하게 배척했다.
(191)도르즐레스의 '나무십자가':
베르나르 선생님이 시간이 남을 때 읽어주는 전쟁소설/그는 선생님이 성심성의껏 읽어주는 이야기에 성심성의를 다하여 귀를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또다시 그에게 눈과 귀한 겨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또한 진창에 빠져서 뻣뻣해진 무거운 천의 옷을 입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며 머리 위로 포탄과 로켓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참호 속에서 지내는 괴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와 피에르는 매번 더 절박하게 조바심치며 책 읽어 주는 시간을 기다렸다.
(193)어느 날  소설의 끝에 이르러 한결  더 나직한 목소리로 D가 죽는 대목을 읽어준 베르나르 선생님이 자신의 감동과 추억에 잠긴 채 말없이 책을 덮고서 놀라움과 침묵에 빠져 있는 교실 안으로 눈을 들었을 때 맨 앞줄에 앉아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자크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로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은 끝없는 흐느낌에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195)체벌의 시대:자로 엉덩이를 맞는 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벌은 가혹하다는 생각없이 받아들여졌는데 그것은 우선 그들 대부분이 집에서 매를 맞고 있어서 그들에게는 징벌이 자연스러운 교육 방식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다음으로는 선생님의 공평무사함이 절대적이어서 항상 같은 것이긴하지만 어떤 종류의 잘못을 저지르면 문제의 속죄 의식을 치르게 되는지 누구나 미리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베르나르 선생님이 눈에 보이게 아꼈던 자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당했고 심지어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하게 편애했던 바로 다음 날 벌을 받아야 했던 적도 있었다.
(196)자크와 뮈노즈의 싸움:수업시간에 귀염둥이라고 놀림을 당한 자크는 뮈노즈에게, "좋아, 그럼 빌어먹을 너희 엄마다"라고 말했다./이것 역시 즉각적으로 싸움으로 이어지게 마련인 의식적인 욕이었다.
지중해 연안 지방들에서는 옛날부터 어머니와 조상들에 대한 욕이 가장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은 '푸른들'(아이들의  결투장)로 가서 결투를 벌인다./뮈노즈를 가볍게 이긴 카뮈가 의기양양한 채로 푸른들을 벗어났다
(198)그러나 푸른들에서 나오면서 뮈노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가 때린 사람의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보자 돌연 어떤 어두운 슬픔의 감정으로 그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이리하여 그는 남을 이긴다는 것은 남에게 지는 것 못지않게 쓰디쓴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크의 선량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
(202)베르나르선생님의 특혜: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가까운 무렵이었는데 베르나르 선생님이 네 명의 아이들을 불렀다
"자, 너희들은 내가 가르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다. 나는 너희들을 중고등학교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시키기로 결정했다. 시험에 합격하면 장학금을 받게 되고 대학입학자격시험까지 중고등학교 전 과정을 이수할 수 있게 된다. 초등학교가 학교들 중에서 제일 좋은 학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별로 소용이 없다. 중고등학교에 가면 모든 문이 다 열린다. 나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기왕이면 너희들처럼 가난한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부모의 허락을 받아오라 했으나 할머니는 자크가 내년부터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얘기를 들은 베르나르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를 설득했다. 수학 여행도, 단체영화 관람도 가본 적이 없는, 가난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공감이 가고 마음이 짠하다)
(212)영성체를 위한 교리공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자크는 기억력이  탁월했으므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태연하게 암송했다.
교리강좌를  담당한 신부는 깡마르고 매몰찼다. 엉뚱한 오해로 그에게 뺨을 맞고 자크는 입안이 터져 피가 났으나 울지 않았다. 아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일생 동안 그를 울게 한 것은 선량한 마음씨와 사랑이었지 절대로 악이나 학대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오히려 그의 마음과 결심을 더욱 굳혀 주었다.) 그를 쳐다보고 나서 자리로 돌아갔다. 교리강좌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는 방심한 상태가 되어 신부가 그에게 말을 하면 원망도 친근감도 느끼지 못한 채 태연히 그를 바라보면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희생과 관계된 질문과 답을 한 군데도 틀리지 않은 채 암송했다.
(213)이름 모를 신비:당시 그가 잠겨 있던 진정 어리고 내면적이며 어렴풋한 신비의 세계는 오직 그의 어머니의 은근한 미소나 침묵의 일상적인 신비를 확대시켜 줄 뿐이었다. 저녁이 되어 그가 집의 식당으로 들어가면 집안에 혼자뿐인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어머니와 어머니의 속에는 있으나 이 세상과 대낮이 천박함에는 더 이상 속해 있지 않은 그 무엇을 향한 절망적인 사랑이 가득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문턱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216)시험날:"서두르면 안돼. 문제의 내용과 작문의 주제를 잘 읽어야 해. 여러번 읽으라고.시간은 충분하니까."하고 교사가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다. 그들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문제를 읽을 것이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었다.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고 옆에만 있으면 인생에 거칠 것이 없는 선생님이니 그가 지도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있다는 건 얼마나 환영할 만한 일인가?)
(217)베르나르 선생님과의 작별:"네겐 이제 더 이상 내가 필요없게 되었구나. 학식이 더 많으신 선생님들을 만나게 될 테지. 그렇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그는 창가로 달려가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제부터는 그를 혼자 남겨놓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험에 합격했다는 기쁨 대신에 엄청난 아픔이 그의 어린 가슴을 쥐어 뜯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 합격에 의해서 그는 그의 것이 아닌 낯선 세계,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저 선생님보다 다른 선생님들이 더 유식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세계 속으로 던져지기 위하여 저 가난의 순진무구하고 진정어린 세계, 사회 속의 섬처럼 안으로 닫혀 있으되 가난이 가족과 유대감을 대신하는 세계로부터 이제 막 떨어져 나왔음을 미리부터 알게 되었다는 듯이, 이제부터 그는 도움을 받지 않고 배우고 이해해야 하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던 하나뿐인 그분의 도움없이 마침내 어른이 되어야 하고, 가장 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드디어 혼자 일어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220)자크의 생가 방문:
--당신네 농가가 내가 태어난 집이라고 알려준것은 늙은 의사였어요.
--그래요, 그 농가는 생타포트르 영지의 일부였지만 우리 부모님이 전쟁 뒤에 그걸 샀어요. 당신이 여기서 태어난 건 절대로 아닐 겁니다. 우리 부모님이 전부 새로 지은 집이니까요.
--그분들이 전쟁 전에 우리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나요?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부모님은 튀니지 국경 지방에 정착했다가 나중엔 문명한 곳 가까이 가서 살고싶어졌던 거예요. 그분들에게 솔페리노만 해도 문명이 발달한 곳이었죠.
--그곳의 그 전 관리인 얘기를 못 들어봤나요?
--이 고장 분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여기선 아무 것도 그냥 두는 게 없어요. 때려 부수고 새로 짓지요. 미래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231~235)늙은 의사가 들려주는 아버지 이야기:알제의  솔페리노는 1848년 2월 혁명파들이 와서 세운 고장/파리의 실업자들을 위해 조직한 해외이주단의 일원으로 이곳에 옴/한 달 이상 걸려 새 땅에 온 이민자들의 3분의 2는 곡괭이도 쟁기도 만져 보지 못한 채 이미 죽고 없었다.
(249)최초의 인간: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뿐,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 주는 그런 순간들을 그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었다. 그는 혼자서 배우고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잠재적 능력만을 지닌 채 자라고, 혼자서 자신의 윤리와 진실을 발견해 내고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탄생이라고 할, 타인들과 여자들에게로 또 새로이 눈뜨지 않으면 안 되었다.
(249-2)지중해는 내 마음 속에서 두 개의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다. 추억들과 이름들이 정연한 공간 속에 간직되어 있는 세계가 그 하나이고 모래바람이 광대한 공간들 위에서 인간들의 자취를 지워버리는 세계가 그 하나다.
그는 무명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며 가난하고 무지하고 아집에 사로잡힌 삶에서 벗어나려고 했었다.

제2부  아들 혹은 최초의 인간
(258-259)학년 초의 가정환경조사서:
아버지가 전사하여 국가가 보호하는 아동이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직업에 '하녀'라고 써야 한다는 피에르의 지적을 받고는 하녀라고 밝힌다./자크는 그 표현을 써넣기 시작하다가 멈추었고 갑자기 수치심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또 수치스러워졌다./아이란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부모가 그를 대표하는 것이다.그는 부모에 의하여 규정된다. 즉, 세상사람들의 눈에 규정되는 것이다. 바로 그 부모를 통해서 아이는 진짜로 판정된다는 것을, 돌이킬 수 없이 판정된다는 것을 느낀다. 자크가 이제 막 발견한 것은 바로 세상의 판정이었고 또 그 당시 자신의 못된 심사에 대한 스스로의 판정이었다.
그는 모질고 졸렬한 자존심 때문에 흔들림없는 글씨로 서류에다가 '하녀'라고 써가지고 그런 것에는 별로 주의도 하지 않는 것같은 복습교사에게로 시치미를 떼고서 갖다주었다. 그렇게 하고서도 자크는 결코 자기 집안의 형편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비록 절망적으로밖에 사랑할 수 없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한 가난한 아이가 아무것도 부러워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때로는 수치스럽게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난하거나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새학기 환경조사서는 감당하기 벅찬 숙제였다. 남자가 물에 손을 넣고 음식을 만든다는 건 1960년대에는 아주 희귀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조리사'인 걸 밝히기 힘들어 '상업'이라고 쓰곤 했다. 사실대로 적지 못하는 걸 속상해하며~ 60년이 흐른 지금, 아버지가 하셨던 일은 오히려 인기좋은 직업으로 인정받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262)친구 디디예:프랑스 중류가정의 아이/장래 희망이 성직자/스스로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자크에게도 요구함/가정과 조국과 종교의 아들인 그는 자크에게 기이하고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슴 속 깊이 감춘 채 열대지방에서 돌아온 저 햇빛에 그을린 모험가들 같은 매혹을 지닌 것으로 느껴졌다.
(274-275)제비들의 대이동:
현저하게 느껴지는 첫추위가 오면 평소에 바닷가의 대로들이나 학교 앞 광장 위, 혹은 가난한 동네의 하늘에 날아다니며 때로는 무화과, 바다에 뜬 쓰레기, 금방 눈 짐승의 똥을 향하여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내리꽂히곤 하던 제비들이 처음에는 전차를 마중가듯이 좀더 낮게 날면서 복도처럼 좁은 밥아준 거리로 외롭게 나타났다가 단번에 높이 솟아올라 집들 위의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그들은 수천 마리씩 떼를 지어 나타나 생트빅투아르 작은 광장의 전깃줄이란 전깃줄 위에는 모두 서로서로 몸이 닿을 만큼 촘촘하게 끼어앉아 약식 상복같은 모가지 위로 머리를 까딱까딱하기도 하고 꼬리를 톡톡 치며 두 발을 약간 옮겨놓아 새로온 놈에게 자리를 내주기도하고 그 작은 배설물로 인도를 뒤덮기도 하면서, 아침부터 줄곧 모두가 하나로 간간이 재잘되는 소리가 섞인 짹짹거림만으로 길바닥 저 위에서 그칠 줄 모르는 비밀회의를 하는데 그 소리가 차츰차츰 높아지면서 저녁이 되어 아이들이 돌아가는 전차 쪽으로 달음박질칠 때쯤이면 거의 귀가 아플 지경이 되다가 그 무슨 눈에 보이지 않는 명령을 받았는지 그 수천 개의 작은 머리들과 검고 흰 꼬리들이 잠이 든 새들의 몸 위로 가만히 수그러지면서 그 시끄럽던 소리가 돌연 딱 멈추어 버리는 것이었다. 2,3일 동안 조그만 무리들을 이루어 사엘의 구석구석에서, 때로는 그보다 더 먼 곳에서 도착한 새들이 처음부터 와 있던 다른 새들 사이에 조금씩조금씩 끼여 앉으려고 애를 쓰는가 하면 차츰차츰 주력 부대의 양쪽이 길을 따라 건물 벽의 턱 끝마다 자리를 잡고는 행인들의 머리 위로 점차 날개치는 소리와 지저귐 소리를 높여가다가 마침내는 귀가 아파질 정도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마찬가지로 갑자기 거리가 텅 비어버렸다. 밤에, 동트기 바로 전에 새들이 다함께 남쪽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때부터 때이른 겨울이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아직도 더운 저녁하늘에 제비들의 날카로운 지저귐 소리가 들리지 않는 여름이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생트빅투아르 교회 앞에 밀집해 있다가 떠나가는 제비떼의 광경 묘사가 참으로 실감나고 장관을 이룬 모습이 눈에 선하다.)
(278)낮고 먼 동네 아이들:아이들은 하루가 끝나고 학교 정문에서, 혹은 조금 더 떨어진 총독부 광장에서 즐거운 친구들 그룹과 헤어져 가장 가난한 동네들을 향해서 떠나는 붉은색 전차 쪽으로 걸어갈 때 그 뚜렷한 구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느꼈던 것은 자신들의 열등감이 아니라 분명 구별이었다. 그들은 다른 곳 사람들일 뿐이었다.
(279)축구광이 된 자크:이미 반에서 가장 우수한 우등생들과 대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자크가, 우수한 머리는 없지만 기운찬 두 다리와 무진장의 호흡 능력을 타고난 열등생들에게서도 존중과 사랑을 받게 된 곳은 바로 그 경기장이었다.
자크는 더디게 키가 커서 '저공비행'이니 '땅딸보'니 하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별명을 얻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발끝에 공을 달고 정신없이 달려 나무와 상대선수를 차례로 따돌리며 운동장과 인생에서 왕된 기분을 만끽했다.
(283)불가사의한 어머니:할머니가 또 이튿날엔 5시 30분에 일어나야 하니 일찍  자야 한다고 말하면  그는 우선 삼촌에게, 그리고 끝으로 어머니에게 키스를 했다. 어머니는 다정하면서도 건성인 키스로 응해주고 나서는 박명 속의 그 부동자세로 되돌아가 자신이 앉아 있는 언덕의 저 발 아래서 지칠 줄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는 삶의 흐름과 거리 쪽으로 지칠 줄도 모른 채 시선을 던지고만 있었고, 아들은 목이 컥 막혀 오는 것을 느끼면서 지칠 줄도 모른 채 어둠 속의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행과 대면한 채 불안 가득한 눈으로 구부리고 있는 그 메마른 등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지칠 줄도 모른 채'가 세 차례나 반복된 것은 번역자의 미스일까 아니먄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일까?)
(292)단짝 피에르와 상이군인병원 뒤뜰에서의 놀이:(1928년 무렵의 카뮈의 어린 시절은 1950년대의 나의 삶과 이모저모 일치한다. 엄마랑 둘이 사는 친구가 있는데 그 엄마는 서울대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 학교가 끝나면 학교 뒷쪽에 뚫린 철조망으로 들어가(조그만 계집애들이)그 엄마를 만나고 넓은 병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았다.
사내애들은 한층 위험한 장난을 즐겼나 보다. 협죽도와 사이프러스 열매를 으깨고 갈아 독약을 만들다니.)
(298)그렇지만 그들은 한번도 그 신비스러운 마약들이 어떤 친구나 미워하는 선생님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그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 자신과 그들이 몸 담아 살게 될 사회에 다같이 매우 난처한 점이 될 것이었다.
(302)시립 도서관 가는 날:자크는 항상 손에 들어오는 책이면 무엇이나 정신없이 탐독했고 살아가고 놀이를 하고 몽상할 때와 똑같은 탐욕으로 그 책들을 머릿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서 그는 순진무구한 어떤 세계로 도피할 수 있었다. 거기서는 부와 가난이 둘다 완전한 비현실이었기 때문에 똑같은 흥미의 대상이었다.
(305)독서광:두 아이들의 순전히 직관적인 독서방식 때문에 그 나머지 책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선택은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문화의 세계에 있어서 우연히 가장 나쁜 방법은 아니어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제치는 이 두 식탐가들은 최악과 더불어 최상의 것도 함께 삼켰으며 게다가 어느 것 하나 머릿속에 담아둘 생각은 하지 않았고 또 실제로 거의 아무것도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면서도 강력한 감동이 여러 주일, 여러 달, 여러 해에 걸쳐 그들의 마음속에 일상의 현실로는 환원할 수 없는 영상과 추억들, 그러나 꿈과 몽상을 현실의 삶과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사는 이 뜨거운 가슴의 소년들에게는 분명 현실 못지 않게 실감나는 영상들과 추억들의 세계를 생겨나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도서관에 들어가면서 보게 되는 것은 검은 색의 책들이 아니라 문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자기 동네의 편협한 삶에서 그들을 낚아채 가는 어떤 공간과 다양한 지평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이 빌릴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받아 옆구리에 꼭 끼고 그 시간이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대로로 걸어나와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의 열매들을 발밑에 밟으며 그 책들에서 맛보게 될 감미로운 맛을 예측도 해 보고 벌써부터 지난 주의 그것과 비교도 해 보다가 큰 골목에 이르러 자신들의 즐겁고 탐욕스러운 희망을 북돋우어 줄 어떤 구절을 골라 보려고 이제 막 켜진 가로등의 불완전한 불빛 아래서 그 책들을 펴보기 시작하는 그런 시간이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얼른 헤어져 집의 식당으로 달려가서는 석유 램프 불빛 아래 방수포 위에다가 책을 펴놓았다.
피에르와 자크는 세련된 저자들과 독자들이 좋아하는 여백이 많고 널찍하게 조판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아무리 오랫동안 많이 먹어도 바닥이 나지 않는, 엄청난 식욕을 가진 사람들을 유일하게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저 엄청난 양의 어떤 시골요리처럼 촘촘하게 조판된 행을 따라 자잘한 활자들이 가득히 달리고 단어와 문자들이 빽빽이 들어찬 페이지들이 더 좋았다. 그들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뭐든지 다 알고 싶었다. 그들은 잘 쓴 책이건 험하게 쓴 글이건 상관하지 않았고 오직 글의 내용이 알기 쉽게 분명하게 씌어 있고 격렬한 삶으로 가득차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책이야말로, 아니 그런 책들만이  그들에게는 머리 밑에 고이고 무거운 잠을 자도 될 만큼 근거가 있는 꿈을 줄 수가 있었다.
책 속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벌써 그가 앉아 있는 방은 어둠 속에 잠기고 그의 동네 자체와 그곳의 소음, 도시와 세계가 모두 지워져 버리는 것이어서 미친 듯한 열광 및 탐욕과 더불어 독서가 시작되는 즉시 그 모든 것들은 완전히 사라지면서 아이는 완벽한 도취경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독서광들만이 누리는 이 행복!)
(309)자크의 생활:그는 삶의 가장 오래된 초년기를 사실상 그 동네에서 보냈지만 현재와 더 많은 미래의 삶은 중고등학교에 있었다. 그 결과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결국 그 동네는 저녁, 잠 그리고 꿈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309-312)7월 초의 시상식:어머니와 할머니가 자랑스레 학교를 찾는 날/사회적인 의무나 즐거움이 별로 없고 정각에 가지 못할까봐 겁을 집어먹는 가난한 사람들이 늘 그렇듯 코르므리 집안 식구들은 당연히 넉넉하게 앞당겨 와 있었다./군악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고 내빈석엔 총독부의 고위관리가 자리잡고 앉았다./카트린 코르므리는 아무 말도 못 들으면서도 경청했고 조바심이나 따분하다는 표시를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연설은 알제리 청중들에게 문자 그대로 이해불능이 되고 말았다./오직 카트린 코르므리만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끝도없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박학과 지혜의 빗줄기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받고 있었다./우등생들은 연단에 올라가 축하의 악수를 받고 선물로 받은 책꾸러미를 들고 연단을 내려왔다. 자크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상으로 받은 책들을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314)휴가가 없는 가족의 일상:그들에게 휴식이란 모든 식구들에게 돌아가는 식사가 더욱 가벼워지는 것을 의미한다./그 무엇도 보상해주지 않는 실직은 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재앙이었다./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언제나 누구보다도 더 관대한 사람들인 이 노동자들이 일자리 문제에 관한 한 언제나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유대인, 아랍인, 그리고 결국은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네 일자리를 훔쳐간다고 욕을 퍼부어 대는 외국인 혐오증 환자들이었다./이 동네에 있어서의 노동은 덕목이 아니라 어떤 필연성이었다.
(315-316)알제리의 여름:구멍 뚫린 운동화, 싸구려 바지 그리고 목둘레가 둥글게 파진 작은 무명 메리야스 차림으로 바싹 마른 길거리들을 돌아다니는 피에르와 자크에게 있어서 방학이란 우선 더위였다. 비가 마지막으로 온 것이 가장 늦어야 4월 아니면 5월이었다. 몇 주일 몇 달을 두고 점점 까딱도 않고 한 자리에 박힌 채 점점 뜨거워지기만 하는 해는 건물의 벽들을 말리고 비틀고 볶았고 칠과 돌과 기와를 가는 먼지로 빻아놓아 그것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려서 길거리, 상점들의 진열대, 모든 나뭇잎들을 뒤덮었다. 그래서 7월에는 동네 전체가 일종의 회색과 노란색 미로같이 되어 낮에는 모든 집의 모든 덧문들이 꽁꽁 닫힌 채 인적이 없어지고 그 위에 햇빛만 거칠게 군림하면서 집 문턱에 엎드린 개와 고양이들을 후려치고 인간들은 그 무서운 사정권 안에 들지 않기 위하여 벽을 쓸며 다니는 것이었다. 8월이 되면 해는 더위 때문에 잿빛이 되어 무겁고 축축해진 하늘의 둔탁한 솜뭉치 뒤로 자취를 감추고 거기서 흐릿하고 뿌옇고 눈에 피로감을 주는 빛이 흘려 내려와 거리마다 마지막 남은 색채의 자취들을 지워버렸다.
여러 주일 동안, 마치 이 세상엔 바람도 눈도 가벼운 물도 있어 본 적이 없었다는 듯이, 천지창조 이후 9월의 그날까지 있는 것이라곤 오직 끓는 듯이 데워진 회랑들이 뚫린 그 거대하고 메마른 광물 덩어리와 그 속에서 좀 정신이 혼란된 채 눈을 한군데 박고 먼지와 땀에 뒤덮여 가지고 천천히 움직이는 존재들뿐이라는 듯이, 여름과 그 신민들은 이렇게 무겁고 축축하고 찌는 듯한 하늘 아래서 겨울의 서늘함과 물의 기억마저 잊혀질 지경이 되어 어정거리는 것이었다.그러다가 극단적인 긴장 상태에 이를 만큼 수축된 하늘이 갑자기 둘로 갈라졌다. 격렬하고 넉넉한 9월의 첫 비가 도시를 흥건히 적셨다.
(317)그제야 아이들은 거리로 튕겨나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달리며 골목길에 끓어오르는 탐스런 시냇물 속에 신이 나서 뒹굴기도 하고 큰 물 웅덩이 속에 어깨를 맞잡고 둥글게 둘러서서 웃음과 고함이 가득한 얼굴로 끝없이 내리는 비를 향하여 고개를 젖힌 채 박자 맞추어 발을 구르며 새로운 포도 수확 노래를 부르면서 포도주보다도 더 취하게 하는 더러운 물을 솟구치게 했다.
아 그렇다. 더위는 끔찍했다. 그리하여 흔히 거의 모든 사람들을 미치게 했고 날이 갈수록 더욱 신경이 곤두서게 하여 마침내는 어떤 반응을 보이거나 소리치거나 욕을 퍼부을 힘도 의욕도 없게 만들어 그 짜증이 더위 그 자체처럼 쌓이고 쌓였다가 마침내 사납고 슬픈 그 동네 이곳저곳에서 돌연 폭발했다.

(더위에 미쳐버린 이발사가 들고 있던 면도기로 손님의 목을 베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이방인'을 떠오르게 했다. 알제리의 여름이 피부로 와 닿는 것만 같다.)
(319)자크의 여름방학:열세 살 자크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방학 기간 내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322)방학은 이제 끝장이었다. 그 더위 그 권태와 더불어 여름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여름은 지난 날 그를 전혀 딴 사람으로 만들어 놓던 그 하늘, 그 공간, 그 절규를 잃고 말았다. 이제 자크는 가난에 찌든 그 갈색의 거리에서가 아니라 시내 중심가에서 그의 한나절을 보내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부자의 시멘트가 가난뱅이의 회벽을 대신하면서 집들이 더 고상하고 더 쓸쓸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자크가 쇠붙이와 그늘의 냄새가 나는 가게에 들어서는 시간인 아침 여덟 시만 되면 그의 마음 속에서 불빛이 꺼졌고 하늘이 사라져 버렸다./자크에게 있어서 긴긴 여름은 어둡고 광채없는 날들과 무의미한 일거리로 닳아 없어져 갔다.

(열세 살 소년에겐 가혹한 형벌이리라.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그 노동을 당신의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허리가 휘고 뼈가 부서져도 그저 다 당신 몫이라 생각하고 지고 살았다. 돌아가신 후에야 이 모든 것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것을--)
(324)비록 지금까지 가난 속에서 살아왔지만 자크는 그 사무실에서 천박함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발견했고 잃어버린 빛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326)무더위 속에서 빽빽하게 들어찬 그 어른들 아이들(노동자들)은 모두 그들을 기다리는 집 쪽으로 돌아서서 혼이 깃들지 않은 노동과 불편한 전차 속에서의 기나긴 왕래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오는 급한 잠 사이에 나누어진 그 삶에 체념한 채 조용히 땀을 흘리면서 말이 없었다./그때까지 그는 오직 가난의 풍부함과 즐거움밖에 몰랐었다. 그러나 더위와 권태와 피로는 그에게 가난의 저주를, 끝도 없는 단조로움이 날들을 너무 긴 동시에 너무 짧게 만들어 놓는 저 눈물겹도록 멍청한 노동의 저주를 드러내보이는 것이었다.
(331)할머니의 체벌이 끝나다: 그는 이제 어른이었다. 그는 빚진 것을 약간 갚은 것이었다. 집안의 가난을 조금 덜어 주었다는 생각을 하자, 사람이 자유로운 몸이 되어 아무 것에도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에 찾아오게 마련인 거의 매서울 정도의 긍지가 마음 속에 차올랐다./그리하여 어느 날, 지금까지는 할머니가 때리면 마치 그것이 어린아이의 삶에 있어서 불가피한 의무에 속한다는 듯이 꾹 참고 맞고만 있었던 그가 돌연 폭력과 광란에 미쳐버린 듯 그녀의 손에서 소 힘줄 회초리를 뺏어들고 맑고 싸늘한 두 눈만 보면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은 그녀의 허연 머리를 당장이라도 후려칠 듯한 기세로 대들자 할머니는 사태를 깨닫고서 뒤로 물러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면서 물론 그런 몹쓸 자식을 키워놓은 불행을 눈물로 한탄도 했지만 이제 다시는 자크를 때리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사실 할머니는 다시는 그를 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에 월급을 벌어오기 위하여 비썩 마르고 근육질이며 더벅머리에 과격한 눈매를 번뜩이며 여름 내내 일을 했던 그 소년 속에서 과연 옛날의 그 어린아이는 죽어서 이제막 고등학교 축구부의  정식 골키퍼로 지명되어 다시 태어났고 그보다 사흘 전에는 깜박하는 바람에 어떤 처녀의 입술을 생전 처음으로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카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가 살아서 계속 글을 썼더라면 사랑 이야기, 장 그르니에 선생 이야기, 축구이야기, <이방인>과 <페스트>라는 세계 명작을 탄생시킨 이야기가 맛깔스럽게 펼쳐졌을 텐데~)

부록
(376)소설 속의 베르나르선생님(실제는 제르맹 선생님)과 카뮈의  편지:1957년 11월19일

친애하는 제르맹 선생님,
요 얼마동안 저를 에워싸고 시끄러웠던 소음이 좀 가라앉기를 기다려 이제야 선생님께 진심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막 저 자신이 얻고자 청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과분한 영예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노벨문학상 수상)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제가 어머니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선생님이 그 당시 가난한 어린 학생이었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리고 손수 보여주신 모범이 없었더라면 그런 모든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영예를 지나치게 중요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선생님이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드리고, 선생님의 노력, 일, 그리고 거기에 바치시는 너그러운 마음이 나이를 먹어도 결코 선생님께 감사하는 학생이기를 그치지 않았던 한 어린 학동의 마음 속에 언제나 살아 있음을 선생님께 말씀드릴 기회는 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키스를 보내며 
--알베르 카뮈
(이상은 카뮈가 제르맹 선생님께 보낸 편지 전문이다)

(377)알제, 오늘 1959년 4월 30일(제르맹 선생님의 회신)
그리운 아이에게
책의 저자인 JCI브리스빌 씨가 고맙게도 헌사를 쓰고 네가 네 손으로 직접 부쳐준 책 <카뮈>는 잘 받았다. 너의 그 고마운 정성이 내게 얼마나 기쁨이었는지도 그걸 네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구나.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젠 다 컸지만 내겐 언제나 '내 귀여운 카뮈'로 남아 있는 너를 힘껏 안아주고싶구나./너는 언제나 너의 천성,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본능적인 부끄러움을 나타내었지. 너는 단순하고 직설적이어서 그 점 효과적이었단다. 그리고 어지간히도 착했지!
그런 인상은 내가 교실에서 받은 것이다. 자기 직업을 꼼꼼히 수행하고자 하는 교육자는 자기 학생들, 자기 자식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고 그런 기회는 언제나 있는 법이지. 대답 하나 행동 하나 태도 한 가지도 많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그 착한 꼬마녀석이었던 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흔히 아이는 장차 그가 될 인물의 싹을 담고 있는 법이야. 교실에서 보면 너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지.너의 얼굴에는 낙관적인 마음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너를 세심하게 관찰하면서도 나는 한번도 너의 실제 가정 형편은 짐작도 못했단다. 장학생 명단을 정하는 문제 때문에 너의 엄마가 나를 보러왔을 때 그저 대강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너는 다른 친구들과 다름없는 것같이 보였던 거야. 너는 언제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 너의 형과 마찬가지로 너의 옷차림은 말쑥했었다. 이 점 나는 너의 엄마에게  이 이상으로 칭찬의 말을 할 수는 없을 것같구나.
(378)네가 너의 힘을 과용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다. 너의 오랜 친구이니 이런 말을 해도 용서하거라. 너에겐 남편과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좋은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 내 사범 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가끔 우리들에게 하시던 말씀을 할까 한다. 그분은 우리들한테 아주, 아주 혹독하셨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
'대자연은 커다란 책 한 권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과도한 짓을 저지르면 아주 꼼꼼하게 그걸 모두 다 적어 놓는단다.'
솔직히 말해서 그 현명한 생각은 내가 그것을 잊어버릴 뻔할 때 몇 번씩이나 나를 만류해 주었어. 그러니 이것봐, 대자연의 큰 책 속에 너에게 할애된 페이지가 깨끗하게 남아 있도록 노력해야 해.
봉직하는 동안 줄곧 나는 아이에게 가장 신성한 것, 즉 자신의 진리를  찾는 권리를 존중해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 모두를 다 사랑했고 그래서 나의 사상을 나타내서 너희 어린 지성에 부담을 주지는 않으려고 무진 노력을 했다.
(379)하느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어떤 이들은 믿고 어떤 이들은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나는 교사들을 종교, 더 정확히 말해서 가톨릭교의 외판원으로 삼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은 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제르맹 선생의 아버지가 알제 사범학교 다닐 때 영성체 모시는 의무가 지겨워 그걸 받아서 책갈피에 넣었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한 사실은, 당시 가톨릭이 얼마나 강압적이었나를 보여 준다)
(379-2)그리운 아이야, 너의 시간을 많이 빼앗으니 용서해 주기 바란다. 여기는 다 잘있다. 내가 편지를 못 쓸 때도 나는 자주 너희들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아다오. 제르맹 부인과 나는 너희 네 식구를 힘껏 안아 주고 싶다. 너희들을 사랑하는.
(380)카뮈의 마지막 순간:
1960년 1월 4일 월요일 오후 1시 55분 상스에서 파리로 가는 국도 7번.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빌블르뱅 마을 어귀, 친구 미셸 갈리마르가 운전하던 차는 가로수를 들이받고 카뮈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가족과 함께 파리로 돌아가려고 기차표까지 끊어 주머니에 넣어놓았으면서 이 무슨 운명의 짖궂은 장난일까!)
(382)작가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지 않았더라면 작품은 실제로 지금 여기 펴낸 책보다 분량이 훨씬 많아졌을 것이며 구성과 문체 및 내용 역시 여러 모로 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펴내는 <최초의 인간>은 우리가 끝내 읽을 수 없게 된 어떤 소설의 밑그림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더군다나  독자가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글 속에는 온갖 자전적인 내용이 전혀 여과되지 않은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카뮈의 예술적 태도를 조금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작가 자신이 결코 이대로는 출판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34년 동안이나 출판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카뮈의 딸은 문학교사 출신으로 아버지 작품들을 정리하고 출판했다. 카뮈 사망 직후 <최초의 인간>은 출판해서는 안될 책이었으나 사후 30년, 그의 책은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그는 프랑스 좌파지식인들의 공격대상이었다.)
(386)<최초의 인간>이 서점에 나온 첫 주일 동안에 초판 5만부가 매진되었다. 4월 22일자 르몽드에 의하면 벌써 16개의 외국 출판사와 번역 출판 계약이 맺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완성된 작품도 아닌 이 미완의 '밑그림'이 다른 모든 신간들을 제치고 무려 6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최상위의 자리를 지켰다. 길거리와 지하철 안에서 '최초의 인간'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치면서 카뮈가 30여 년만에 다시 그 빛나는 얼굴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391)1959년 5월, 지금까지 서투른 형식으로 썼던 모든 작품들을 전혀 새로운 형식과 격조와 방대한 서사적 구조로 '다시 쓰는'  기나긴 '우회'의 행로에 오른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이 작품이야말로 카뮈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승부요  그의 모든 역량의 대집성(->'집대성'의 오자/출판사 정정 사항)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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