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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맑은 바람 2021. 11. 1. 23:34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건축계의 거장이자 한계에 도전하는 게릴라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첫 자서전)
안도 다다오 지음/이규원 옮김/안그라픽스/420쪽/2009년11월 초판/2010년4월5쇄/읽은 때 20211028~1101

안도 다다오:(1941~  )효고현 출생. 오사카 아사히 시타마치에서 성장. 건축가. 프로복서를 거쳐 세계각국을 여행한 후

독학으로 건축을 배워 1969년 <안도다다오건축연구소>를 설립.
미국 예일대, 하버드대, 컬럼비아대학 객원교수를 거쳐 1997년 도쿄대학 교수.

1969년 일본건축학회상, 2002년 미국건축가협회 대상 등 각종 건축상 수상

 


[서장] 게릴라의 활동 거점:오사카
(19-22)나의 조직관:우리는 공통된 이상을 내걸고 신념과 책임감을 가진 개인들이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게릴라 집단'이다. 조국의 자립과 인간의 자유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어디까지나 개인을 주체로 기성사회와 투쟁하는 삶을 선택한 체 게바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중간관리직을 없애고 보스와 스태프, 1:1의 단순관계--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스테프(제작진) 사이에 인식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보를 얼마나 정확히 전달하고 공유하느냐 하는 소통의 문제가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은 모든 일을 단순 명쾌하게 처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모호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이것이 내 천성인지도 모른다.(성공하는 사람들의 필수 요건 아닐까?)
긴장감이 없으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언젠가는 독립하여 자기 사무소를 차릴 스테프의 경력을 생각하더라도 내 사무소에서 얼마나 진지하고 현장감있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그의 경험은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늘 엄격한 자세로 스태프를 대했다. 그것이 '공포감으로 교육하다'의 참뜻이기도 하다.
사무소를 열고 몇 년 동안은 나와 스태프의 나이 차이도 열 살 정도에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이라 여차하면 손발이 먼저 튀어 나가기도 했다.(권투선수 출신이라~)
(25)20년째로 접어들자 스태프도 서서히 늘어나 25명 정도로 자리를 잡아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오히려 이보다 많으면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최대 인원수가 이 정도이다. 평균 연령은 서른 살 정도.내내 함께 일해온 고참 스태프 몇 명을 제외하면 대체로 5년에서 10년 주기로 교체되어 왔다.

1.건축가를 꿈꾸기까지
(외가댁에서 어머니의 성을 따라 안도가 된 후 그곳에서 외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40)집에서 숙제라도 할라치면 외할머니는 "공부는 학교에서 해라"하며 꾸짖으실 정도였다. 그래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약 9년 동안을 말 그대로 공부와 담 쌓고 놀기만 했다. 그러니 등수는 항상 꼴찌에서 헤아리는 것이 빨랐다.
(41)나는 성미가 급하고 툭하면 주먹질을 해서 동네에서는 '안도네 왈패'라 불렸다.
학교 교육에는 통 무심한 외할머니였지만 기본적인 예절에는 엄격했다.

"약속을 지켜라. 시간을 지켜라. 거짓말하지 마라. 변명하지 마라."
오사카 상인답게 자유로운 기풍을 좋아한 외할머니는 어린아이에게도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고 자기책임 아래 행동하는 독립심을 요구했다.
(다다오의 학교는 동네 목공소, 거기서 놀면서 기술도 익혔다)
(45)목공소의 목수는 "나무에도 성격이 있단다. 좋은 것이 더 잘 드러나도록 다뤄줘야 해."하며 10년을 하루같이 나무를 깎는다. 물건 만들기는 끈기가 필요한 일이고 물건에 생명을 주는 귀한 일이며 물건을 접하며 살아가는 충실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고교시절, 권투로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지만 프로권투 선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신감을 잃고 권투를 그만두었다. 공업학교를 나와 최초로 한 일은 15평짜리 바의 인테리어를 설계하는 일로, 무난히 끝내고 돈도 벌었다)

2.여행 그리고 독학
(55)독학이라고 하면 자유롭고 느긋하게 공부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뿐더러 뭔가 의문이 생겨도 의견을 나눌 급우도 없고 이끌어줄 선배나 교사도 없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를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55)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을 어떻게 배울것인가 하는 점부터 혼자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은 대학에 찾아가 건축학과 강의를 허락도 없이 들어보기도 했지만, 한두 시간 강의로는 내가 알고 싶어하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건축학과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잔뜩 사다가 1년 안에 독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도 점심시간에 빵을 씹으며 책을 읽었고, 밤에는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엉성하게나마 목표를 달성했다. 솔직히 말하면 책의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왜 그런 것이 필요한지 알 수 없는 부분도 많았지만, 대학의 건축교육이 어떤 체계인지는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56-57)르 코르뷔지에 작품집을 만난 것은 그렇게 장님 더듬 듯 독학하는 날들이 계속되던 스무살 시절이었다. 오사카 도톰보리에 있는 헌책방에서 현대건축 책에 종종 등장하는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이 적힌 책을 발견했다. 별 생각없이 집어 들었는데,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다가 이내 '이거다'하고 직감했다. 사진과 스케치, 드로잉, 프랑스어 본문이 책 판형에 어울리게끔 아름답게 구성된 레이아웃에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돈이 없어 바로 살 수가 없어서 몰래 숨겨놓았다가 거의 한 달 가까이 됐을 때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르 코르뷔지에도 독학으로 일가견을 이룬 사람이었다.
(꼭 읽고싶은 책으로 최근에 구입한 르 코르뷔지에(시공사)가 있다. 이 글을 보니 빨리 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58)일본 근대건축의 영웅 단게 겐조의 건축물을 보러 일본 일주에 나섰다:그 감동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시라카와쿠니, 전통가옥 거리 히다 다카야마 같은 토착 민가에 강하게 끌렸다. 사람들의 생활이 공간으로 결실을 맺고, 그 공간이 자연과 하나를 이루며 단단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61)생애 최초로 해외여행길에 오르다:1964년 요코하마 항-->나홋카-->시베리아 철도로 모스크바-->핀란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을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남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화객선 MM라인을 타고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거쳐 마다가스카르, 인도, 필리핀을 경유하여 귀국했다. 가지고 떠난 돈은 60만 엔, 7개월 남짓의 여정이었다.
(65)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건축물과의 만남:
*푸아시 언덕의 사보아 주택
*롱샹 성당
*라 투레트 수도원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68)유럽을 돌아보고 오겠다는 결심을 말하자 외할머니는 "돈은 쌓아두는 게 아니다. 제 몸을 위해 잘 써야 가치 있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며 흔쾌히 보내주셨다. 이후 내 사무소를 개설할 때까지 4년 동안 돈만 모이면 여행을 떠나 세계를 돌아다녔다. 외할머니 말씀대로 20대 시절의 여행 기억은 내 인생에 둘도 없는 재산이 되었다.
(나는 바로 직전 영국의 60년대 패션스타 '메리 퀀트'의 삶을 보고, 일본으로 건너와 다다오를 만나고 있다.

4.19와 5.16을 겪으며 10대를 보낸 나의 60년대-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71)60년대 시대 정신:
'남 흉내는 내지 마라!  새로운 걸 해라!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라!'
(73)1960년대 말에 나는 오사카의 우메다에 작은 사무소를 열었다, 그리고 건축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사회의 불합리에 저항해 나가는 내나름의 투쟁을 시작했다.

3.건축의 원점.주택
(76)데뷔작 스미요시 나가야:(1974년, 할머니랑 45년간 살던 집을 고쳐 세간에 화제를 모았다)

1.사방이 벽으로, 출입구 말고는 개구부가 전혀 없다.
2.벽과 천장 안팎을 전부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3.안 그래도 작은 박스(폭 3.6m, 깊이14.4m)를 3등분하여 그 한가운데를 지붕없는 중정으로 만들었다
**나가야--도시민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3~12평쯤 되는 세대가 판자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는 공동주택
(83)건축에도 미국 열풍:모던 리빙 이미지 역시  미국의 산물이다.
비좁은 일본 땅에서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다. 조금 더 제 덩치에 어울리는 생활, 좁으면 좁은 대로 이 땅에 어울리는 풍요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나로서는 모두가 동경하는 하얗고 밝은 교외형 주택이 겉치례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88)주거란 무엇인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생활/제한된 대지이기 때문에 냉혹함과 따뜻함을 두루 가진 자연의 변화를 최대한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최우선시하고 무난한 편리함을 희생시켰다. 
(106)내가 지향해 온 것:'스미요시 나가야'가 상징하듯 내가 지향해 온 것은 금욕적이고 강인하게 사는 사람을 위한 집, 말하자면 수도원 같은 집이었다.
(내부 공간은 멋있는데 외부의 인상은 아무리 우호적으로 보고싶어도 호감이 가지 않는다. 나는 그의 건축주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13)초심을 잃지 않는 다다오:소주택 설계로 도시에 도전했던 내가 지금은 국내외 공공건축을 주요 업무로 하고 있다. 작은 사무소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업무량은 많은 데다 내용, 질, 균형 잡힌 경영을 유지하며 위태롭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맡고있는 업무가 궤도에 오르고 사무소가 안정되면 서서히 업무 규모를 줄여서 나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어쨌든 나의 마지막 작업은 주택이어야 한다고. 이것만은 굳게 다짐하고 있다.

4.도시에 도전하는 건축
(118)도시에 저항하는 게릴라:오모테산도힐즈와 스미요시 나가야는 규모의 차이, 오사카 작은 마을에 위치한 주택과 도쿄 중심가에 위치한 복합 재개발 빌딩, 30년 전과 후 라는 차이가 있지만 둘은 모두 내부의 공백을 지향하는, 말하자면 내향적 공간 구성을 취한 것은 이런 도시에 대한 방어태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22)도시를 바라보는 눈길:
세계의 대표적 도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도시에 흐르는 '풍성한 시간'이다.
예를 들면 파리나 빈의 중심가에서는 1세기 이상 묵은 건물이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되고 있고, 그 안에서 현대 아티스트의 전위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혼연일체로 겹쳐지는 그 정경에 매우 신선한 감동을 느꼈다.
(127)상업건축 데뷔작:고베 기타노마치에 위치한 로즈가든(1977)
-2개 동 사이에 있는 여백의 공간. 그 뻥 뚫린 외부 공간에 회랑을 두르고 계단으로 연결하여 점포가 줄지어선 '길'이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31)오키나와의 훼스티벌:

1984년 완성/내부광장을 잉태한 박스 건축/외벽에 오키나와 특유의 구멍뚫린 블록을 이용하여 자연광과 바람을 전체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공간이 폐쇄되지 않도록 했다. 그 '빛과 바람의 우물'을 쌓아 올린 다음 최상층은 지붕이 없는 오픈 코트로 했다. 오키나와 창공 아래 바냔나무 그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하늘 높이들어 올린 이 광장이 'FESTIVAL' 건축의 주제였다.

(136)잃어버린 도시 수변 공간을 되찾다:교토 다카세 강 주변의 'TIMES'-기대 이상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덕분에 건물은 상업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5.왜 콘크리트인가
(168-180)철근 콘크리트는 시멘트, 물, 자갈, 철근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유로운 꼴을 빚을 수 있는 현대를 상징하는 건축 공법이다. 약 100년 전에 실용화되어 20세기 근대건축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일본에서도 화제를 막기 위하여 관동대지진 이후 도입되기 시작하여 종전 후 공공건축과 집합주택을 중심으로 단숨에 보급되었다./콘크리트는 건축가의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다./그래서 나는 재료를 콘크리트로 좁히고 구성도 기하학적 형태를 고수한다는 단순한 틀을 정해놓고 그 틀 속에서 복잡 다양하고 풍부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매끄러운 촉감을 내려면 콘크리트 내 수분을 늘려 유동성을 높이면 된다./과제는 명확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당연함이 어렵다./콘크리트의 성패는 건축가와 현장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굳건하냐에 달려있다/콘크리트는 매 한 번 한 번이 진검승부여서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방심할 수가 없다./콘크리트는 존재 자체가 환경 파괴이며 이 점에서도 가장 책임이 큰 현행 제도나 기존의 기술적 제약을 극복하지 못하고 홀로 시대에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다./이미 연구 개발 차원에서는 몇 가지 방향성이 제시되고있다. 예를 들면 전체 산업폐기물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콘크리트 폐자재를 재이용하는 리사이클 콘크리트의 실용화 등이다.

6절벽의 건축, 한계를 향한 도전
(184)현대판 가케즈쿠리:
돗토리현 미사사초 미토쿠산 중허리에 있는, 가케즈쿠리 양식의 산부쓰지 나게이레도(불당)
*가케즈쿠리-평편한 땅이 아니라 절벽에 짓는 건축 양식
왜 이런 자리에 지어야 했을까
아마도 자연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애니미즘, 이른바 산악신앙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것이다./한편 어쩌면 그런 위태로운 자리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건물을 지은 원점에는 역시 인간의 순수한 도전 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1983년에 지은 록코 집합주택은 '현대판 가케즈쿠리'로 평가 받고 있다.
(바로 그 옆에 들어선 '록코 집합주택2'는, 행정관청과 협의를 이끌어내는 데 5년, 시공사를 선정하고 공사를 마치는 데 5년, 도합 10년이 걸렸다. 안도의 끈기와 인내와 의지의 결정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계속이라는 힘이 건축을 키운다
(226)일몰 폐관: 인공조명을 설비하지 않고 자연광만 이용하는 미술관 오다히로키뮤지엄.

블루메언덕미술관(시가현 농업공원 안 1990년 말 조성)

(229)건물은 농업공원의 풍부한 녹음에 둘러싸인 연못가에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자리잡았다. 연못을 바라보는 유리 회랑 배후에 배치된 전시실은 벽을 따라 뚫린 톱라이트(위로부터 비치는 빛, 천창채광)의 빛이 유일한 채광이다. 계절이나 시간에 따라 빛이 변하며, 그에 따라 공간과 작품도 표정을 바꾼다. 자연스럽게 숨쉬는 이 미술관은 일몰시간이 곧 폐관 시간이다.(나도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자연 채광에 의존한 그런 집을 짓고 싶은데--겨울이 길고 비가 많아서 어려울려나~)
(235)문화로 섬을 살리다
가가와현의 작은 섬 나오시마:
<문제점>
열악한  접근성/금속제련산업의 영향으로 자연이 심하게  황폐해짐/인구 과소화
<지향>
예술과 자연이 한 덩어리가 되는  장소로 만들자/인구 감소를 억제시킬 수 있도록 문화의 섬으로 만들자
<건축작품>
1.베네세하우스뮤지엄(1992년 완성)-숙박시설을 곁들인 체류형 미술관/잔디광장--잔교 위--모래사장도 전시공간/자연을 향해 활짝 열린 미술관
2.오발Oval(1995년 완공)-물의 정원이 있는 숙박동
(241)치추미술관(나오시마, 2004년 완성)

땅 속 미술관-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월터 드 마리아를 위한 공간?
연간 20만의 관광객이 나오시마를 찾는다.
(252)도쿄대학 정보학환 후쿠다케 홀:후쿠다케 씨의 건축비 전액 기부와 나의 무보수 설계로 이루어진 노출 콘크리트 건물 **후쿠다케-베네세 코포레이션 사장/그와 함께 나오시마 일련의 프로젝트를 달성했다.

8.오사카가 키운 건축가
**(유명한 건축가와 후원자)
미켈란젤로--메디치 가
가우디-구엘 백작
르 코르뷔지에-앙드레 말로

(271)사업 초기의 무모한 도전:
*빌딩 옥상에 공중정원 짓기
*공중 정원에 미술관이나 도서관짓기
무모한 도전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없이 끝난다 해도 공을 멀리 던져 놓고 쫓아가야 내가 나갈 길은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278-279)관서지방 경제계 지도자들과의 만남:
*교세라의 이나모리씨--가고시마대학 이나모리회관에 어번 에그와 동일한 홀 건축을 부탁
*산요전기 이우에씨--아와지 섬 진언종 혼푸쿠지의 불당 설계자로 추천
*아사히맥주 히구치씨--<오야마자키산장미술관>의 설계자로 기용
*산토리의 사지씨--<산토리뮤지엄 덴보잔>을 지을  수 있게 함

"좌우지간 인생은 재미있어야 해.

업무에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일하면서 살아가게.

감동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어"--사지 씨
그러면서 사무엘 울만의 '청춘'을 읊어 주었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철이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말하느니--'
(281)그들은 모두 오사카인 특유의 자유로운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여 주고 기회를 주었다. 관서지방이라는 풍토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오늘까지 건축 활동을 계속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오사카가 키워 준 건축가이다. 그렇게 큰 은혜를 베푼 오사카를 위해 이제는 내가 진력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9.글로벌리즘 시대로
(286)이글거리는 땅에 도전하다

*아부다비해양박물관:사디야트 섬에 위치/돛을 부풀리는 바닷바람을 내부의 빈공간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한 것/내가 지향한 것은 아라비아 백성의 역사를 품어온 웅대한 바다풍경을 곁으로 끌어당기는 일종의 기계장치와 같은

*바레인유적박물관:기원전 3000년부터 청동기까지 조성된 사르고분군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만들어지는 역사박물관이다. 바레인 전역에서 발견되는 고분군은 8만5000 전후라고 하며 선사시대 고분군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아랍에서 석유 채굴에 처음으로 성공한 나라로 알려진 바레인은 조만간 도래한 석유자원의 고갈에 대비하여 일찌감치 방향 전환을 꾀하여 20여 년이란 단기간에 현대적인 국가로 급성장을 이뤘다. 바레인이 그 다음으로 힘을 쏟는 분야가 독자적인 역사를 자원으로 하는 '관광'이다.
(288)기본구조부터 외벽의 패턴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반복되는 삼각형 모티브는 어떻게 하면 황량한 풍경에 매몰되지 않고 태곳적 묘비인 어스 아트Earth  Art에 부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자연스레 떠올린 것이다.


10.어린이를 위한 건축
11환경의 세기를 향해

달걀형 역사/지하 2층 콘코스에서 지하5층의 홈까지를 관통하는 타원형 공간이 뚫려 있어 자연환기가 가능하다.(콘코스--홀을 겸한 넓은 통로)

(340)오래된 것을 쓰레기로 간주하는 소비주의에서 벗어나 지금 쓰고 있는 것을 살려서 과거를 미래로 연결해야 한다

12.일본인의 정신
(361)고베 대지진 후 혼자 '복구 하우징프로젝트' 구상
'효고 그린 네트워크 운동':
타계한 사람들을 진혼하는 심정을 담아 하얀 꽃을 피우는 백목련, 목련, 층층나무를 주민 스스로 피해 지역에 심자는 운동
'아와지유메부타이 프로젝트'고베지진 진원지 바로 옆에 위치

*진언종 혼푸쿠지 미즈미도 법당: 내가 처음 설계한 사원 건축/1991년 지음/지면에 물을 채운 대형 쟁반(연꽃 연못), 즉 수반을 만들고 그 밑에 건물을 매립하는 구조/오사카만이 한눈에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지음

(370)전통적인 목조사원을 재건축한 '난가쿠잔고묘지'도 재료는 전부 집성재(단면이 좁은 나뭇조각을 서로 평행하게 접착시켜 가열하여 압축한 목재)였고 지붕은 평지붕, 디테일 공법에서도 공포같은 장식적 요소나 전통적 모티브를 일체 인용하지 않은 어디까지나 현대감성에 충실한 건축이다.
(376)전통이란 눈에 보이는 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꼴을 지탱하는 정신이다. 나는 그 정신을 건져 올려 현대에 살리는 것이 참된 의미의 전통 계승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건축을 하고 있다.
(378)세계 최대 고분:오사카 미나미가와치에 위치한 닌토쿠천황릉/전방후원분/480m길이/이집트 피라미드를 능가함
(383)자연을 사랑하는 섬세하고 우아하고 고운 감성이 있는 한편, 자연에 의지하면서도 웅대하고 대담한 세계를 개척하는 창조력, 상반된 감성이 동거하고 길항하는 웅숭깊음에서 나는 일본 문화의 개성과 풍요를 느끼는 것이다.
*길항하다--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들다
*웅숭깊다--매우 깊고 넓다
(386)아와지유메부타이 프로젝트:
고베 지진 부흥 프로젝트/50만 그루의 묘목을 심음/2000년 완공
(388)자연에 의거한 독자적인 문화 토양 아래 유사시 놀라운 완력을 발휘하는 강인한 마음, 자연마저 재생시키는 웅대한 구상력. 그것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일본인의뛰어난 개성이다.

[종장] 빛과 그늘
(392)시타마치카라자 프로젝트:가라 주로(극단 붉은텐트의 운영자)의 이동극장/스미타 강변 공터/ 첫작품은 '정처 없는 제니'/ 절찬리에 상연,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시타마치--상공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이 사는 동네/서민 동네
(404)실현하지 못한 프로젝트에 관해:
현실사회에서 자기 이상을 진지하게 추구하려고 하면 반드시 사회에 충돌하게 되어 있다. 십중팔구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며 연전연패의 날들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래도 계속 도전하는 것이 건축가의 삶이다.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계속 달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환한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가능성을 믿는 강인한 마음과 인내력이야말로 건축가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이다.
(406-407)빛의 교회:1989년 5월 완공/홋카이도 토마무 소재/극한의 저비용 건축/건축가에게 단순한 기능성을 뛰어넘어 정신성을 표현해 주기를 기대하는 교회 건축 설계는 나의 사상 자체를 시험하는 지극히 중대한 도전이었다./폭과 높이가 모두 6m, 깊이가 18m인 콘크리트 박스에 벽하나를 어슷하게 꽂아 넣듯이 배치한 구성이다. 내부 바닥은 뒤쪽에서 제단이 있는 앞쪽을 향해 계단형태로 내리막을 이룬다. 출입구 등 주요 개구부는 박스와 벽이 교차하는 곳에 모아 두고 실내에 들어오는 빛은 의도적으로 억제한다.그 어둑한 공간에서 정면 벽에 뚫어 놓은 십자형 창으로 빛의 십자가가 부각되도록 하는 설계였다.
냉난방도 없고 벽과 천장이 모두 노출 콘크리트인 교회 안에는 설교단과 장의자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저렴하고 거친 질감이 있는 재료가 좋을 듯해서 공사 현장의 비계에 쓰는 삼나무 판자를 선택했다.

(417-419)빛과 그늘
독학으로 건축가가 되었다는 나의 이력을 듣고 화려한 성공 스토리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아무런 뒷배도 없고 혼자 건축가로 일했으니 순풍에 돛단배처럼 살아왔을 리가 없다. 여하튼 매사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뭔가를 시작해도 대개는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애오라지 그늘 속을 걷고, 하나를 거머쥐면 이내 다음 목표를 향해 걷기 시작하고, 그렇게 작은 희망의 빛을 이어나가며 필사적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늘 역경 속에 있었고 그 역경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활로를 찾아내 왔다. 그러므로 가령 나의 이력서에서 뭔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 남으려고 분투하는 타고난 완강함일 것이다.
자기 삶에서 '빛'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눈앞에 있는 힘겨운 현실이라는 '그늘'을 제대로 직시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용기있게 전진할 일이다.

혜화동에 있는 안도 다다오의 재능교육 건물(JCC아트센터)
안도 다다오의 JCC 크리에이티브센터(재능교육 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