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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완성한 여자 메리 퀀트

맑은 바람 2021. 10. 28. 12:22

표지

메리 퀀드 지음/노지양 옮김/책읽는수요일/초판1쇄 2012.7/331쪽/읽은때 2021.10.21~10.28

메리 퀀트(1934~   )런던 블랙히스 출생/골드스미스예술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전공/1958년 런던의 킹스로드에  첫번째  샵 '바자Bazaar'를 열어 고지식한 회색의 거리를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패션의 메카로 바꿔놓았다./미니스커트와 핫팬츠를 선보여 열풍을 일으킴/거리의 패션으로 런웨이를 점령, 패션계의 비틀즈로 일컬어짐
/지금(2012년 현재)도 패션, 메이크업, 인테리어 분야에 왕성한 활동을 하며 많은 상을 수상했다./1966년 비틀즈와 함께 대영제국 훈장을 받음/1969년 왕립 디자이너로 선정됨/2012년 타임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아이콘 100인'에 선정됨

데이지꽃 모양의 메리 퀀트 로고
잉글리시데이지 꽃말: 순진, 평화

#1  짧게 더 짧게
(13)처음 만난 파리(1953):음식은 더 맛있었고 생활은 더 멋있었다/모든 프랑스 남자들이 지성이 넘쳐보였다. 또한 그들은 모두 타고난 춤꾼이었다./어딜 가나 배경음악으로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노래가 흘렀다./흑인 재즈음악가들은 파리에서 엘리트 대접을 받았다/나는 그만 이 경이로운 도시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내 자신이 화가 날 정도로 정신을 못차리고 매료되었다.
(15)영국의 안개:
안개가 모든 것을 삼켰다. 영국의 짙은 안개에서는 냄새가 났다. 안개는 색깔이 있었다. 안개는 10월에 시작되었고 3월까지 이어졌다.
(19)패션에서도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 보인다. 난 그때부터 특히 다리만 집중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 발레하던 언니들의 모습이 모든 점에서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작은 소망이 꿈틀댔다.  내 옷을 만들고 싶다.  내가  정말 하고픈 것은 두 가지였다. 옷을 디자인하고 탭 댄스를 추는 것.
(22)골드스미스 예술학교:골드스미스에서  패션이란 젊은 사람들이 자기 옷을 직접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직 나 자신과 내 친구들을 위한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우리가 우리의 시장이었다.
(23)우리는 모두 피카소의 열렬한 팬이었다. 프랑스 영화를 사랑했고 재즈의 고전 '리버보트 셔플즈'를 좋아했고 싸구려 프랑스 음식과 파리를 동경했으며 미국에 가고싶어 난리였다. 우리는 전통 재즈와 뉴올리언스 재즈를 들으며 저녁을 먹었고 모던 재즈와 록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새로운 춤을 추었고 새로운 옷을 입었고 새롭게 살았다.
(26)의복에 대한 영국인의 생각:
기본적으로 영국에서는 신상품, 새로운 디자인은 그렇게까지 큰 찬사를 얻지 못하는 나라였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가구가 없어 새 가구를 사는 졸부들처럼, 물려받아 입지 않고 새 옷을 사 입는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여겼다.
---영국에선 스타일이 없어야 나쁘지 않은 평판을 얻는다.
그러니 많은 영국 여성들이 해군부대에 지원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나마 해군에라도 가면 멋지고 세련된 제복을 입을 수 있으니까. 영국사람들이 제복하나는 근사하게 잘 뽑을 줄 안다.
(29)(모자가게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직접 모자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연인 앨리그젠더네 집에서 동거하던 그들은 집안에서 보석을 발견하고 부자가 된다. 그리고 튀는 복장으로 호텔로 들어가 자축파티를 했다. 이들 관련 영화가 있다면  한번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34)첼시와 킹스로드:50년대만 해도 소박한 변두리 동네였다. 다소 허름하고 집값이 싸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들던 동네로, 런던의 다른 지역보다 파리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36)가게를 내다:마컴광장 한켠에 <바자>라는 상호로 가게를 내다.
앨리그잰더가 바자의 광고지와 쇼핑백 디자인을 했다. 가게 이름을 쇼핑백 전면에 부각되도록 크게 찍은 건 우리가 최초였다. 적어도 런던에서는 이런 시도를 한 가게가 없었다. 이 쇼핑백을 든 고객들은 걸어다니는 광고판이 되었다.
(38)미니스커트의 등장:1955년 킹스로드에 개장한 <바자>는 시작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앨리그잰더는 힙스터 팬츠를 즐겨 입었고 입을 때마다 반응이 좋았다. 스커트도 힙스터 스타일로 더 짧고 더 딱붙게 만들었다. 영국에서 우리는 그것을 '미니스커트'라고 불렀다.
(42)<바자>의 인기 상품들:
애셔의 스카프, 모던한 주얼리, 프랑스 저지옷들, 내가 디자인한 모자, 벨트, 가죽제품, 남성의 긴 카디건, 오키프의 아일랜드 트위드 옷 등의 조합이 큰 관심을 이끌어낸 것 같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까지 사려고 한 최고 인기상품은 흰색의 라운드 피터팬 칼라가 붙은 원피스였다.

피터팬 칼라

다른 인기상품은 폴카닷 친츠로 만든 니커보커스와 해리스 트위드로 만든 달라붙는 니트 튜닉이다.
특히 이 상품들은 미국에서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보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혁명을 일으키는 두 연인이 참으로 흥미롭고 멋지다. 런던을 가보고 싶은 생각이 부쩍 든다.)
(67)팬티스타킹의 시대를 열다:
(73)국제 패션상 수상:1964년 '선데이타임즈' 국제 패션 상 수상.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전에 이 상을 수상한 샤넬은 내가 보기 싫어서 행사장을 몰래 빠져나갔다고 한다. 난 언제나 그녀의 팬이었는데도 말이다.
(80)메리 퀀트 코스메틱스 :1966년 출시/18개월 동안 연구한 끝에 메이크업 제품 출시/이 시절은 내 인생에서 황금기이기도 했고 사업가로서 100%의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도 되었다./이어 방수 마스카라도 개발, 성공함/일본에서는 계속 우리 제품이 생산되고 팔렸으며 지금까지도 200개의 매장이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2  나만의 것으로 새롭게
(105)로큰롤 정신을 옷에 입혀라
미국 메리 퀀트 컬렉션 쇼:1962년에 큰 성공을 거둠/28개의 여행가방을 가지고 다니면서 하루에 도시 하나꼴로 드레스 쇼를 열고 미국 전역을 춤추며 돌아다니면서, 팝그룹, 일곱 명의 모델, 앨리그잰더, 내 비서, 나는 모두 놀랄 만큼 재미있었고 또 엄청나게 지치기도 했다./그런데도 일에 미친 나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임신을 하자 일을 그만두었다
(111)돌아보면  J.C.페니라는 거대기업에서 디자인을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이 최고의 미국 의류 회사가 나처럼 어린 디자이너에게(당시 20대 후반) 디자인을 해달라고 했을 때 내가 "그래요. 하죠, 뭐. 내가 뭘 하면 되죠?"라고 응했다는 것도  놀랍다. 그렇다. 젊다는 것은 그렇게 겁먹지 않고 "그렇게 하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했다. 이런 자세로 패션뿐만 아니라 메이크 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그렇게 유럽으로 시장을 넓혔고 일본까지 진출했다.
(116)이름이 중요하다:앨리그잰더는 아주 쉽게 근사하거나 재미 넘치는 이름들을 지어내곤 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파운데이션 이름인 스태커스이다. 그리고 방수 마스카라 이름은 크라이 베이비, 브래지어 이름은 부비 트랩이었고 스타킹은 베이컨 세이버라고 지었다. 앨리그잰더는 영리하고 타고난  마케터로,우리 메리 퀀트 성공의 일등공신이다.
(124) 세계에서 가장 멋진 아지트:프로방스의 '라 콜롱브 도르'(황금비둘기)호텔/첫눈에 사랑에 빠졌다/식당 안에는 피카소, 브라크, 미로의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작품이 몇 점 걸려 있다./그곳은 내게 두 번째 집이나 마찬가지였다./그곳에 모인 사람들 또한 최고였다/시몬 시뇨레(이브 몽탕의 아내, 여기서 결혼식을 올림)가 자서전을 쓰느라 그곳에 묵었는데, 저녁에는 마티스 벽화앞의 계산대에 팔꿈치를 괴고 무언가를 열심히 썼다. 그녀는 마치 그 역할을 위해 디자인된 것처럼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이브 몽탕은 호텔 야외광장에서 불레 게임을 하면서 그 마을 여자들과 염문을 일으켰다. 피카소의 전 아내인 존 미로도 있었고, 그레이엄 그린, 제임스 볼드원(미국 소설가), 프랑수아 트뤼포(프랑스 영화감독,배우, 평론가), 카트린 드뇌브가 단골이었고 나중에는 스팅도 자주 들렀다. 조로시와 마르크 샤갈이 데이빗 니벤과 앉아서 위트있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그곳에서의 작업과 생활은 완벽했다./몇 년 후에는 아들 올란도와도 자주 갔다--아마 올란도는 일이라는 건 어른들이 앉아서 와인이나 마시거나 향수 냄새를 맡거나 메이크업 제품 테스트를 하는 것, 아니면 옷을 입어보고 아무 데도  안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주 3일의 공장 가동으로 타격을 입긴 했지만 라 콜롱브  도르는 천국의 다락방이 되어 주어서 이 모든 변화와 불운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다/이제 이 호텔은 링고 스타(비틀즈 멤버)가 단골이 되었는데, 그 또한 내가 좋아한 파르메산 치즈가 잔뜩 뿌려진 스크램블 에그를 먹는다고 한다.
(130)스페셜 레시피스:두 번째 출시한 메리퀀트 메이크업 브랜드/자연 재료로만 만든 메이크업 제품/꽃의 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노스텔지어를 살리고 고전적이고 로맨틱한 포장으로 마무리함
(책도 사람과 같다. 첫눈에 반해 그냥 빠져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별로인데 갈수록 숨은 매력이 드러나 호감이 생기는 책이 있고, 꽤 유명세를 타고 있어 반은 접고 들어갔건만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친해지지 않는 책이 있다.
메리 퀀트는 두 번째 유형이다.)
*튜닉 드레스--엉덩이나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웃옷에 폭이 좁은 스커트가 이어진 이중 드레스.
*골지 스웨터--슬림한 몸매와 볼륨감 있는 라인을 강조한 스웨터
(142)가장 예쁜 칼라:피터 팬 칼라/이제까지 디자인된 것 중에서 가장 예쁜 칼라/메리 퀀트 칼라라 불림
*피터 팬 칼라--작고 끝이 둥근 플랫 칼라로, 어린이 옷에 이용되기시작하여 후에 여성복에도 사용되었다.
(144)보트 넥은 언제나 예쁘다.
치맛단이 둥근 랩 스커트는 언제나 멋지지만 액세서리를 잘 착용해야 어려 보인다.
*보트 넥--배의 바닥 모양처럼 옆으로 넓고 앞뒤는 얕게 판 옷의 목둘레선.
*랩 스커트--한 장의 천으로 되어 몸에 감아서 입는 스커트
(146)데이지 인형의 출현:미국엔 신디 인형, 영국엔 데이지 인형이 등장했다./고급 여성복 컬렉션 의상을 입음/데이지 인형이 큰 인기를 얻고 잘 팔리자 경쟁자를 만들었다. 그 인형의 드레스 코드는 검정이다. 인형 이름은 하복Havoc이다.
(150)패션 디자이너에서 카펫 디자이너로:트위드 패턴으로 카펫을 만들어서 대성공을 거둠
*트위드 패턴--
(158-162)색에 대한 생각:
나는 한 가지 색에 다른 색을 입히는 걸 좋아하고 서로 다른 표면과 질감을 가진 색상들이 어우러져 내는 결과를 좋아한다./색은 언제나 다른 질감과 다른 색에 의존하고 또 주변의 빛이 색에 더해지면서 다양한 효과를 얻는다/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이 당최 이해가 안 간다.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세요?"/색은 마치 음식과 같다. 절대 멀리할 수가 없다. 패션에서 색조합의 변화는 요리에 들어가는 칠리,커민,파르메산,마늘처럼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입맛을 돋운다.

#3 홀로 그리고 함께
(173)셀러브리티를  끌어들이는 법
앨리그잰더의 레스토랑:첼시의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자리잡음/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어 왕자,  브리짓 바르도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자크 샤리에, 오드리 햅번도 종종 왔다.
(177)바람둥이 남편 길들이기
*e형 재규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래식 카
(메리 퀀트 내외가 세 대씩이나 갖고 즐긴 차이기도 하다)
(181)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였던 앨리그잰더는 그의 아버지처럼 워낙 여자를 좋아하고 바람기가 다분한 남자였다. 그 점이 우리 부부생활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일에 미쳐서 디자인만 했으니 나 또한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문제는 그가 이런 생활을  몸이 상할 때까지 즐겼다는 것이고, 건강이 나빠진 다음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84)존 레논과 친해지기
메리퀀트의 유명해진 말:"나는 앨리그잰더에게 음모를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 달라고 하는데요?"/비틀즈의 존 레논이 특히 이 대답을 좋아해 시도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양에 대한 아이디어를 보내주기도 했다. 존 레논은 우리 가게에서 검은색 가죽모자를 산 인연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200)튀는 여자:그날 따라 뉴욕에서는 택시운전사 파업이 있어서 눈을 씻고 찾아도 빈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 손에 스파클링 와인병을 든 나는 도로 가운데에 뛰어들어 외쳤다. "4시 30분까지 제 변호사에게 데려다 주면 이 고급 스파클링 와인 드릴게요."
놀란 운전자는 무슨 이혼이나 상속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었는지 아니면 내 히스테리에 질렸는지 총알처럼  달려 사무실에 데려다주었다.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202)내가  좋아하는 모델에 관하여:

모델들과 함께하는 메리 퀀트
모델 소피 달(1977~  )영국 182cm
스텔라 테넌트 (1970~2020)영국 180cm 샤넬의 대표 모델
케이트 모스(1974~  )영국런던 170cm 보그모델 /역사상 가장 성공한 모델/키가 작은 편이지만 얼굴의 골격과 몸의 골격이 조화로움
릴리 콜(1987~ )영국 캠브리지 졸업 179cm 인형 같은 얼굴/골격이 강하고 건강함
진 슈림톤 --가장 아름다운 모델/본인은 자신의 이러한 절대적인 미모에 대해서 크게 자만하지도 않고 의식하지 않아서 더 매력적이다.

(213)비달 사순과 나눈 최고의 우정:본드 스트리트의 "비달 사순" (1954년 26세에 오픈)

비달 사순(1928~2012)영국, 부모가 유대인/헤어 디자이너, 기업인
메리 퀀트의 화이브 포인트 컷, 소위 말하는 '바가지머리'

그 미용실은 한 명만  간신히 탈 수 있는, 아니 음식만 거의 배달할 수 있을 정도의 흔들흔들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2층에 있었다. 그는 대단했다. 머리를 자르고 매만지는 행동이 마치 별 네 개짜리 요리사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양해를 구한 다음, 앉아서 그를 그냥 구경했다. 아직 어리고 가난했던 나는 비달사순에게 머리를 자를 만한 돈이 없었고 그래서 언젠가 그런 돈을 꼭 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비달 사순은 내 머리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비달 사순 이전에는, 그저 머리를 자르고 다듬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비달 사순은 이것을 컷과 스타일로 만들었다.
그는, 마치, 건축가처럼,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써 인물과 머릿결을 돋보이게 하고 두상과 얼굴을 가장 잘 살리는 형태와 질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광대뼈와 눈을 강조하고 개인의 얼굴과 개성에 최대한 효과적이게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비달사순은 또 가장 유명한 '파이브 포인트 컷'이라는 스타일을 창조했다. 이는 눈,광대뼈,코,입,목 등 다섯 가지를 포인트로 잡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변주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미용계의 혁명을 일으켰다./그는 또한 매우 관대하게도 비달사순학교를 열어서 미용사들에게 자신의 미용 기술과 스타일을 전수하기도 했다./헤어 드라이어로 몇 시간씩  머리카락을 말리고, 두꺼운 롤러를 두피에 고정시키고, 그러면서 뜨거운 고대기로 머리를 말던 여성들에게 비달 사순은 시간을 돌려주고 간편함을 선물했다./비달 사순, 피임약,  미니스커트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비달 사순은 늘씬하고 미끈한 다리를 강조하는 내 미니스커트 디자인의 완벽한 모자가 되었고, 내가 만드는 색조 메이크업 제품의 틀을 제공했다.
(232)앨리그잰더 세상 뜨다:2000년에 죽었다. 2년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보드카와 와인을 포기하지 못했다(독자도 그의 매력에 빠져드는데 메리 퀀트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241)느껴지는 대로 보게 하는 천재들:
**다르시 뷔셀--20세기에 발레를 들여온 사람/그녀는 발레를 체조선수처럼하면서 건강한 여학생의 몸짓으로 만들었고,그러면서도 검은 표범처럼 우아했다.
**로저  페더러--신체 적성의 전성기에 경기를 할 때 어떤 느낌인지를 텔레비젼으로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로저 페더러(1981~ )스위스, 테니스선수 185cm

#4 같지만 다르게
(255)음악에는 비틀즈, 패션에는 메리 퀀트
영국 패션 업계 최초로 대영제국 훈장을 받음
(265)젊은 커리어우먼을 위한 향수:향수는 프랑스제 라는 고정 관념을 깨고  메리 퀀트는 AM, PM,  하복Havoc이라는 향수를 개발해 성공했다.
(270)같지만 다르게, 그리고 혁명적으로!
*크레이프 저지로 만든 노퍽 재킷-등과 가슴에 주름이 있고 허리벨트가 달린 재킷
*새틴이나 크러시트 벨벳 원단의 승마 바지 표면에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털이 촘촘히 돋게 짠 벨벳
*무아레 타프타나 실크 저지로 만든 덩거리 셔츠(튼튼한 면으로 된 작업복 셔츠)
*고무로 된 가터에 달린 트위드 가터 벨트 양말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힙이나 허리 주위에 두르는 10~20cm의 넓은 고무벨트로 아랫배를 가볍게 누르며 4~6개의 고무 가터garter가 부착되어 있다.
*모헤어로 만든 프렌치 블루머 모헤어:산양털로 만든직물/ 블루머:헐렁한 바지
*플라스틱으로 된 피터 팬 칼라
*검은색 새틴으로 된 크리켓 패드
모두 내가 만든 것들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물건으로 만들고 그 물건들을 어디서나 볼 때의 기쁨은, 마치 베이징이나 베로나 같은 도시의 바에 있는 주크박스에서 비틀즈의 '예스터테이'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말하자면 끝내주게 기분 좋다.

*주크박스-자동판매기의 일종으로 내부에 다수의 레코드가 내장되어 있어 동전을 넣으면 임의의 음악을 연주한다.
(277)세 여인(볼링거 부인-콜레트-샤넬)의 공통점:스파클링 와인 사랑
(278)리틀 블랙 드레스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영국 우표에 사용되기도 한 바나나 스플릿은 가장 성공한 드레스다./'보그'의 패션 디렉터인 그레이스 커딩턴이 그 옷의 모델이 됨/미국판 보그의 제작 과정을 담은 이색적인 다큐멘터리 '셉템버 이슈'에 그레이스가 나옴
(284)잘 차려 입는 여성들의 이점:
옷을 잘 입는 것은 인생의 매우 큰 기쁨이며 삶의 작은 선물이다. 잘 차려 입은 세련된 여성은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그녀에 대해서 더 알고 싶게 만든다. 반면 화려하고 외향적으로 옷을 입는 사람에게서는 재미와 흥밋거리를 찾게 된다. 옷과 패션은 잠 못이루다가 새벽 네 시에 깨는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무기인 것이다. 옷을 제대로 입으면 행복하고 자신감 있고 외향적이고 마음도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어떤 옷은 들뜬 기분을 갖게 하는데, 나이에 상관 없이 그런 옷을 입기만 하면 그날 하루를 즐겁게 살게 된다.

가끔은 무조건 새 옷이어야만 내가 더 예리해지고 생활에 활력이 생기기도 한다.
(298-300)일본인에 대한 메리 퀀트의 견해:
일본 여성들은 내가 디자인해서 입혀주고 싶은  깜찍한 외모를 갖고 있다. 그녀들은 또 나의 디자인과 메이크업 아이디어를 바로 이해하고 적용한 이들이기도 했다. 비달 사순도 비슷한 방식으로 큰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일본 여성들은 원래 나이보다 어려보이고, 아주 오래 그렇게 보인다.
또한 몸매도 날씬하고 피부가 예쁜 아이보리색이며 광대뼈 높이가 완벽하다. 그리고 일본 여성들은 짙은 눈과 윤기 있고 건강한 검은 색 직모를 갖고 있다. 비달 사순 머리를 하기에 최고의 조건이다.
--젊은 일본 여성들의 귀여운 외모와 광대뼈는 비달 사순의 유명한 머리 모양에 영감을 주었다. 일본은 마치 비달 사순을 위한 나라 같다. 나는 내 디자인도 일본 여성들의 외모를 더욱 살려주는 특징이 있다고 믿었고 내 옷을 입는 그녀들은 더욱 자신감 있어 보였다. 나로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똑같이 비슷한 시기에 전쟁을 치르고 재건한 나라인데 유럽의 영향은 이웃나라 일본에만 집중적으로 쏟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허기사 그들도 19C 중엽에 서양과 강제 외교조약을 했었다니,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라와 빗장 굳게 걸어 잠그고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나라가 어찌 같을까? 비달 사순과 메리 퀸트가 우리나라 여성들을 보았더라면 어떻게 평가했을까?)
(310-311)샤넬에 대한 퀀트의 견해:
샤넬은 현대적인 드레스를 창조해 여성을 세련되게 만들었다./샤넬은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괴팍해졌다. 하지만 비난할 수 있을까? 늙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아프고 힘든 일이다. 게다가 향수 생산업자가 그녀를 괴롭혔고 언론들은 그녀에게는 딱 하나의 디자인인 샤넬 재킷밖에 없다고 불평했다.샤넬 재킷-코코 샤넬이 1930년대에 만들었던 칼라가 없는 박스 스타일의 재킷/심플하고 클래식하고 우아한 스타일로 특히 중년층 여성에게 많이 애용된다

하지만 그 디자인이 어디 보통 디자인인가 영원하지 않은가 그녀는 짧은 스커트는 꼴불견이라고 발언하면서 이 게임에서 스스로 탈퇴했다. 이유는 여성들의 무릎이 보기싫고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 자신의 무릎에 자신없었던 걸까?
(다음에 읽을 책이 코코 샤넬에 관한 것인데 샤넬과 퀀트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그 원인이 무엇인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직격탄을 날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
나 또한 무릎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돼서 60년대에  남 다 입고 다니는 미니스커트를 한 번도 입은 적이 없고 샤넬라인만 고집했었다.)
(322-324)영국인의 자부심인 메리퀀트:
1960년대 패션 혁명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패션과 메이크업의 진화로 인해, 우리는 패션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패션은 계속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게임에서 언제나 앞서 있어야 한다./이런 운동의 중심에 런던이 있다. 파리 또한 여전히 고혹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현대성을 잃어버렸다. 도쿄는 사실 실망스럽다. 뉴욕과 런던이 이제 모든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1960년대에 런던은 십자군이 몰려온 것 같았다. 런던은 미국 유럽 아시아 사이의 다리가 되었다. 우리는 디자인, 아이디어, 독창성 측면에서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 첨단기술의 용광로이다. 우리에게는 최고의 패션학교와 디자인학교가 있다. 런던은 지금 전세계의 디자인 중심국이다. 모두가 런던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고 당당히 걸어나온 그녀-다방면에서 발휘한 뛰어난 감각과 재주, 누구도 그 이상일 수 없는, 남편과 아이에 대한 사랑-남편의 죽음 앞에 말을 아끼는 그녀의 경이로운 삶에 박수 갈채를 보낸다. 당신 멋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