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위대한 인간과 예술 세계로의 오디세이
론다 개어릭 지음/성소희 옮김/을유문화사/2020년 11월 초판 1쇄/887쪽/읽은 때 2022.1.16~ 2.3
**론다 개어릭:(여) 미국 파슨스더뉴스쿨의 예술디자인 역사이론학부 학장을 맡고 있으며 패션연구학교수 겸임
구겐하임 팰로십 수상자. 예일대 박사
(--1945년 창립 이래, 기라성 같은 출판사들의 浮沈 속에서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며, 자그마치 887쪽의 방대한 분량의 책을 버젓이 낼 수 있는 '을유문화사'에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종이책이 사라질 위기에 직면해서도 우두머리 장인으로서의 길을 묵묵히 갔으면 하는 절실한 바램이다.(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서울극장'이 문을 닫고, 起死回生하듯 대한극장이 관람료를 1000원 올렸어도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음에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속으로 박수를 보내는 이 심정으로--)
몇 번이나 책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엄청난 분량에 좀처럼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망스런 책을 읽고 난 직후에는 오기가 생긴다.
'넌 나를 실망시키지 않겠지?'
한번 훑다가 뜻밖의 내용물을 보고 웃음이 절로 났다. 참고문헌이 자그만치 153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뭐 이런 것까지 실었어? 학술 논문도 아닌데--'
더구나 막상 샤넬을 걸치거나 샤넬5를 뿌리는 당사자들은 대개 물건에나 관심이 있지 활자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게 뻔한데--
(오늘 아침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점점 귀부인들(?)이 샤넬 제품에 흥미를 잃어간다고.
개나 소나 다 찾는(?) 명품은 이미 명품이 아니다. 적어도 그걸 걸치거나 뿌렸을 때 상대방의 눈이 부러움을 담고 탄성을 질러야 그게 비싼 돈 들여 사들인 명품을 지닌 보람이지---)
**가브리엘 보뇌르 "코코" 샤넬(Gabrielle Bonheur "Coco" Chanel):(1883~1971)향년 88세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사업가이자 샤넬의 설립자/가난한 집안에 둘째딸로 태어났고 보육원(수녀원11세~18세)에서 자라며 공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서른 살에 이미 프랑스에서 누구나 다 아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역사상 최초의 합성 향수 샤넬No.5가 거둔 대성공에 힘입어 그녀는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호가 되었다. 샤넬No.5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향수로,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에서 3초마다 1병씩 판매된다.
1910년에 설립된 '샤넬'은 세상에서 가장 수익이 높은 개인 소유의 명품 회사다.
*저자의 의도:이제는 샤넬의 작업과 작품 그 자체가 유럽 정치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아주 흥미로운 샤넬의 수많은 연애가 단순한 일화로서의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 숙고해야 한다.
--차례--
1.유년시절
샤넬의 출생지는 프랑스 서부 루아르 계곡 지역이다. 그러나 샤넬은 자신의 고향은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마차에 가정용품과 잡화를 싣고 전국을 떠도는 행상이었다.(우리나라의 보부상,방물장수에 해당함)
(37)"어려서 찾아오는 행복은 오히려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어려서 극심하게 불행했던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가브리엘 샤넬
**가브리엘은 히브리어로 '신은 나의 힘'이란 뜻
(46)코레즈 계곡의 푸르고 울창한 언덕에 자리잡은 오바진 수녀원--복잡한 모자이크 바닥과 추상적 문양을 표현한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제외하면 장식이 거의 없어 질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이곳은 6년 넘게 가브리엘 샤넬의집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내 전부를 억지로 빼앗았고 나는 죽었어요. 열두 살에 깨달았죠.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며 몇 번이고 죽을 수 있어요."--샤넬
(49)최악의 인간--그녀가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장 잔인하고 충격적인 일은 아버지가 가족 전체를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힐끗 뒤돌아보지도 않고 어린 자식 다섯 명을 내다 버린 알베르 샤넬은 가브리엘의 인간 관계에 대한 믿음을 영원히 산산이 부수어 버린 것 같다.---(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여성에게 사랑과 애착이 수치와 굴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7)샤넬은 언제나 수녀들에게 말로도 다 못할 만큼 고마워했어요. 수녀들 덕분에 바느질을 배웠거든요--에드몽 드 샤를-루
(64)돈의 중요성: 나는 반항아였다. 자존심 강한 사람이 바라는 것은 자유, 단 하나다. 하지만 자유로우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나는 돈을 오로지 감옥문을 열어줄 수단으로만 여겼다.---나는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돈, 돈은 왕국의 문을 열 열쇠야. 돈은 물건을 사는 수단이 아니다.--나는 나의 자유를 사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를 사야 했다.--샤넬
(65)드크루셀:소설가/사넬의 가정교사 역할을 함/드쿠루셀은 극적인 신분 변화라는 주제를 특히 좋아해서 몹시 가난한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거나 거부가 졸지에 몰락하는 이야기를 자주 썼다./그녀는 드쿠루셀의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살았다./"저는 그의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 저를 투사했죠"--샤넬
(70)샤넬은 십대 후반에 가슴 아픈 교훈을 얻었다.
'옷이 내가 누구인지 결정한다'(물랭의 노트르담 기숙학교는 자비부담 학생과 빈곤학생의 교복을 달리했다)
샤넬은 이 교훈을 결국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했다.
(71)샤넬은 물랭의 여기저기를 산책하면서 고색창연한 시골 저택을 보고 소설 바깥의 현실에서 프랑스 상류층의 세계를 처음으로 흘끗 들여다볼 수 있었다.
(74)(물랭에는 비교적 잘사는 친척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샤넬을 외면했던 것이다)
샤넬은 아무 죄 없는 어머니와 그녀가 그토록 용서하려고 애썼던 아버지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내내 근처에서 살았고 그녀의 비참한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일가친척 전체에게서 버림 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물랭에 사는 친척과 그들의 후손 거의 전부를 냉담하게 멀리했다. 샤넬은 이십 대가 채 되기도 전에 무정하고 냉소적으로 변했다.
---샤넬은 고모네 집으로 떠나는 가족 여행을 매력적으로 느꼈다. 루이즈 고모가 패션 디자이너이기 때문이었다.(노트르담 기숙학교는 친척집으로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일종의 '샤넬 스타일'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던 루이즈는 천을 재빠르고 창의적으로 다룰 줄 알았으며 액세서리를 만드는 솜씨가 특히 뛰어났다. 그녀는 바늘을 날래게 몇 차례 놀리거나 가위를 이리저리 복잡하게 움직여서 아무 무늬없는 손수건을 모자에 달 아름다운 꽃장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을 거치면 쓸모 없던 천조각도 낡은 드레스를 아름답게 되살려 놓는 멋진 보디스로 변했다. 루이즈는 블라우스에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흰 커프스와 칼라를 달아서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기도 했다.(훗날 샤넬의 작품에도 이런 세부 양식이 나타난다.)
(76)1901년 샤넬이 고모와 함께 바느질 재료를 사러 온천도시 '비시'로 여행-벨 에포크 시대(belle 'epoque'좋은 시대'라는 뜻으로 1890년부터 1914년까지 프랑스가 전례없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를 직접 경험함
(77-79)수녀들의 알선으로 물랭지역에서 재봉사로 취직이 됨/바느질 솜씨가 훌륭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여성복 제작, 기병대원들의 옷수선을 하며 고모 아드리엔과 독립생활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림/젊은 귀족출신 장교들과의 교제도 시작/
'카페 콩세르인 라 로통드'에서 포즈걸로 활동, 여기에서 코코라는 이름을 얻게 됨
**포즈걸--무대에서 공연하는 스타 뒤에 반원형으로 줄지어 서서 포즈를 취하는 예쁜 여성
*'코코'의 의미--애완동물에게 붙여주는 애정어린 이름이나, 직역하면 '작은암탉'이라는 뜻이고, 비유적으로는 일종의 매춘부를 가리키는 단어 '코코트'처럼 들림
(이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책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다. 샤넬은 너무 재미있고 사랑스러우니까~)
2.새로운 세계
(85)28세에 자살한 언니 줄리아의 아들 앙드레 팔라스를 거둠(샤넬이 부르주아 출신 에티엔 발장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라는 추측도 있음)
(91)코코 샤넬은 라 로통드가 시시한 술집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가 알고 있던 더 화려한 도시, 비시에 진출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그녀는 자기와 함께 가자고 고모를 설득했고 둘은 오페레타로 진로를 바꾸겠다는 코코의 꿈을 좇아 떠났다.
(92)비시에서의 성공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둘은 헤어진다.
아드리엔은 물랭으로 돌아와 모리스 드 넥송 남작의 연인이 되어 수십 년 동안 함께 산다.
한편 샤넬은 비시에 남아 극장에서 고무즈 역할을 했으며 이때 입은 검은색 스팽글 드레스는 훗날 샤넬 큐튀르에서 주요한 이브닝 드레스가 되었다.
**고무즈--노래와 춤으로 주연 배우나 가수를 보조하여, 각 공연 사이에 노래를 몇 곡 부른다.
(93)비시 최고의 스파 중 하나인 라 그랑 그리에서 '워터 걸'이 되었다.
**워터 걸--새하얀 앞치마, 옷과 잘 어울리는 모자, 작고 하얀 부츠로 꾸미고 온천 요양객들에게 따뜻한 광천수를 나눠 줌/간호사, 웨이트리스, 쇼걸을 한데 합쳐놓은 존재
(94)샤넬은 발장의 저택 샤토 드 르와얄리유로 들어가 그에게 의탁함/그네는 발장이 가볍게 만나던 수 많은 젊은 여성 중 한 명에 불과했다.(샤넬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거짓으로 말하고 숨기는 일을 반복했다.)
(99)샤넬은 이 여성들(샤토 드 르와얄리유에 드나드는 고급 매춘부들)을 관찰하고 배웠다.그들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샤넬에게는 그들을 모방할 알맞은 도구가 전혀 없었다.--게다가 가슴도 엉덩이도 납작하고 소년 같은 몸매였다.
(100)샤넬은 자기가 여학생이나 톰보이 스타일로 꾸몄을 때 특히나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이런 스타일에 맞춰 다양한 옷을 입었고 자주 발장의 옷장에서 옷을 빌려오기도 했다.
(101)코코 사넬은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옷을 입지 않았다.샤넬은 승마술에 뛰어나야 샤토 드 르와얄리유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샤넬은 한 번도 꺾인 적 없었던 강철 같은 결의에 차서 승마를 배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발장은 진지한 남성 기수처럼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타는 방식을가르쳤다. 그 뒤로 평생 샤넬은 남자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녀는 6년 가량 그곳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103)탈출 계획:샤넬은 남자에게 의존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심에 불탔다.
"저는 탈출해서 저만의 창조물로 우주의 중심이 되고 싶었어요. 주변부에 계속 남아 있고 싶지도, 다른 사람의 우주 속 일부가 되고 싶지도 않았어요"--샤넬
(104)샤넬은 대세를 거스르는 자기만의 직감을 따르고 발장의 말 사육사들처럼 꾸며 입으면서 처음으로 패션 열풍을 일으켰다. 샤넬의 작은 승마복, 남성용 오버코트, 귀여운 밀짚모자 때문에 르와얄리유에 머무는 여성 무리의 화려한 옷과 보석은 모두 한물간 구식처럼 보였다.
(104)모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발장은 샤넬에게 심심풀이로 모자를 만들어보라고 했다(그의 여자친구들에게 선물로 줄 요량으로)
기회를 잡은 샤넬은 파리에서 장식없는 모자 수십 개를 사다가 다양하게 꾸몄다. 그녀의 모자를 쓴 발장의 여자들로 인해 순식간에 샤넬모자는 인기를 얻었다.
샤넬은 발장에게 가게를 내고 싶다고 청했다. 발장은 그녀에게 파리의 독신용 아파트를 빌려 주었다.
(106)1909년, 샤넬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 생겼다. 임신과 낙태 그리고 불임--그녀는 샤토 드 르와얄리유를 완전히 떠났다.
3.함께 디자인하다:코코샤넬과 아서 에드워드 '보이' 카펠
(107)보이는 잘생기고 비밀스럽고 매혹적이었다. 단순히 잘생긴 것이 아니라 눈이 부셨다. 나는 그의 태연함, 그의 초록색 눈동자를 사모했다. 그는 위풍당당한 말, 강인한 말을 탔다. 나는 그에게 반했다. 나는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 이 영국인과 나는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그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나는 결코 그를 잊지 않았다. 그이는 내 인생에 커다란 기회를 안겨 주었다.---그는 내게 아버지이자 형제이자 가족 전체와 같았다--(그들은 10년 동안 사귀었다)
(108)그들의 관계는 오래도록 이어진 진정한 사랑이었고 샤넬이 맺은 인간 관계 중에서 단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나를 낳았어요"샤넬은 카펠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고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보이 카펠은 정말로 샤넬을 낳았다. 샤넬은 카펠의 사랑과 후견 덕분에 '코코 샤넬'로 태어났다. 카펠은 샤넬의 정신을 일깨웠고,샤넬의 몸을 흥분으로 가득 채웠고, 샤넬이 생각하도록 가르쳤고, 샤넬에게 사업 감각을 불어넣었고, 샤넬에게 예술과 문학, 정치, 음악, 철학을 알려줬다.
(109)샤넬과 카펠의 연애는 샤넬의 개인사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샤넬제국을 건설하는 과정부터 오늘날까지 샤넬의 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방적 특징을 빚어냈다. 카펠은 샤넬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었고,이로써 여성 패션을 전복했던 막강한 힘을 탄생시켰다. 바로 여성을 해방하는 충동을 담은 새로운 드레스 디자인이었다.
---우리는 샤넬이 카펠과 만나던 시기에 일으켰던 초기 패션 혁명이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코코 샤넬은 1908년부터 1918년까지, 즉 '보이' 시절에 겪었던 변화 덕분에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존경스러운 인물이라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맡을 수 있었다.
**톰보이-- a girl who behaves in a boyish manner
(112)발장은 여전히 샤넬의 사업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샤넬을 도와주었다.--발장은 말레제르브 대로의 아파트를 빌려준 것에 이어, 샤넬이 패션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도록 파리의 뛰어난 재봉사 뤼시엔 라바테를 고용해 주었다.(부모복은 없어도, 재봉솜씨 인자를 타고난 데다 인복이 있어서-인맥을 잘 활용하는 천부적인 재능-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폴 모랑--소설가 '밤을 열다', '밤을 닫다'가 있다 '루이스와 이렌'은 샤넬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117)코코 샤넬과 보이 카펠은 파리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샤넬이 사업을 정말 제대로 시작했던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실 이 두 사건은 분리할 수 없다. 샤넬은 카펠의 사랑과 격려, 특히 넉넉한 재정 지원 덕분에 패션 세계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9)무용가의 꿈을 접고:당시 28세였던 샤넬은 무대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마침내 포기했다. /그러나 샤넬은 무용이 균형잡히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게다가 유리드믹스 훈련은 샤넬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익했을 것이다. 샤넬의 간절한 바람대로 그녀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신선하고 현대적인 패션 디자인은 사실 달크로즈가 고안해 낸 유리드믹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유리드믹스--즉흥적이고 자연스럽게 움직임에 접근하는 새로운 음악 교육 방법
(이 책이 두꺼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다. 샤넬이 살았던 시대의 유럽 역사와 문화가 전반적으로 언급되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130)1913년, 카펠은 뛰어난 선견지명을 발휘해서 샤넬에게 파리 부티크를 확장하고 해안 휴양도시인 도빌에 지점을 내라고 권했다.
--샤넬은 도빌의 공토 비론 거리에 있는 아주 웅장한 카지노 바로 맞은편에 새 부티크를 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게의 흰색 차양에 검은잉크로 '가브리엘 샤넬'이라고 썼다.--도빌에 휴가를 보내러 온 귀족들이 산책하다가 공토 비론 거리로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131)1910년부터 1914년 사이, (27세~31세)이때가 샤넬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샤넬은 프로이트가 행복해지려면 필요하다고 제안했던 사랑과 일, 두 영역에서 성취를 얻었기 때문이다. 코코 샤넬과 보이 카펠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가정에서 누릴수 있는 기쁨을 함께 즐겼다. 그 중하나는 고아가 된 샤넬의 조카 앙드레 팔라스를 보살피는 기쁨이었다.
(137)보들레르의 시--보이 카펠은 제게 '가난뱅이를 때려눕히자'를 소개해 줬어요--그 시는 저의 도덕적 견해에 깊이 영향을 미쳤죠. 저는 보들레르가 수동적 태도를 떨쳐내주려고 때려눕혔던 바로 그 가난뱅이였어요.--샤넬
(138)코코 샤넬은 분명히 보이 카벨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 샤넬은 "우리는 서로를 위해 태어났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카펠은 샤넬에게 무슨 말을 했든 샤넬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펠은 사고가 개방적이었고 샤넬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시대와 계급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40)카펠의 裏面--카펠은 샤넬의 존재를 감춰서 사회적 평판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도 자유롭게 만나고 다녔다. 카펠은 샤넬을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여성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잘생기고 매력적이고 세상 경험 많고 부유한 여느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보이 카펠도 파리의 유혹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카펠은 단지 쾌락만을 좇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야망이 대단했고 자기 자신이 앞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꿈꾸는 삶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다. 그 기준에서 재봉사는 아무리 눈부시게 아름답더라도 배우자가 될 수 없었다.
(144)아무나 수영하지 않던 시대:당시에는 도빌에서나 다른 휴양지에서나 오직 어린이와 하인만 바닷물에 들어갔다.--숙녀들은 옷을 완전히 차려 입고 바다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샤넬은 직접 수영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전쟁 상황이 되자 여성이 지켜야 할 예의범절의 세세한 사항들은 대체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였고, 여성은 수영할 수 없다는 제약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자 샤넬의 수영복은 역시 샤넬이 직접 고안해 낸 머리를 감싸는 수영모와 함께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샤넬은 새로운 여성상, 씩씩하고 힘차고 활발하고 자유분방한 여성을 대표했다.
(145)샤넬에게는 그녀 자신이 언제나 최고의 광고 모델이었다.--샤넬은 과거 여성의 복장(거대한 모자,바닥에 질질 끌리는 옷자락--)을 회고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몸이 움직이고 숨쉬고 성적 생명력이 가득한 독립체라고 생각했고, 몸과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믿었다.
샤넬은 그저 옷을 입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도 발명해 내고 있었다. 여성들은 샤넬이 마법처럼 불러낸 해방 판타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151)오만하고 고집스러운 성격과 쉽게 만족할 줄 모르는 태도는 샤넬의 인생에 적어도 디자이너 인생에 눈부시게 이바지했다.
(152)샤넬의 헤어 스타일:턱선까지내려오는 단발머리/샤넬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스타일이 됐다/아드리엔 고모도 잘랐다/곧 파리에서 도빌까지 유행에 민감한 여성들이 똑같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고,긴 머리카락을 매만져서 복잡한 모양을 만들던 장구한 전통이 최후를 맞았다.
(153)간호복 제작:1914년 9월, 도빌의 호텔이 병원으로 바뀌고 귀족숙녀들이 간호사로 나섰다. 샤넬 아가씨 셋은 다시 뭉쳤고, 옷은 입고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팔려 나갔다.
(154)샤넬이 만든 옷은 새로운 세상과 어울릴 만한 옷을 찾는 여성들에게 완벽한 해결책이 되어 주었다.--유럽 남성 세대 전체가 평범한 일상에서 쫓겨나 전장으로 내몰리자, 여성 수백만 명이 당당하게 나서서 남성이 남기고 간 일을 해냈다.
유럽여성의 권리---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유럽 여성은 시민권을 거의 누릴 수 없었다. 여성은 대체로 군대에서 복무할 수 없었고 투표할 수도 없었고 전문직은 사실상 선택할 수 없었으며 고등교육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변화를 예고했다. 여성이 직업세계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56)저지 옷감으로 승부를:
당시 저지는 주로 남성용 내의나 잠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저지에서 가능성을 발견했고 이제는 전설이 된 선견지명을 발휘해서 재고를 전부 사들였다. 저지는 흔하고 보잘것 없는 옷감이라 남들 앞에서 입는 옷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원단 색깔도 베이지색이나 회색밖에 없었다. 쉽게 찢어지고 구겨졌으며, 바느질 실수나 수선한 자국이 잘 보였다. 옷감에도 계급이 있다면 저지는 하층민, 노동자 계급이었다.그녀는 사들인 수많은 저지를 사용해서 튜브 스미즈 드레스와 스커트를 만들었다.
**튜브 스미즈 드레스--허리에 이음선이 없어서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폭이 넓은 원피스
(157)샤넬은 저지로 만든 옷을 통해 여성스러운 실루엣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유행시켰다.
(158)젊은 코코 샤넬은 몸매가 날씬해서 저지드레스가 완벽하게 어울렸다.--샤넬의 옷은 나이든 여성이나 살집 있는 여성을 돋보이게 해주지는 않았다. 샤넬의 날렵하고 매끈한 옷 아래서 풍만한 몸매는 그저 살덩이가 되었다.
--샤넬은 젊음을 패션의 필수 조건으로 바꾼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샤넬의 옷을 입어서 아름다울 수 있으려면 젊어야 하거나 최소한 아주 날씬해야 했다.
(160)샤넬이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당시 여성들의 마음에 그토록 강렬하고 직감적으로 가 닿을 수 있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 페르소나가 희생당한 병사들의 그림자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다른 사람에게 투사된 성격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
(161)보이 카펠의 죽음:
전쟁은 샤넬이 사랑했던 보이 카펠을 빼앗아 갔다./샤넬은 도빌에서 대체로 안전하게 지냈지만, 카펠은 1914년 8월에 전장으로 떠났다. 전장에서 만난 프랑스 전 총리 클레망소는 카펠에게 戰時 프랑스--영국 석탄위원회의 회원 자격을 부여했고 이를 계기로 카펠은 큰 부자가 되었다.
(163)카펠은 샤넬을 잊지 않고 짬을 낼 수 있을 때면 찾아와 여러 가지 사업구상을 하면서 프랑스 남서부 해안의 휴양지 비아리츠에 매장을 내도록 조언했다. 그의 예감대로 비아리츠 매장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7)"저는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했어요." 샤넬이 회고했다."쿠튀르 하우스는 예술가의 창조물이 아니었죠. 계속 유지해야 하는 유행, 또는 여성사업가의 작품이 됐으니까요. 오히려 쿠튀르 하우스는 오로지 자유만을 좇는 사람의 작품이예요 "
1915년, 샤넬의 단순한 저지 드레스 중 한 벌은 약 7천 프랑에 팔렸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3천7백 달러와 같다.--저지는 저렴했고,옷은 대체로 안감이 없는 홑겹이었으며, 샤넬은 재봉사에게 봉급을 그리 많이 주지도 않았다. 옷의 가격은 코코 샤넬 자체와 관련 있었다.샤넬은 자기 자신이 옷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우쳤다.
(169)샤넬의 옷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고귀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샤넬은 예술작품을 창조해 낸 거장이었고 샤넬이 창조한 예술은 저지에 깃들어 있다." '보그'가 선언했다. 샤넬은 공작부인들에게 하녀들이 입는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을 특권을 팔면서 거금을 청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과거 시골 보육원에서 자란 '빈곤학생'이 갚아주는 궁극적인 복수였다. 샤넬은 이 성취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자기원칙을 고객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여겼다.
(171)(샤넬이 수입이 늘어나자 마구 돈을 쓰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카펠의 돈이었다. 자신의 지각 없음을 깨닫고 그녀는 다시는 돈을 섣불리 관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6년까지 카펠이 빌려주었던 돈을 동전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갚았다. 심지어 빌라 라랄드를 30만 프랑이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현금을 주고 샀다.
(189)(보이 카펠은 자신의 부에 걸맞는 젊은 미망인 다이애나 윈덤과 결혼했다. 샤넬은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 유부남 카펠을 만나 예전처럼 지냈다.)
1919년, 잠에서 깨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던 해이자 내가 모든 것을 잃었던 해--코코 샤넬
(190)( 카펠은 누나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칸으로 가다가 차가 펑크가 나면서 하수구에 처박혀 불이 나는 바람에 차와 함께 타버린다. 두 여자 사이에서 밀당을 하다 죽은 카펠을 보니 카렌과 베릴 사이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은 데니스 핀치해턴이 생각난다. 카뮈의 죽음도 카펠과 너무도 유사하다.)
(193)(아서 에드워드 카펠 대위의 장례식이 치러졌으나 두 여인은 참석하지 않았다)
1918년 7월 6일, 프랑스에 공헌한 외국인으로 인정 받아 레지옹 도뇌르를 수훈한 카펠 대위는 파리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4.드미트리 대공
(199)1920년 여동생 앙트와네트가 아르헨티나에서 자살함(언니도 자살했지!)
(200)"제 사업에 깃든 인생과 얼굴, 목소리가 제 인생,제 얼굴,제 목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제 일은 저를 사랑하고 저에게 복종하고 저에게 감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일에 저 자신을 완전히 쏟아 부었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는 깊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죠." 결국, 샤넬은 유일하게 충실한 동반자, 일과 결혼했다.
(210)드미트리 대공:
황제 후계자/어머니는 태어나자 마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남매 곁을 떠나 방랑한다. 이들은 유모에게서 컸다/기병장교 출신으로 올림픽에 승마선수로 출전하기도 한다/친구이자 사촌간인 유수포프 공작을 따라 환락가에 발을 들여 놓는다./농부 출신의 수도사 라스푸틴이 자신은 신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며 황실의 권력을 거머쥐고 음모를 꾸미자 유수포프 공작이 사촌 드미트리를 끌여들여 라스푸틴을 살해한다. 이후 이들은 러시아에서 영구 추방된다/그는 재산도, 지위도, 직업도, 가족도,나라도 잃었다. 또한 드미트리는 절친했던 친구 펠릭스 유수포프와 맺었던 인연을 끊었다. 둘이 주고받았던 서신으로 미루어 보아 때로는 애로틱한 관계로 나아갔던 그들의 우정은 라스푸틴 살해 가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파리에서 드미트리는 완전히 자유로웠지만, 인생을 다시 꾸릴 수단도 의지도 없었다.
(211)추방당한 러시아인들은 군주정 복고를 추진하고 있었다. 1920년대 초, 그 계획은 여전히 모호했지만 차르가 된다는 꿈은 드미트리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누이 마리야는 패션계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정교한 러시아식 자수품을 만들었다.
한편 드미트리는 도박으로 10만 프랑의 빚을 졌다.
(212)드미트리는 재정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가능한 방안을 고려해 보았다.
"아주 부유한 신부와 결혼한다는 생각은 이제 예전보다 덜 불쾌하다/그날의 디너파티에서 프랑스 가수 마르트 다벨리와 저녁식사를 했다. 코코 샤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난 10년간 그녀를 못 봤었다. 다시 만나니 몹시 반가웠다. 우리는 새벽 4시까지 함께 있었다. 코코가 나를 집에 태워다 줬고 우리는 즉시 놀라울 정도로 친해졌다"(1920년12월31일 일기)
코코 샤넬은 드미트리가 좋아하게 된 개탄스러운 신흥 부자 중 한 명이었다.
(213)둘은 10년만에 다시 만나서 곧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드미트리의 외모는 샤넬이 좋아하는 유형이었다./37세로 억만장자가 된 샤넬은 왕족 신분을 갈망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샤넬의 돈이 필요했을 뿐 '신분이 천한 여성'을 사랑하지도, 결혼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218)샤넬은 1921년 이미 자기에게 푹 빠져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던 유부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만나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샤넬이 지원하던 발레루스의 단원이었고 가족 전체와 함께 샤넬의 벨 레스피로에서 지냈다./스트라빈스키는 샤넬이 드미트리와 놀아난다는 소문을 들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분노에 차서 샤넬을 떠났다.
(참말로 이런 게 코미디다. 유부남이면서 샤넬에게 맘을 빼앗긴 주제에, 명색이 총각인 드미트리와 연애하는 샤넬을 질투하다니~ 세상은 요지경!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라면 지체 있는 집안에서는 그런 '헌 계집'은 쳐다도 안 볼 땐데~)
(219)둘은 1922년에 다시 긴 휴가를 떠났다. 드미트리를 데리고 급히 비아리츠로 내려간 샤넬은 모래언덕 사이에 숨어 있는 새하얀 별장 아마티키아 빌라를 빌려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두 달간 함께 지냈다. 샤넬의 인생에서 가장 긴 휴가였다.
(220)샤넬은 숫자점과 점성술, 행운의 상징, 부적도 아주 좋아했다. 아파트에는 타로 카드와 수정 구슬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요새 한껏 부정적 이미지로 매스컴을 타는 어느 입후보자의 아내와 흡사해서 흥미롭다)
(221)오컬트의 매력:
권력과 재산을 잃은 러시아 군주정 지지자들이 오컬트를 매력적으로 느낀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 모두 오컬트가 약속하는 것, 즉, 주변 환경을 조종하는 방법과 귄력을 간절하게 바랐다. 오컬트와 왕권은 공통점이 많았다. 오컬트와 왕권 모두 특권을 나타내는 상징(징조, 비밀스러운 숫자, 왕실 휘장과 보석, 작위 등)으로 가득한 기호체계에 의존했다. **오컬트occult-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
(227)샤넬 No.5의 탄생:
1921년경에 출시되었다. 차르의 전 조향사인 에르네스트 보는 샤넬의 향수사업이 성장하는 결정적인 기폭제였다. 보는 프랑스의 유명한 향수ㆍ화장품 제조업자인 프랑수아 코티 밑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향수 프로젝트를 맡아 달라는 샤넬의 제의에 응했다. 그래서 샤넬은 보의 중심 활동지인 그라스를 방문했다. 그라스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향기의 도시였고, 전 세계 향수의 수도로 여겨졌다./보는 '자연의 향기를 인공적으로 만들기'를 원했던 샤넬의 뜻에 따라 일랑일랑+네롤리+샌달우드+베티베르+튜베로즈+재스민에서 추출한 에센스를 합성 알데하이드와 혼합했다. 합성 화학물질 덕분에 향기는 더 산뜻해졌고, 특정한 꽃향기를 감지할 수 없어서 무슨 향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보는 알데하이드가 청명한 북쪽 공기의 냄새, 북극에 내리는 눈의 향기, '차츰 물러가는 겨울의 향내'를 더해 준다고 설명했다. 샤넬 No5에 사용된 에센스 중에서는 재스민 에센스가 가장 지배적이지만, 재스민향은 다른향을 모두 억누를 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 샤넬은 단 한 가지 단순한 이유로 재스민을 엄청나게 많이 사용해야 한다고 우겼다. 보가 샤넬에게 쟈스민 꽃잎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고 알려줬던 것이다. 샤넬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수'를 만들고 싶어 했다.
(229)샤넬은 향수 패키징을 만들면서도 다시 한번 전통을 파괴했다. 전통적으로 향수는 뉘 드 쉰(중국의 밤), 금단의 열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처럼 낭만적이거나 '동양적인'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상표명을 달고 있는 작고 정교한 병에 담겨서 팔렸다. 하지만 샤넬은 그런 이국적인 현실 도피를 참아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마켓팅할 가치가 있는 판타지는 단 하나였다. 바로 코코 샤넬이 되는 판타지, 코코 샤넬 같은 향기를 풍기는 판타지였다. 따라서 샤넬은 향수에 시적인 이름을 붙이는 대신, 업계 최초로 자기 이름을 사용했다.
(231)샤넬 No5는 서서히 모습을드러내며 존재를 알렸지만 명성은 크게 뻗어 나갔다. 샤넬 No5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향수가 되었고, 샤넬 No5의 매출고 덕분에 샤넬은 남은 평생 막대한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샤넬의 직감은 옳았다. 향수는 가장 시장성 높고 수익성 좋은 창작품이었다.
5.내 심장은 주머니 속에 있다:코코와 피에르 르베르디
(239)사넬이 평생 가깝게 지냈던 지인은 극소수에 가깝다.
그중에서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지켜나갔던 벗은 단 한 명이었다. 바로 프랑스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였다. 르베르디는 거의 40년 동안(대체로 아주 멀리 떨어져서) 샤넬을 사랑했다. 그들은 1919년(샤넬36세)에 만났다. 그리고 이듬해 샤넬과 르베르디(6살연하)의 로맨스가 시작되었다.
(252)르베르디와 장 콕토:
샤넬은 르베르디의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샤넬은 르베르디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평생 그와 연락하며 지냈다.--세상을 뜰 때까지도 샤넬은 가난하고 무명이었던 르베르디와 그녀가 보기에 과분한 명성과 부를 누렸던 그 세대의 다른 시인들을 자주 비교했다. '그들은 누구였지? 콕토가 누구였지? 삼류 작가였잖아!' 그녀는 화가 치밀어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저 의미없는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작자였지. 아무것도 아니었어. 르베르디는 시인이었다고! 선지자였어.' 장 콕토 역시 샤넬과 친한 친구였지만, 샤넬은 위 이야기에서 문학을 판단하는 훌륭한 감식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르베르디의 시는 콕토의 시보다 훨씬 더 풍요로웠고 수준 높았다. 하지만 샤넬은 엉뚱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르베르디는 정말로 명성이나 부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평화였다.
(25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샤넬과 르베르디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지켜나갔다. 샤넬은 르베르디가 자기 자신의 '바르게 수정한' 거울 이미지, 즉 자기가 명성과 부를 포기하고 그 대신 영성과 예술, 문학을 추구했더라면 살게 되었을 인생의 모습이라고 느꼈다. 샤넬은 르베르디에게서 영감을 받아 글을 써 보기도 했다.
(256)피에르 르베르디는 1960년 6월17일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대체로 멀리 떨어져서 지냈던 샤넬과 르베르디가 40여 년간 우정을 이어갔던 수단은 주로 편지였지만 르베르디는 많은 면에서 코코샤넬이 양심을 잃지 않도록 절대 불빚을 끄지 않고 길을 안내해 주는 등대와 같았다.
6.여성 친구들,모방 전염병, 파리의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avant-garde: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따위의, 기성 예술의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한 혁신적인 예술 운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
(267)1920년대, 샤넬은 자기가 정말로 세계 무대에 당당히 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유럽 전역과 미국의 부유하고 유명한 여성들은 샤넬이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여성이 샤넬의 디자인을 모방한 옷을 입었다. 코코 샤넬은 파리에서 시크함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이 아이콘은 자기 힘으로 얻어낸 왕족이라는 신분에 가까웠고,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샤넬은 가르슈의 벨 레스피로를 팔고 장기 임차한 오텔 몽바종-샤보로 이사했다. 드넖은 정원이 딸린 이 타운하우스는 포부르 생--오노레 거리 29번지에 있는 역사적인 건물이었다.
샤넬의 새 이웃 중에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프랑스 대통령도 있었다. 유서깊은 가문을 선망하던 샤넬답게 이번에는 새 집 역시 왕족 혈통이 거주했었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268)샤넬은 장 콕토의 비서 모리스 사쉬를 고용, '꼭 읽어봐야 하는 책'으로 집을 가득 채워달라고 요구했다. 사쉬는 매달 샤넬에게서 받은 돈으로 금박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책들로 책장을 채웠다.
--나중에 피에르 르베르디는 샤넬의 책장을 보고 그녀가 사쉬에게 얼마나 단단히 속아 넘어갔는지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샤넬은 분노로 길길이 날뛰었고 당장 사쉬를 해고했다.
(어느 나라나 졸부들의 행태는 비슷한가 보다. 우리나라도 산업사회로의 급성장 시대에 금박 입힌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이 얼마나 잘 팔렸는가!)
(270)샤넬은 드넓은 응접실 한가운데에 검은색 그랜드피아노 두 대를 갖다 두었다. 피아노는 그녀가 정복하려고 나섰던 새로운 사교계, 파리의 극적인 아방가르드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녀는 폴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 미시아 세르를 소개받았다. 미시아는 프랑스 예술계 엘리트 중에서도 원로격이었고 위대한 18세기 전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살롱 여주인이었다.
(271)샤넬은 여성복을 만드는 일에 6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지만 여성을 멸시했다. "여자는" 샤넬이 단언했다."질투심+허영심+수다+혼미한 정신 상태와 같아요."
하지만 샤넬은 '파리의 여왕' 미시아세르는 예외로 취급했다. 결혼 전이름이 마리 조피아 올가 제나이드 고데브스카였던 미시아는 샤넬보다 열두 살 더 많았으며 자아도취에 빠진 변덕스럽고 비정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샤넬이 평생 가까이 지냈던 유일한 여성 친구였다.
(272)미시아는 음악재능이 상당했다.하지만 미시아는 그녀 자신의 재능보다는 그녀가 역사 속으로 인도한 다른 사람들, 그녀가 발굴하고 육성하고 자극하고 홍보했던 예술가들 덕분에 명성을 얻었다.
그 예술가 중에는 빈센트 반 고흐와 스테판 말라르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도 있었다. 미시아는 동시대 천재들을 양성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고, 그 천재들에게 선택 받은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을 제공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사회 계층이나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성공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천재의 'x'인자를 지니고 있는지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샤넬에게서도 그 인자를 포착했다.
(미시아는 제 2의 거투르드 스타인인가?)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
(274)(미시아의 불우한 어린 시절은 샤넬의 공감을 샀고 둘은 바로 가까워졌다)
미시아는 마침내 수도원에서 해방되었고 고양이 같은 눈매로 유명한 육감적인 미인으로 성장했다.
미시아에게서 영감을 얻은 여러 예술가 중에서도 르누아르와 보나르, 뷔야르,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275)미시아의 두 번째 남편은 '분변기호증'이 있었다.
**분변기호증--糞便嗜好症은 대변 행위 및 대변에 대해 현저한 성적 흥분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277)미시아와 샤넬의 만남:
(1916년 샤넬 33세 때 배우 세실 소렐의 디너 파티에서./미시아는 첫눈에 샤넬에게 반했다./샤넬은 미시아 못지 않게 그녀의 남편 호세-마리아 세르에게 관심을 보였다/1919년 보이 카펠의 사망 이후 미시아는 샤넬을 상심에서 구하기 위해 많은 파티에 동행했다/당시만해도 재봉사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기 싫어하는 귀족들이 여전히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81)1920년 8월, 미시아와 호세-마리아 세르가 드디어 결혼했다. 베네치아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샤넬을 함께 데리고 갔다. 그해 여름, 프랑스와 러시아의 귀족들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고 미시아는 샤넬에게 그들을 최대한 많이 소개했다. 미시아 덕분에 베네치아 여행은 샤넬이 사교계에 진출해서 확고하게 자리잡는 발판이 되었다.
(284)세르게이 디아길레프:러시아 무용단 단장/발레 뤼스는 그가 이끄는 혁명적 무용단/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제전' 공연을 위해 샤넬이 디아길레프에게 거금을 후원하자 미시아를 뛰어넘은 위상을 차지했다
(285)코코와 미시아의 갈등:
샤넬은 미시아의 모순적 충동을 이해했다. 자기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서 느끼는 사악한 쾌락이 너그러운 마음과 뒤섞여 있는 깊은 우물에서 흘러나와요. 사랑하면서 동시에 앙심을 품는거죠. 그녀는 저를 보면 괴로워해요. 하지만 저를 볼 수 없다면 깊은 절망에 빠질 거예요.--저는 가끔 제 친구들을 깨물어요. 그런데 미시아는 자기 친구들을 집어삼켜요.
(286)말년에 샤넬과 세르는 서로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아주는 습관을 공유했다. 미시아는 카페나 레스토랑에서도 무심히 치마를 걷어올려 서슴지 않고 허벅지에 모르핀 주사를 직접 놓았다. 샤넬은 미시아의 행동에 아연실색해서 미시아에게 그만두라고 애원하곤 했다. 샤넬의 간청은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고성을 지르고 머리끄덩이를 쥐어뜯는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7.'보그'에 실린 안티고네:샤넬이 모더니스트 무대 의상을 만들다.
**안티고네--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의 딸
(290)발레 뤼스와 디아길레프:
샤넬처럼 디아길레프도 유명인사들의 마켓팅 파워를 활용할 줄 알았다. 디아길레프는 발레뤼스의 공연에 A급 손님들이 모인 호사스러운 파티같은 분위기를 더하려고 무료입장권으로 유명인들을 유혹했다.
(291)콕토는 발레뤼스에서 가장 먼저 샤넬에게 예술가로서 협업하자고 초대했다./콕토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급진적으로 각색한 그의 새 연극에 의상을 제작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샤넬이 반했던)피카소가 세트를 디자인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는 샤넬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샤넬은 즉시 콕토의 제안을 수락했다.
--자수성가의 신화이자 여왕처럼 위풍당당한 인물이 된 코코 샤넬은 이제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인 왕족에게 입힐 옷을 만들 예정이었다.
(292)콕토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과잉으로 여겨지는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작품의 표면 아래 숨어있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빠르게 전개되는 극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는 원작의 길이를 과감하게 줄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콕토는 소포클레스의 희곡을 샤넬 스타일로 변신시켰고, 원작을 축소해서 더 세련되고 근대적인 희곡을 완성했다. 콕토의 안티고네 공연은 막이 오른 지 40분만에 끝났다.
샤넬의 날렵하고 단순한 의상은 연극을 한층 더 근대적으로 만들었다.--1922년 12월 20일에 몽마르트르의 테아트르 드 라틀리에에서 초연한 '안티고네'의 의상은 샤넬의1922년 가을/겨울의 컬렉션과 너무도 흡사했다.
(295)안티고네의 의상:
동생보다 성격이 더 강인하고 사나운 주인공 안티고네는 더 드라마틱한 의상을 입어 마땅했고, 안티고네가 입은 특별한 망토는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샤넬은 밤색과 갈색으로 그리스 도기의 무늬를 복잡하게 짜넣은 염색하지 않은 원모를 손으로 뜨개질해서 안티고네의 망토를 완성했다.
(299)'보그'에 실린 안티고네:
이 중성적 색조의 양모 드레스는 수세기 후에 재발견된 고대 옷이라는 인상을 준다. 재단은 각 배역의 성격을 부각하고 망토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딸을 기묘하게 감싸는 듯하다. 샤넬은 여전히 샤넬이면서도 고대 그리스인이 되었다. 그녀의 비범한 의상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302)사교계 사람들은 샤넬 때문에 공연을 보러 왔다.---소포클레스는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샤를 뒬랭
**샤넬의 쿠튀르 의상--상류층에게 개성을 표출할 수 있도록 맞추어진 옷을 뜻한다(맞춤복?)
(305)샤넬은 특정한 공연을 제작해야 한다는 역사의 요구에 어느 정도 굴복했지만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샤넬 룩'을 마법처럼 불러내기 위해 언제나 자기 안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충분히 포함했다.
(307)샤넬이 연극 의상을 현대적으로 바꾸었듯, 콕토는 오르페우스 이야기에서 '오랜 세월이 흐르며 생긴 고색'을 제거했다. 샤넬의 골프 복장과 이브닝드레스는 즉시 고대 그리스신화를 가장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콕토는 고전을 근대적으로 수정하고 이야기에서 새로운 인물을 여럿 투입했지만, 고대 그리스의 전설이 품고 있는 정신에 충실했다.
(309)블루 트레인:
디아길레프는 '블루 트레인'을 제작하기 위해 가장 재능이 뛰어난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콕토가 대본을 썼고, 피카소가 무대의 막에 그림을 그렸으며, 건축가 앙리 로랑스가 입체파에서 영감을 받아 기울어진 해변 오두막 세트를 디자인했다. 그리고 다리우스 미요가 음악을 작곡했고, 브로니 슬라바 니진스카가 안무를 고안했다./1924년 6월 초연
**블루트레인--1922년 개통한 호화열차/칼레---지중해 급행열차/객실 전체가 일등석 침대칸/식당은 5성급/단골 승객엔 윈스턴 처칠, 스콧과 젤다 피츠제럴드 부부, 콜과 린다 포터, 찰리 채플린, 영국 왕세자 그리고 샤넬과 콕토 등이 있었다.
8.벤더: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내
(315)1923년 둘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 샤넬은 40세였고 공작은 44세였다. 웨스트민스터 공작에게는 매력적인 면이 많았다. 무엇보다도그는 보이 카펠처럼 영국인이었다.
그리고 보이 카펠 집안과 웨스트민스터 공작 집안과는 혼인 관계에 있었다.
(316)샤넬은 이 사실을 두고 웨스트 민스터 공작은 보이 카펠이 하늘에서 보내준 선물이 틀림없다고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했다.
---웨스트 민스터 공작은 세속적인 매력도 갖추었다. 그는 샤넬이 만났던 짝 중 가장 부유한 남자였을 뿐만 아니라, 대영제국에서 제일 부유한 남자였다. 어쩌면 유럽 전역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였을 수도 있다. 그는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광대한 부동산은 물론 고향 체셔 이튼 홀을 지나는 이튼 철로까지 물려받았다. 샤넬은 드미트리 로마노프대공과 연애하면서 황후가 되는 꿈을 꾸었지만, 바람은 허사로 돌아갔다. 이제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연애하며 공작부인이 되기를꿈꾸었고, 가능성은 커 보였다. 공작의 세계를 파괴하거나 지위와 신분을 박탈하는 혁명은 벌어지지 않았고 공작을 역사라는 태피스트리에 짜넣는 금실을 잘라 버릴 불의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작이 태어나면서 얻은 굉장한 재산과 권력은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었다.
--공작을 '벤더, 벤, 베니'라 부른 까닭은, 선조가 14세기에 사용했던 문장에서 새겨진 왕실의 모토 'azure a bend d'or'(황금 띠를 두른 파랑)에서 기원했다.
원래는 경주에서 우승한 말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아이에게도 같은 이름을 썼다.
4세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재혼한 남자는 너무 젊어서 벤더는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웨스트민스터 공작1세, 공작1세의 할머니는 빅토리아 여왕)
(318)188cm의 장신에 건장한 체격, 금발과 파란 눈동자, 바닷바람을 맞으며 햇볕에 그을린 피부까지, 노엘 카워드가 '장밋빛으로 빛나는 미남'이라고 묘사했던 벤더는 폴로와 골프, 사냥에 뛰어났고 요트챔피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업에는 뛰어난 소질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통 정도밖에 안 되는 성적으로 이튼스쿨을 졸업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려던 계획을 접고 그 대신 군대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321)벤더는 운동선수로서, 군인으로서 업적을 쌓으면서도 오랫동안 다양한 여성과 연애사업을 벌였다. /1901년 쉴라와 결혼, 18년간의 삶이 대체로 불행했다. 네살배기 아들이 죽고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역시 아들을 얻지 못한 채로 간통 현장을 들켰다, 몬테카를로의 오텔 드 파리에서.
(322)오텔 드 파리는 벤더에게 더 의미있는 낭만적 만남의 장소가 되어 주었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코코 샤넬을 만났다. 1923년 크리스마스 휴일 기간에.
(323)(벤더가 자기 사촌을 통해서 샤넬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을 때)샤넬은 주저했다.그녀는 컬렉션과 발레 뤼스의 '블루 트레인' 의상을 제작하느라 바빴다. 게다가 샤넬은 벤더가 유명한 바람둥이라는 사실도, 그의 정부가 수두룩하다는 사실도 잘 알았기에 벤더의 애인 목록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촌의 기분이 상할까봐 초대를 받아들였다.
(324)샤넬은 자기가 벤더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던지 드미트리 대공을 동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밤 벤더는 샤넬에게 푹 빠져 버렸다. 그는 샤넬처럼 극히 독립적이고 카리스마 강한 여성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었다. 게다가 샤넬은 가장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던 평민이었다.
(꽂과 보석으로 물질공세를 퍼부었지만 샤넬은 냉정했다)
(325)그녀는 평판이 아주 끔찍했던 이 유부남을 미심쩍게 생각했다.샤넬은 첩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고 아무리 화려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샤넬이 거절할수록 벤더는 더 매달렸다.
---결국, 샤넬은 예술가 친구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자리에 벤더를 초대했다. 그날 저녁은 실망스럽게 끝났다. 벤더는 근대미술이나 음악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고 대화에 거의 끼지 못했다. 무지를 인정할 사람도 아니었고 지적 호기심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던 벤더는 오히려 거들먹거렸다. 그리고 콕토에게 자기가 기르는 개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돈을 더 벌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다. 샤넬의 친구들은 오만하게 구는 샤넬의 새 구애자에게 화가 나서 발끈했다.
(326)하지만 벤더의 매력이 샤넬을 무장해제시켰다. 1924년 봄, 요트에 초대된 샤넬은 별이 수 놓인 밤하늘 아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에 맞춰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
(327)벤더와 샤넬이 기장 자주 방문했던 곳은 샤토 드 울자크였다.
주변에 펼쳐진 숲에는 야생 사냥감, 특히 야생 돼지가 많았다.
샤넬은 이곳에서 사냥 기술을 갈고닦았고 살바도르 달리, 찰리 채플린, 앤서니 이든 경,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같은 저명한 손님들도 자주 성에 방문해서 함께 사냥을 즐겼다. 또 샤넬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윈스턴 처칠을 만났다. 벤더와 처칠은 보어전쟁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고 정치적 견해는 서로 달랐지만 평생 가까운 친구로 남았다.
처칠은 샤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서, 어느 주말을 샤토 드 울자크에서 보내고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샤넬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유명한 코코가 나타났고 나는 그녀가 아주 좋아졌소. 베니가 이제까지 만나본 여자 중에 가장 능력있고 쾌활하고 개성이 강한 여성이오. 그녀는 온종일 정력적으로 사냥하고 저녁식사를 든 다음 자동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가오."
(328)벤더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발휘:
샤넬 회사 직원들에게 미미장의 집을 휴가지로 제공하겠다는 벤더의 뜻을 받아들여 샤넬은 직원들에게 유급 휴가제도를 시행한 최초의 디자이너 중 하나가 되었다.
(337)반유대주의:
(샤넬과 벤더는 친나치, 반유대주의였다.)벤더의 친나치 활동은 1930년대 내내 점점 활발해졌다.
그는 유대인을 매도하고 독일인을 찬양했다.--그리고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전부 유대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344)리틀 블랙드레스:
전통적으로 검은색은 하인의 제복이나 상복에만 사용되던 색깔이었다. 그녀는 1920년쯤부터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고, 야단스럽고 극적인 색깔 옷을 입으면 자기가 아파 보인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른 색깔은 불가능해요. 저는 이 여성들에게 망할 검은색 옷을 입힐 거예요."보이 카펠이 세상을 뜨고 겨우 1년 뒤, 샤넬은 상복색깔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1926년까지 단순한 검은색 드레스 시리즈 전체를 완성했다.--패션계 언론은 우아하고 단순한 검은 드레스를 보고 감탄했다.
"샤넬은 검은색 시폰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것도 없지만 걸작인 이 드레스로 명성을 얻었다."'보그'가 찬사를 쏟아냈다.
--샤넬의 가르손 스타일은 그녀가 모더니티의 화신이라는 평판을 확고하게 굳혔다. 그리고 1926년 10월, '보그'는 이제 우리가 '리틀 블랙드레스'라고 부르는 옷,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무한히 복제할 수 있으며 무한히 세련된 이 옷을 "샤넬의 '포드', '앞으로 전세계 여성이 입을 드레스"라고 극찬했다.
(356)라 파우사La Pausa:
1928년~1929년, 샤넬이 벤더와 살기 위해 지은 집/'라 파우사'는 기독교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예수가 못 박힌 후 도망나온 막달라마리아가 올리브 그늘에서 쉬었던 곳)/지금은 순례자들이 찾아옴/코트다쥐르의 로크브륀 언덕에 있다/1920년대 후반,전세계 최고급 부동산 지역/처칠이 즐겨 방문함/건축가 로베르 스트레이츠와 엔지니어 에드가 마지오르가 설계함/샤넬은 스트레이츠에게 오바진 수녀원을 어느 정도 모델로 참고해 달라고 요구했다. 샤넬이 특히 강조했던 부분은 드라마틱하게 꺾어지는 석조 계단이었다./36000제곱미터의 대지, 건물면적 939제곱미터, 핸드메이드 기와 2만 장, 백 년 된 올리브나무 20그루, 색색의 꽃들, 실내는 전형적 코코 샤넬 스타일로 크림색의 벽, 단출한 가구,건축비는 600만 프랑/저택 현관의 조명은 웨스트민스터 가문의 문장에 등장하는 왕관으로 장식함/"이제까지 지중해 해안에 들어선 수 많은 건물 가운데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저택 중 하나"라고 '보그'지는 말했다./'라 파우사'의 관리인은 러시아 망명 귀족 카스텔란 제독/훗날 '라 파우사'는 처칠의 출판 대행인이었던 에머리 레베스가 사들임
(368)벤더와 샤넬의 불화:
(벤더의 바람기가 도져서 샤넬과 다툼이 있을 적마다 벤더는 보석을 사과의 표시로 선물했다. 심지어는 값을 메길 수 없는 에메랄드를 선물 받고는 샤넬은 이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369)디아길레프의 죽음:
1929년 8월19일, 베네치아에서 57세의 나이에 당뇨합병증으로 사망/이 날은 샤넬의 생일이기도 하다/샤넬은 왕에게 걸맞는 장례식을 열고 비용을 댔다./묘지는 베네치아 총독들이 묻혀 있는, 산 미켈레섬에 안장됐다/
(샤넬은, 디아길레프가 그녀를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해 준데 대해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370)벤더와의 결별:
벤더는 절대 샤넬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에게 아들을 안겨줄 새로운 아내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다.1929년 말, 샤넬과 벤더의 관계가 끝났다.
샤넬은 피에르 르베르디에게서 위안을 찾고, 50세의 벤더는 겨우 두 달 전에 만났던 27세의 영국 귀족, 로엘리아 메리 폰슨비와 약혼했다.
9.럭셔리의 애국심:샤넬과 폴 이리브
(375)부자 샤넬:
샤넬은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하나가 되었고, 사업으로 매해 1억 2천만 프랑을 벌여들였다. 향수 공장과 방직 공장을 하나씩 소유하고 있었고 그녀가 꾸린 스튜디오 26군데에서 일하는 직원은 2400명에 달했다. 당시 샤넬의 개인 재산은 주식과 여러 국가에 퍼져있는 투자 지분까지 포함해서 1천5백만 프랑이었다.
(377)폴 이리브:
(그동안의 연인들과 달리 볼품 없는 외양을 지녔다.)
땅딸막했고 틀니도 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브는 재능 있는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였고 자신감 넘치는 기지로 가득했으며, 여성을 열렬히 찬미했고 여성을 너무도 잘 알았다.(그는 이미 두 번째 아내와 살고 있는 유부남이었으나 샤넬의 등장 이후 이혼하고 미국으로 가 버렸다)
(379)1931년 샤넬 나이 48세 때 코코 샤넬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약혼을 했다./이리브는 샤넬이 파리에 도착한 첫날부터 찾아헤맸던 무언가를, 돈과 예술적 명성, 심지어 귀족 작위보다 더 고상한 것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폴 이리브는 코코 샤넬을 알레고리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아이콘으로 바꾸어 놓았다. 샤넬에게 이보다 더 매혹적인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이리브는 샤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알레고리: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
*아이콘:우상시 되는 인물, 상징
*일러스트레이터:삽화가
*쿠튀리에:couturier:남자 패션디자이너
*티아라tiara:보석을 박은 여성용 머리 장식 또는 관(冠)
*오트 쿠튀르:최신 유행의 고급 여성복./파리의 고급 의상실.
(387)이리브의 전성기:
헐리우드에서 영화감독 세실 드밀을 위해 6년간 의상과 세트를 디자인함/그곳에서 의상디자인을 가르쳤고 정기적으로 '보그'에 글을 기고했다./그곳에서 부유한 아내까지 만나 초호화생활을 누림/1922년 '십계'의 예술감독을 맡음/교만함이 지나쳐 실직하고 파리로 옴/실의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함
(389)샤넬이 본 폴 이리브:
점점 높아지는 나의 명성 앞에서 점점 시들어가는 그의 영광은 빛을 잃었다. 이리브는 나를 파괴하고 싶다는 은밀한 희망을 품은 채 나를 사랑했다.
(390)샤넬의 미국행:
1931년 4월, 골드윈의 초청으로, 그레타 가르보를 앞세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미국에 입성했다./골드윈이 제작한 영화 세 편의 의상을 맡았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영화사는 색상이 절제되어 있고 선이 단순한 샤넬의 의상이 스크린에서 '눈에 딱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96)샤넬은 일종의 스타일 민족주의자였다. 그녀는 자기의 스타일이 프랑스인 전체를 위한 유일한 제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몹시 흥분했다. 샤넬은 성공이나 부,명성 이상의 것을 갈망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상징이자 프랑스를 위한 상징이 되고 싶었다./샤넬은 황후가 될 수 없었고 공작의 후계자를 낳을 수 없었지만 모두 정확히 자기처럼 옷을 입는 프랑스(와 유럽과 미국)여성이라는 종족을 낳을 수 있었다.
샤넬과 이리브는 드비어스에서 의뢰받아 다이아몬드 주얼리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가장 중요한 공동작업을 계획하면서 가까워졌다.
(402)리츠호텔:
샤넬은 이리브의 비위를 맞춰 주려고 리츠호텔 스위트룸을 빌렸다.
객실을 완전히 새롭게 꾸며 호화로운 장식과 바로크 요소로 가득한, 아늑하고 우아한 보석상자로 만들었다. 이후 리츠호텔은 샤넬이 평생 파리에 머물 때면 찾는 주요 거처가 되었다.
(405)'뉴욕타임즈'에 난 샤넬의 약혼 기사:1933년11월27일/"웨스트민스터 공작에게 실연 당한 마드무아젤 샤넬이 동업자와 결혼하다"
(421)이리브 사망:1935년 9월 25일/라 파우사로 샤넬을 만나러 온 이리브는 중증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10.역사의 박동:샤넬과 파시즘,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시절
*코르티잔--과거 유럽에 존재했던 귀족 및 왕족, 부자같은 상류층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이자 이들의 정부(情婦)를 뜻하는 말.
(424)샤넬의 戰時 활동:
온세상은 샤넬이 스파츠와 가벼운 연인관계였다는 사실도, 그녀가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실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샤넬은 나치에서 암호명과 요원번호를 부여받기까지했다./**스파츠--한스 귄터 폰 딘클라그 남작/나치 친위대 정보장교/리츠호텔에 머묾
샤넬에 우호적인 전기작가는, 샤넬의 죄가 판단력 부족뿐이라고, 국적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근사하고 더 젊은 남성에게 홀딱 반한 죄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대단히 존경받는 피카소와 거트루드 스타인조차 널리 나치에 협력했다고 알려졌다.
(426)샤넬리즘--샤넬은 하나의 개념이자 운동, 삶의 방식이 되어 있었고, 유럽과 미국의 여성 수백만 명이 즉시 알아볼 수 있는 시각적 참고 대상과 연상이 모인 성좌가 되어 있었다. 그 세계는 신화적인 지대였고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이 세계관을 샤넬리즘이라고 부르자, 결국, 샤넬리즘은 정치적 미학이 되었다. 이 미학의 영역은 파시즘의 이념 작업과 공명했으며 심지어 파시즘의 사상을 영속시켰다. 하지만 샤넬리즘은 기본적으로 샤넬의 인생, 샤넬의 심리와 취향, 샤넬의 친구와 동료,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해가던 시절에 샤넬이 깊이 빠져 있던 환경에서 자라났다.
(427)코르티잔은 자유롭다?:
샤넬에게 일종의 애인이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샤넬은 주얼리 사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주얼리 디자이너 풀코 디 베르두라 백작과 1930년대 중반에 잠시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1935년엔 29세의 루키노 비스콘티에 빠짐
(428)파시즘에 매료된 예술가들:파시즘은 예술가들 뿐 아니라 상류층에게도 매력을 발산했다. 코코 샤넬도 그 중의 하나였다.
(429)1935년 라 메종 샤넬은 변함없이 광대한 제국이었고 직원 수가 4천 명에 이르렀으며 한 해에 의상 2만8천 벌 이상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국의 경쟁자들이 그녀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프랑스의 마르셸 로샤스,
미국 출신의 맹보쉐,
이탈리아인 엘자 스키아파렐리-
(430)파리에는 또다시 전쟁이 닥쳐올 것처럼 보였고 시민들은 갈수록 불안에 떨며 침울해 했다. 그러자 코코 샤넬만의 특징인 절제는 다시 한 번 완연한 애국으로 보였고, 샤넬의 스타일은 동료 디자이너 사이에서 일종의 표준이 되었다. 고객의 의향을 살펴본 프랑스 디자이너들은 갈수록 착용성과 실용성, 그리고 단정함에 집중했다. 모두 샤넬과 관련 있는 것으로 잘 알려진 특징이었다.
"패션계는 샤넬의 단순함이 지배하던 위대한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1937년에 '보그'가 선언했다.
(431)戰時 中 프랑스인들의 실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수년 동안, 프랑스인은 대체로 독일 점령군과 나치에 장렬하게 저항했다는 일반적 통념이 퍼졌다. 하지만 진실은 훨씬 더 애매했다. 프랑스의 국가질서가 완전히 뒤집혀서 파시스트 국가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확실히 프랑스의 수많은 영역에서 환영받았다.
**파시즘--모든 국가주의적 전체주의 운동이나 그 정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유래했다.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국가의 절대 우위이다.
(434)"저는 오직 유대인과 중국인만 두려워해요. 그리고 유대인이 훨씬 더 두려워요"--샤넬
(439)파업을 바라보는 샤넬의 시각:
3주간 문을 닫은 끝에 샤넬도 직원의 요구 일부를 받아주었으며 마침내 파업도 끝났다./그녀는 파업이 정치활동이 아니라 질병, 집단 광기라고 생각했다./심지어 샤넬은 파업을 천박하고 숙녀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다./샤넬은 고압적으로 행동한 탓에 직원과 껄끄럽고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라 메종 샤넬의 직원들은 샤넬의 멸시를, 또는 샤넬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한 명이 될 수 있게 도와줬던 사람들의 분투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무심하게 구는 태도를 결코 잊지 못했다.
(439)리츠호텔 시절:
배타적 특권을 누리는 세계/샤넬의 세계에는 귀족, 억만장자, 나치 부역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샤넬은 이들 덕분에 상류층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더 확실하게 받았다./드미트리 대공은 히틀러 지지자로 알려진 바실리 비스쿠프스키가 이끄는 무리에 합류했다. 총통 그 자신도 드미트리와 직접 서신을 주고받았다./웨스트민스터 공작은 수많은 영국 왕족처럼 제3제국과 사회적 유대감을 느꼈고, 친나치조직에 협력했다.
(440)윈저공과의 인연:
왕족과 맺는 인연을 언제나 황홀하게 생각했던 샤넬은 왕세자가 자기와 연애하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어쩌면 샤넬이 그런 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다--작가의 짓궂은 재치!)/(결혼에서는 밀렸지만)윈저공작과 공작부인이 된 에드워드와 윌리스는 계속해서 샤넬과 가깝게 지냈고, 샤넬은 세련되기로 유명한 공작부인의 의상을 많이 디자인했다. /공작부부는 히틀러와 허물없이 친밀한 사이였다
(446-448)파시즘의 얼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단 하나의 표정으로 매끄럽게 조종된 동작을 선보이고 한결같은 목소리로 조화로운 환호성을 외치는 균질한 전체가 되도록 조종했다. 군중은 똑같은 옷을 입고 그 수가 끝없이 늘어나는 인간 집단의 덩어리가 되었다.
(450)파시즘 신화:
파시즘은 프로젝트의 막대한 규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야기를 제시해야 했다. 그래서 나치당 관계자들은 '파시즘 신화'를 공들여 만들었다. 장엄한 휘장으로 정치적 의도를 가리려 했던 나치는 고대문화에 의지하며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를 빌려오고 고전예술과 문학을 그들 자신과 결합했다./파시즘이 고쳐 쓴 역사에서 고대의 헬라스 민족은 지상에 가장 먼저 나타난 유럽의 우월한 백인, 아리아 민족을 상징했다. /유럽의 문제를 해결하고 오랫동안 잃어버린 활력을 되찾으려면 우생학을 기본으로 삼은 접근법이 필요했다. 즉 유럽대륙을 오로지 아리아민족으로만 채우고 유럽을 오염시키는 저열한 인종을 제거해야 했다.
(세계에서 똑똑하기로 알아주는 독일사람들이, 왜 그 어릿광대(이 아시아 끝 동쪽나라에서 보기에)같은 인물에 놀아났나 하고 늘 궁금했는데 여기 어느 정도 답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이토록 어마무시하게 두꺼워도 한번 펼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이유가 많이 있다)
(452)파시스트 남성:
고대 그리스 청년과 전사 조각상을 모델로 삼았다./성적 매력을 부여했다./파시즈의 완벽한 본보기인 강인하고 아름다운 그리스-아리아 전사는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반대인 사람들, 폴 모랑이 '해충'이라고 부른 사람들, 즉 유대인과 뚜렷하게 대조해서 자기 자신을 정의했다. 금발과 푸른 눈, 근육질 체형과 남성미를 갖춘 파시스트 남성은 사내다운 미덕의 화신이었다.
(453)파시스트의 제복:
의복의 강력한 힘을 분명하게 알았던 파시즘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제복을 만들었고, 특히 장교의 군복은 이탈리아와 독일 밖에서도 찬사를 얻었다. 심지어 미국도 적군의 제복이 아름답다고 여겼다./파시즘의 제복 아래 숨은 신화는 제복에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더했고 이 매력은 군인을 바라보며 감탄하는사람들 뿐만 아니라 군인조차 유혹했다.
(457)스와스티카의 위력:
단 하나의 그래픽 기호 아래 온 나라를 하나로 묶은 스와스티카는 부적처럼 변했다. 어디에서나 볼 수있는 패션 액세서리로서 스와스티카는 당을 향한 충성심을 상징했고 누구나 마법같은 권력의 핵심층에 접근하도록 허락했다.
*스와스티카 휘장--등각십자가(卍字)
(464)어떤상황에서도 건재한 샤넬왕국:
샤넬은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아우라를 얻었다. 샤넬의 권력과 명성, 영향력, 언론 주목도를 보면 그녀가 군중에게 최면을 걸어 전유럽에서 숭배자를 모은다고 말할 만했다. 그녀는 프랑스 국민의 상징이자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의 상징이 되었다.
(489)저는 주변부에 계속 머물러 있거나 다른 사람들의 세상 속 일부가 되는 대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었어요.
(491)샤넬과 파시즘:둘다 새롭고 혁명적인 존재를, 즉 '파시스트 남성'과 '샤넬 여성'을 창조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샤넬과 파시즘 모두 귀족 신분이라는 덫(휘장, 메달,제복)을 쳐놓고 추종자를 유혹했다. 아울러 젊음과 건강한 육체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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