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는 국보 67호이며 초고 7권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음
이순신 지음/이민수 역/범우사/1984년10월 초판1쇄/2000년12월 3판1쇄/219쪽/읽은 때 2022년8월8일~8월13일
(지금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이순신 영화 시리즈 3편 중 제2편 '한산-용의 출현'을 보았다.
鶴翼陣 전술로 대승을 거둔 한산도 대첩을 보여준 영화다. 최민식 주연의 1편도 170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는데 2편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우리 민족의 '이순신 사랑'은 동과 서가 따로 없고 세대차도 없고 빈부의 차도 없다.모두가 순수하게 '성웅 이순신'을 사랑한다.
이런 장수의 후손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어찌 그분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이순신(1545.3.8~1598)본관은 덕수(황해도)/조선 중기 무신./서울 건천동에서 출생(명보극장 앞)/32세에 무과에 급제,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됨/1587년, 이일의 모함으로 백의종군하게 됨/45세에 고사리첨사에 이어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1591)에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됨*좌수영=여수*유성룡의 천거/48세에 임진왜란(1592.4.14)이 일어나 전 국토가 유린되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함/이때 이순신은 여러 해전에서 전승을 거두어 재해권을 장악함/49세 때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수군통제사가 됨/52세(1596)때에도 모함을 받고 투옥,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탁의 반대로 출옥, 53세 때 명량대첩을 이룸*이 사이,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大敗하고 戰死함/54세 때(1598) 노량해전에서 전사함/15년 뒤 영의정에 추증됨/1634년 3월 28일 인조21년에 '忠武'란 시호가 내려짐
(이 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장군이 전사한 1598년까지의 7년 전쟁의 역사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하늘로 날을 삼고 땅으로 씨를 삼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공로를 가졌다)고 했다.*진린은 1598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의 도독이었다.
또 왜의 학자 도쿠토미도 이순신의 戰死를 평하여,
"그는 이기고 죽었으여, 죽고 이겼다. 전쟁의 전후 7년 사이에 조선의 策士,辯士,文士의 유는 많지만, 전쟁에 있어서 오직 한 사람 이순신만을 자랑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 전쟁에 있어서 비단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3국(조선 중국일본)을 통하여 실로 제 1의 영웅이었다."고 했다.
1.임진년(1592.1.1~8.27)
-진중에서 읊음-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쪽에서 위태로운 몸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함에 용이 느끼고
산천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른다면
내 한 몸 이제 죽는다한들 사양하리요
(16)鎭撫:난리를 일으킨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함(여기서는 직책 이름인 듯)
---방답의 兵船軍官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렸다.(옛날엔 어른들도 볼기를 맞았다!)
虞侯[첨사 밑의 벼슬]와 假守[잠시 대리하는 태수]들도 역시 이렇도록 심하게 보살피지 않았으니 몹시 해괴한 일이다. 한갓 제몸 살찌울 것만 일삼고 딴 일은 이렇게 돌보지 않았으니 다음날 일을 또한 짐작할 만하다.(사리사욕을 탐하는 관리들의 양태는 500년 전이나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 없으니,인간의 한계인가 보다.이순신의 근심이 깊었겠다.)
(17)貶論-- 다른사람을 깎아내려 헐뜯음
(19)2월10일:통사들의 만행
김인문이 순찰사의 營에서 돌아왔다.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通事[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거짓 고해서 군사의 동원을 청하는 일이 생기기까지 했다. 비단 이런 일뿐이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무슨 딴 생각이 있는가 의심하게까지 만들었으니, 그 흉악스럽기가 이를 데 없다. 통사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해괴스럽고 통분하기를 이길 수가 없다.
(22)蛇渡(=呂島:고흥군 점암면)에서 전선을 點考하니, 이곳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제일 잘못 되었는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라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도 하지 못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이순신도 술을 좋아하나 보다.일기에 거의 매일 술을 마신다는 기록이 있다.물론 동헌에 나가 일을 보고, 점고를 하고, 전선을 둘러보고,매일 활쏘기를 거르지 않는다.)
(23)저물녘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는데 좌의정(유성용)이 보내는 편지와 '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가지고 왔다. 책을 보니 海戰ㆍ육전ㆍ화공전 등 여러 가지에 대한 것을 일일이 설명했는데, 실로 萬古의 奇書다.
(서울에 80년 만에 큰비가 내려 뉴스시간에 떠들썩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난중일기'에도 음력 3월이건만 큰비가 자주 내리고 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당시에도 홍수 피해, 가뭄 피해는 이어지고 있었나 보다)
(30)1592.4.16 밤10시경에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즉시 장계를 띄우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31)1592.4.20 영남관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많은 적병이 올려와 막아낼 길이 없고 승승장구하여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는 것 같으니, 전함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후원해 주도록 조정에 장계해 달라"는 것이었다.
(33)1592.5.3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적의 소식을 듣고 자기 집으로 도망한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陣中에 매달았다.
(34)1592.5.29 泗川 해전의 승리:
사천에 쫓아가 보니 왜놈들은 벌써 상륙하여 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밑에 매어놓아 항전할 태세가 매우 견고하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고 명령하여 일시에 달려들어 화살을 비오듯이 쏘고 여러 가지 총을 바람과 천둥같이 쏘아 보내니 적들은 두려워서 물러가고, 화살에 맞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왜적의 머리를 벤 것도 많았다. 군관 나대용이 이 싸움에서 탄환을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했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쏘는 군사와 노젓는 사람 중에 역시 탄환에 맞은 자가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살라 태우고 물러왔다.
(36)1592.6.2 당포 해전의 승리
아침에 떠나서 바로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이 벌려서서 정박하고 있다.이를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 만하다. 배 위에 누각이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버티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에 片箭과 대소 勝字銃을 비오듯이 어지러이 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쓰러진다. 모든 왜군들은 일시에 놀라 흩어지는데 우리 여러 장졸들이 일시에 활을 쏘니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자 그 수를 알 수 없었다.이 싸움에서 모조리 섬멸시키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이윽고 왜적의 큰배 20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를 덮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 도망하여 介島[추도]로 들어갔다.
(36)1592.6.5 당항포 해전
아침에 떠나서 고성 당항포에 이르니 왜선 한 척이 크기가 판옥선 만하고 배 위에는 누각이 높다란데, 소위 장수라는 자가 그 위에 앉아 있다. 그밖에 중선이 12척이요, 소선이 20척이나 된다. 일시에 쳐서 깨뜨리니 화살이 비오듯 하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자 그 수를 알 수 없고, 왜장의 목도 일곱이나 벴다.나머지 왜병들은 육지에 올라 달아났지만 그 수는 몹시 적었다. 이로부터 군대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38)1592.6.7 율포해전
아침에 떠나서 永登(거제시 장목면)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이 율포에 있다고 한다. 복병선을 시켜 가서 탐지케 했더니, 적선이 먼저 우리 군사가 온다는 것을 알고 남쪽 큰바다로 달아났다고 한다. 우리 여러 배가 일시에 쫓아가서, 사도 첨사 김완이 1척을 온전히 사로잡고, 우후가 1척을 온전히 사로잡고, 녹도 만호 정운이 1척을 온전히 사로잡았다. 왜적의 머리는 도합 36개였다.
2.계사년(1593)
-무제-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가슴
살을 에이는 양 쓰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우노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제갈량 중원회복 어찌 했던고
재우치던 곽자의 그립구나.
몇 해를 원수막이 해놓은 일들
이제와 돌아보매 임만 속였네
(47)1593.2.14 장수들의 추태
이른 아침에 본영 探候船이 왔다.아침 식사 후에 삼도의 군사가 약속하고 있는데, 영남 수사(원균)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전라 좌우도 여러 장수들과만 약속했다. 이때 우후가 술에 취해서 망령된 말을 했다. 그 못난 꼴을 어찌다 말하랴?於蘭[해남] 만호 정담수와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이같이 큰 적을 치려고 약속하는 때에 술을 몹시 마셔 이 꼴이 되니 그 사람됨이 더욱 말할 수 없다.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48)1593.2.16명나라의 개입:
늦은 아침에 센 바람이 불었다. 들으니 영의정 정철이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간다고 한다. 밤 一更쯤 신환과 김대복이 와서, 임금이 내린 글통과 부체찰사의 공문을 전한다.그 편에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개성을 치고 이달 초 6일에는 반드시 서울에 있는 적을 함락시킬 것이다."는 소식을 들었다.
(49)1593.2.22사화랑-웅천 해전
삼혜와 의능 두 僧將과 義兵 성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상륙하는 체하게 했다. 또 右道 여러 장수의 배들 중에서 시원치 않은 배들을 골라 동쪽 가로 보내어 역시 장차 상륙할 것처럼 속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한다.이에 전선을 합쳐서 일시에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되었다. 그런데 발포의 2호선과 가리포의 2호선이 명령없이 제 맘대로 돌입하다가 얕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당했으니, 그 통분함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조금 있자니 珍島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제할 수 없이 되었더니,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이때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서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통분하기짝이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수사(원균)에게 책망도 했지만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52)雌髥(자염):
(56)1953.5.4 어머님 생신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祝壽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니 평생 유감이다.
(날씨를 빠짐없이 기록한 것, 매달 1일 치러지는 望闕禮를 꼭 기록한 것, 늘 어머니를 생각한 것 등도 난중일기의 특징이 되겠다.)
(58)1593.5.13맑음. 잠 못 드는 밤
조그만 산등성이에 과녁을 치고 여러 장수들이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다투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민다.혼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닭이 울 때에야 겨우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輾轉反側 以心傳心 感情移入)
(59)선전관 박진종과 영산령 복윤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함께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한다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내가 우수사 이억기의 배에 옮겨 선전관과 이야기하면서 술을 두어 순배 돌리자 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하므로 모든 배 안의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 망측한 꼴은 입으로 말할수가 없다.
(글의 도처에 못마땅한 원균이 등장한다.이순신의 눈에 몹시 거슬리는 사람이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측한 행동을 하는 인물임에 분명하지만, 점잖은 이순신의 눈에 비친 원균은 실제로 어떤 인물일까 궁금하다.)
(61)5.21 오후 2시부터 비가 내려 농작물이 조금 소생하는 듯하다.이영남이 보러 왔다.원 수사가 거짓말로 공문을 만들어 돌려서 大軍이 동요했다. 軍中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어지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64)5.30 종일 비가 내렸다. 원 수사가 송경략이 보낸 火箭을 자기 혼자서만 쓰려고 계획했는데, 병사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자 공문도 보내려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하더라고 하니 가소롭다.--저녁에 조붕이 와서 얘기했다.남해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아가씨를 싣고 남이 알까 두려워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이같이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심지어 예쁜 여자를 싣고 놀다니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대장이라는 원 수사조차 역시 이러하니 어찌하랴?
(68)6.12 잠깐 비 오다가 잠깐 맑음. 아침에 흰 머리털을 10여 개 뽑았다. 흰 머리털이 있으면 어떠리오마는 다만 위에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밤 10시경에 변존서와 김양간이 들어왔다.행궁의 기별을 들으니, 동궁(광해)께서 편치 않으시다고 하니 걱정스럽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柳相(성룡)의 편지와 윤지사의 편지가 왔다. 종 갓동과 철매가 병으로 죽었다 하니 불쌍하다.
(73)7.1맑음 밤기운이 몹시 차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배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
(78)7.15 맑음. 가을 기운이 바다로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홀로 배 위에 앉아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이 뱃전에 비치니 정신이 맑아져서 잠 못 이루는 사이에 닭이 벌써 우는구나!
7.16 맑음. 저녁에 소나기가 오니 농사엔 흡족하다.몸이 몹시 불편하다.(이순신은 '몸이 불편하다'는 기록을 많이 남겼다. 持病이 있는지, 번민으로 인한 불면증 때문인지, 술병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7.21 맑음.경상 우수사와 정 수사가 와서 적을 칠 일을 의논했다. 원 수사의 하는 말은 몹시 흉칙하고 거짓스럽다. 사람됨이 이같은 데도 일을 같이 하자니 어찌 뒷근심이 없겠는가?
(이순신의 눈밖에 난 사람이었는데도 원균은 권율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3대 명장이라지 않는가)
(80)8.2 맑음. 염의 병이 어떤지도 모르겠고, 또 적을 치는 일도 쉽게 끝나지 않고, 내 몸도 무거워서 아침부터 밖에 나가 마음을 달랬다.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염의 상처는 종기가 되어 침으로 헤치면 고름이 흐르는 형편이니, 며칠만 더 늦췄다면 구할 길이 없을 뻔했다 한다.놀라고 탄식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은 조금 살아날 길이 있다하니 기쁘고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하랴. 의사 정종지의 은혜가 더없이 크다.
(84)8.28 맑음. 원 수사가 와서 음흉하고 간휼한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8.30 맑음.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보내고 다만 7,8척만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가짐과 일하는 꼴이 모두 이런 따위다.
(악연의 골이 깊다. 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소통을 했더라면 이순신은 덜 힘들었을 텐데~허기사 민주당과 국민의 힘더러 소통의 방법을 찾아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과도 같은 것일 테니--)
(86)9.14 종일 비가 오고 큰바람이 불었다.홀로 배 위에 앉아 있으려니 생각이 천갈래 만갈래다. 쇠로 만든 총통은 전쟁에 가장 필요한 것이건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만드는 법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더니 이제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냈다.이것은 왜총보다 더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해 보더니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제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내에서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좋겠다.
3.갑오년(1594)
-한산도의 노래-
한산도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91)1594.1.1비가 몹시 내린다.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훈련차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는 그치지 않는다.
(99)1594.2.9 맑음. 아침에 고성이 왔는데, 돼지를 가지고 왔다.그에게 당항포에 적선 왕래하는 것을 묻고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다니 장차 어찌 살 것인가를 물었다.(인육을 먹었다는 얘기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었나?)
2.12 맑음.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조카 분의 편지가 왔다.여기에 보면 선전관 송경령이 수군을 살펴 보기 위해서 들어온다고 했다. 오전 10시경에 적도로 진을 옮겼고 오후 2시경에 선전관이 도착했다. 諭旨 2통과 密旨1통 모두 합하여 3통인데, 그 중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10만 명과 은 300만 냥이 나온다는 것이요. 1통은 흉적들의 계획이 호남으로가려고 하니 힘을 다해서 지키고 형세를 보아 무찌르라는 것이다. 그중 밀지에는 "바다 위에서 해가 지나도록 나라를 위하여 애쓰는 것을 내 항상 잊지 않는다. 그러니 공이 있는 將士들로서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자들을 적어 올리라."는 것이다. 또 서울의 여러 가지 소식도 묻고 적들의 소문도 들었다. 領相[유성용]의 편지도 가져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시는 것을 들으니 감개하고 그리움이 한이 없다.
(101)1954.2.16 암행어사 유몽인의 비리:
아침에 흥양과 순천이 왔다.흥양이 암행어사의 비밀 장계 초안을 가져왔는데, 임실ㆍ무장ㆍ영암ㆍ낙안은 파면해 내보내고, 순천은 탐관오리로 의논이 되고, 그 밖의 담양ㆍ진원ㆍ나주목ㆍ창평 수령들은 잘못을 덮어주고 칭찬하여 장계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국가 일이 이렇고서야 절대로 평정할 이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해군 일족에 대한 일과 장정 네 명 중에 두 명은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몹시 그르다고 했다. 그러니 암행어사 유몽인은 국가의 급하고 어지러운것은 생각지 않고, 다만 눈앞에 당장 당한 일에만 힘쓰고 남쪽 지방의 거짓스런 말만 믿었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마치 岳穆에 대한 秦檜[중국 남송의 재상, 岳飛를 죽이고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약을 체결, 뒤에 간신으로몰림]의 일과 다를 것이 없다.국가를 위하는 아픔이 더 심하다.
(104)3.4 맑음. 새벽 배가 떠나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6척을 뒤쫓아 잡아서 불태워 없애버리고 猪島에서 2척을 불태워 없앴다. 소소강에 왜선 14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장과 원 수사가 함께 진격하여 토벌하도록 전령을 보내고 고성 경계 阿自音浦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105)3월7일 맑음.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이리저리 뒤치어도 편안치가 않다.아랫사람을 시켜서 패문을 쓰도록 시켰더니 글이 말이 아니다.원 수사가 손의갑을 시켜 만들어 보내게 했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병을 억제하고 일어나 앉아서 글을 만들어 정사립을 시켜 써서 보냈다.오후 2시경에 배가 떠나서 밤 10시쯤 한산도 진중에 닿았다.(장군은 왜 이리 늘 편찮으셨을까?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다.)
(106)3월 25일 맑음. 저녁에 여필과 회가 변존서 신경황과 함께 왔다.그 편에 어머님의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先山이 모두 산불에 연소되었는데도 아무도 이를 끄지 못했다 하니 지극히 애통한 일이다.
(107)4월12일 맑음. 巡撫御史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우수사와 경상수사 충청수사도 함께 와서 술 세 순배를 마셨다.원 수사는 짐짓 취한 체 광증을 부리며 무리한 말을 함부로 뇌까리니 순무어사도 괴이함을 금치 못한다.하는 짓이 이렇게 몹시 흉악하다.(千古에 남을 '亂中日記' 곳곳에 이렇게 원균을 誹謗하는 글이 보이니, 원균의 자손들도 민망하기 짝이 없겠다.)
(108)4월26일 맑음.병세가 몹시 중해져서 사람을 거의 알아 보지 못했다.
(109)5월1일 맑음. 아침식사 후에 사정에 올라가니 날씨가 아주 맑고 시원하다. 아침에 아들 면과 계집종 4명, 官婢 4명을 내 병시중을 하게 하려고 보내왔다.그러나 德만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내일 돌려보내라고 일렀다.
(110)5월9일 비.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회포가 산란하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여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이가 된 것만 같다.
5월16일 흐리고 가랑비가 오더니 저녁에는 큰비로 변하여 밤새도록 내린다. 집들이 새어 마른 데가 없으니, 이런 배에 있는사람들의 거처가 괴로울 것이 몹시 염려된다. 곤양이 편지를 보내고, 유정[사명대사]이 적진 중으로 왕래하면서 酬酌한 草記를 보내왔기로 내용을 보니 통분함을 참을 수 없다.
(122)8월30일 맑고 바람도 없음.
이날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중하다고 하니, 이미 생사가 결정났는지 모르겠다. 나라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딴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으랴? 그러나 세 아들과 한 딸이 어떻게 산단 말인가? 마음 아픈 일이다. 김양간이 서울에서 왔는데,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분개한 뜻이 많다.원 수사의 일은 몹시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고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니, 이것은 천고에 두고두고 탄식할 일이다.
(아내의 이야기가 처음 나왔다.원균의 이야기는 나올 때마다 장군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나 보다)
(122)9월3일 가랑비가 내림.
새벽에 密旨가 들어왔는데, "수륙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도 계획을 세워 적을 토벌하려고 하지 않는다."했다. 그러나 3년 동안 바다 위에 있었지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기를 결단하고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여 날을 보냈지만, 험한 곳에 웅거하여 소굴 속에 있는 적이어서 경솔히 앞으로 나가지 못할 뿐이다.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서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124) (吉夢)9월20일 바람은 계속되나 비는 멎었다. 홀로 앉아서 간밤 꿈을 생각한다. 꿈에 바닷속에 있는 외로운 섬이 달려가다가 내 눈앞에 와서 주춤섰다. 그 소리가 우뢰와 같아서 모두 놀라 달아나고 나만이 혼자 서서 끝까지 그것을 구경했다. 그 광경이 매우 장쾌했다. 이것은 왜적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내가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으니 이것은 내가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올라갈 징조다. 체찰사의 공문이 왔다.
4.을미년(1595-51세)
-한산도의 밤-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 너머로 칼과 활을 비추네
(133) 1월1일 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앉아 나라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새벽엔 여러 장수들과 色軍들이 와서 해가 바뀐 인사를 한다. 원전ㆍ 윤언심ㆍ 고경운 등이 와서 보았다. 색군들에게 술을 먹였다.
1월21일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장흥이 왔는데 그에게서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극히 형언할 수 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를 쓴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우습다.*1587년에 이일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함
(139)5월 29일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사직의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그만 공을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가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서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140)7월1일 잠깐 비가 내렸다.나라 형세가 아침 이슬같이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지 마음이 산란하다. 종일토록 누웠다 앉았다 했다.(지금의 나라꼴과 어찌 이다지도 닮았단 말인가)
(141)7월7일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음. 경상 우병사(김응서)에게 온 유지에, "국가의 화가 참혹하고 종묘사직의 원수가 남아 있어, 神의 부끄러움과 사람들의 원통함이 하늘과 땅에 사무쳤는데도 이것을 아직도 깨끗이 쓸어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이 하늘을 이고 있으니, 대체로 혈기 있는 자로서야 그 누가 팔뚝을 걷고 마음을 썩이면서 그놈들의 살을 저미고자 하지 않으랴. 그런데 卿은 적과 마주보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의 명령이 없는데도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무도한 말을 지껄이고 자주 사사로이 편지를 통하여 현저히 저들을 높이고 아첨하는 태도가 있어, 修好하고 화친한다는 말이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해서 부끄러움을 끼치고 혼란을 열어놓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이 죄는 군율을 적용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하고 돈독하게 타이르고 경고함이 정녕했다.그런데도 고집을 더 세우고 스스로 죄의 구렁으로 빠지고 있으니, 나는 보기에 몹시 해괴하고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에 비변사 낭청 김용을 보내서 구두로 내 뜻을 전하는 것이니 卿은 마음을 고치고 힘써서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말라."하였다. 이것을 보니 황송함을 이길 수 없다.김응서란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힘쓴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만일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
**김경서(金景瑞, 1564~1624)는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원래 이름은 김응서(金應瑞)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개명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성보(聖甫),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5.병신년(1596)
-무제-
아득하다 북쪽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론 신하 때 못 탄 것 한이로다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건질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 보낸 뒤
복건 쓴 처사 되어 살아가리라
(167)7월17일 새벽에 비가 뿌리다가 그쳤다.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일어나 홍산 원 윤영현이 붙잡히고, 서천 군수 박진국도 끌려갔다고 한다. 밖의 도둑을 없애지 못한 이 때에 안도둑이 이러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7월20일 맑음.탐후선 편에 들으니 충청도 도둑 이몽학이 포수 이시발의 총에 맞아서 즉사했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나무위키에서**
이몽학은 부하들의 손에 목이 잘려 살해당하고 부하들은 의병들과 관찰사들한테 이몽학의 목을 바쳐 항복하면서 그렇게 반란이 종결되었다./ 이몽학의 난으로 인해 이순신의 후원자였던 선조에게 의심증이 도져서 원균을 추켜세우기 시작하고 끝내 이순신의 파직에 이어서 칠천량 해전 크리까지 덤으로 터지고 말았다.
윤8월 24일 부사와 함께 가리포*로갔더니 우우후 이정충이 먼저 와 있다.함께 남쪽 망대에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볼 수가 있다. 참으로 한 도의 요충지다. 병영으로 돌아왔다.원 공의 흉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가리포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영산도 서쪽에 있는 해역이다.
6.정유년(1597)53세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인 동시에 영광의 한 해였다--
-죽은 군졸들을 제사하는 글-
윗사람을 따르고상관을 섬겨
너희들은 직책을 다하였건만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내게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그대들 혼을 한자리에 부르노니
여기에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1597년 2월 원균의 모함과 당쟁의 희생이 되어 파직, 서울로 끌려감/3월 4일 감옥에 갇힘/4월 1일, 28일 만에 특사되어 권율 도원수의 막하로 백의종군함**
(175) 1597년 4월1일 맑음.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가서 봉ㆍ분ㆍ울ㆍ사행ㆍ원경들과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해 준다.비변랑 이순지도 보러 왔다. 울적한 마음 더한층 이길 수 없다.기헌도 왔다. 모두 情으로 위로하면서 술을 권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억지로 마셔 취했다. 영의정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탁ㆍ판서 심희수ㆍ찬성 김명원ㆍ참판 이정형ㆍ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ㆍ동지 곽영들이 사람을 보내서 문안했다.(백의종군의 시기)
(176) (어머니의부음) 4월13일 맑음.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의 집에 들러 잠깐 이야기하고 있는데 울이 종 애수를 들여보내어 아직 배가 온다는 소식이 없다고 한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홍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홍찰방과 작별하고 홍백의 집으로 왔더니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음을 전한다. 뛰어나가 가슴을 치면서 뛰고 뒹구니 하늘의 해도 캄캄하다
즉시 해암(아산시 인주면)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다. 길에서바라보는 애통함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들을 만나러 오시다 배에서 돌아가심)
(177)4월19일 맑음.일찍 길에 오르면서 靈延*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었으나 무엇하랴?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일이 있으랴. 일찍 죽는 이만 같지 못하다.
*영연: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자리와 그에 딸린 물건들
4월28일 맑음.아침에 원수(권율)가 군관승경을 보내서 문안하고 또 전하기를, 喪中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한다.
5월5일 맑음.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마음)새벽 꿈이 어수선했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보았다.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 공의 잘못된 일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배반하므로 장차 형세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이 날은 단오절인데, 멀리 천리 밖에 종군하여 어머님에 대한 예절을 폐할 뿐만 아니라, 곡하고 우는 것조차도 역시 맘대로 하지못하고 있으니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보응을 당하는가? 나같은 일은 고금을 통하여 둘도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이다.
**원균의 칠천량 해전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과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조선을 재침략했다. 이때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했다.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했으나 일본수군의 교란작전과 풍랑으로 실패하고 거제도의 영등포로 후퇴했다. 조선 수군은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자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5일 밤 일본수군의 수륙양면 기습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이 해전으로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으며, 조선의 삼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졌다.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전한 후 이순신은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179)5월11일 맑음. 광양이 전 현감 김성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어서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에 왔다가 나를 보러 와서 근래의 소식을 많이 전했는데, 그 소식이란 모두 兇人(원균)에 대한 일이었다.
5월21일 (부정부패의 뿌리가 이리깊을 줄은--)맑음. 과천 좌수 안홍제 등이 李尙宮에게 말과 20세 되는 계집종을 바치고서 석방되어 갔다고 한다.안은 본래 죽을 죄도 아닌데 여러 차례 형벌을 받고서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된 것이다.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그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영혼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5월28일 흐림. 늦게 떠나 하동현에 이르니 그 고을 원 신진이 서로 만난 것을 반가워하고 성안 별사로 맞아 들여 간곡한 정을 베푼다.그도 원균의 미친 일을 많이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했다.
(184)원균이 왜와 싸우던 날의 꿈
7월14일 맑음. 새벽 꿈에 내가 체찰사와 함께 한 곳에 가 보니 시체들이 즐비한데, 혹은 발로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기도 했다.
7월16일 아침식사 후에 손응남을 중군에게 보내서 수군에 대한 소식을 알아오도록 했다. 그가 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경상 좌병사의 긴급 보고로 보아 우리에게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더라고 한다.---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4일에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이 되어 5일에 칠천량에 이르러 자고, 6일에 옥포로 들어갔다가 7일 새벽에 말곶을 거쳐서 다대포에 이르러 왜선 8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배들이 함께 돌격했더니, 왜병은 모두 육지로 도망하고 빈 배만 남아 있어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다가 불지르고 그 길로 부산 영도 밖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1000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오기에 서로 싸우려 했으나 왜선들이 피하여 흩어지므로 종시 이들을 섬멸시킬 수 없었고, 세남이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서생포 앞바다까지 표류하다가 육지로 오르려고 했으나 거의 다 적에게 죽고 세남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서 목숨을 보존하여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듣고 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해군뿐인데, 해군이 이와 같으니 다시 더 희망이 없다.거듭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7월18일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야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어 수군이 크게 깨졌다는 것이다. 듣자니 통곡이 터져 견딜 수가 없다.이윽고 이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밤10시까지 이야기했으나 별방법이 나지 않았다.나는 "내가 직접 해안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했더니 원수는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187)7월2일 맑음 점심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원 안위와 영등 조계종 등10여 인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는데, 경상 수사 배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는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육지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한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원과 새벽 2시경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이 생겼다.
8월 3일 맑음.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서 교서와 유서를 전하는데 내용을 보니, 삼도퉁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다. 숙배한 뒤에 받은 書狀을 봉해 올리고 곧 길을 떠나서 바로 두치로 가는 길을 거쳐 오후 8시경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에서 말을 쉬었다.
(190)8월12일 맑음.아침에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늦게 거제 발포가들어와 명령을 들었다.그 편에 배설(경상 수사)이 황급해하더라는 것을 들으니 괘씸하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권세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하여 제가 감당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국가 대사를 크게 그르치는 데도 조정에서는 이를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192)어란포(해남군 송지면)해전
--"오늘 밤에는 반드시 적의 습격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다."하고 재삼 타일러 경계하고 헤어졌다.밤 8시경에 과연 적들이 습격해 왔다.그들은 탄환을 많이 쏘아댔다. 내가 탄 배가 바로 앞장을 서서 *地字砲를 쏘니 강과 산이 모두 흔들린다.적의 무리들도 대항하지 못할 것을알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갔다 하면서 그저 포만 쏠 뿐이었다. 그러다가 자정이 넘자 아주 도망해 버렸다.
*지자포는 1446(세종 28)년에 개량된 화포의 하나. 장군화통, 일총통 다음으로 크고, 손으로 들고 사용할 수 있는 총 가운데 가장 크다.
(193)9월15일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해남군문내면)앞바다로 진을 옮겼다.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을 가지고 명량을 등지고서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꼭 죽으려고 하면 살고 꼭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1000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고 했다.이 말들은 모두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날에는 즉시 군율에 의해서 다스려서 조금도 용서치 않으리라"하고 재삼 엄격히 신칙(申飭:단단히타일러경계하다)했다.이날 밤 꿈에 神人이 지시하기를 "이렇게 하면 이길 것이요, 이렇게 하면 질 것이다."했다.
(194)1597년 9월16일 *명량해전 승전일:
*조선 선조 30년(1597)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명량에서 왜선(倭船)을 쳐부순 싸움. 10여 척의 전선(戰船)으로 적 함대 133척을 맞아 싸워, 적국의 배 31척을 격파하여 크게 이겼다.
• 9월16일 맑음.이른 아침에 특별 부대가 나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이, 명량으로 해서 똑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온다"고 한다. 즉시 여러 배들에게 명령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포위한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항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생각하고 불현듯 회피할 꾀를 내는데, 이때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면서 地字 ㆍ 玄字 등 여러 가지 총을 어지러이 쏘았다. 그러하니 탄환은 바람과 천둥치듯 쏟아진다. 한편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들이 대항하지못하고 가까이 왔다 물러갔다 한다. 하지만 여러 겹으로 포위당해서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알 수가없어, 온 배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낯빛이 질린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다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이 틈을 타서 더 대어들 것이어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다. 이에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기를 세우라 하고. 또 招搖旗(대장이 부하장수를 부르고 지휘할 때 사용하던 기)를 세웠으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는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면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니 안위는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한다. 나는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나 적의 형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했다. 이 두 배가 적진을 향해서 앞서 나가자,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게 지휘하여 안위의 배에 마치 개미떼처럼 붙어서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한다. 이에 안위와 그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죽을 힘을 다해서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혹은 수마석( 물살에 씻겨 닳아서 반들반들하게 된 돌)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럽게 치다가 배 위의 사람이 거의 힘이 다하게 되었다.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적에게 들어가서 비가 퍼붓듯이 마구 충을 쏘니 세 배의 적들이 거의 모두 쓰러진다. 이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서 쏘아 죽이니 적이 한 놈도 움직이지 못한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적의 배를 굽어보더니, "저기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의 적장 마다시다."한다. 내가 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서 갈구리로 낚아서 배에 올리니, 준사는 기뻐서 날뛰면서 "이게 마다시다."한다. 나는 즉시 명령하여 그놈을 토막지어 베어 죽이게 하니 적들의 의기가 크게 꺾였다. 우리 모든 배들은 적들이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소리치면서 쫓아들어가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움직이고 또 화살이 비처럼 쏟이져서 적선 31척을 깨뜨리니, 적선은 모두 물러가고 다시 접근해 오지 못한다. 우리 수군은 이 바다에서 정박하려 했으나 수세가 몹시 험하고 역풍이 불 뿐 아니라,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기 때문에 唐사島(무안군암태면)로 옮겨서 밤을 지냈다.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명량 해전 당일의 숨막히는 상황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197)1597년 10월1일 倭人들의 사사로운 복수:
맑음. 아들 회를 보내서 저의 모친도 보고 집안 여러 사람의 생사도 알아오라고 했다. 兵曹의 驛子(예전에, 마필을 제공하던 역에서 일을 보던 사람)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와서 아산 소식을 전하는데, 집이 적에게 습격받아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것은 없다고 한다.
(199)1957년 10월14일 막내아들 면의 전사소식
맑음. 새벽 2시쯤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실족해서 내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내아들 면이 나를 붙들어 안는 것 같은 형용을 하는 것을 보고 깨었다.무슨 조짐인지 알 수가 없다.---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에서 온 편지를 전하는데, 떼어 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荒亂하다.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겉에 '慟哭'이라는 두 자가 써 있다. 면이 전사한 것을 마음 속으로 알고 간담이 떨려 목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다.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천지가 어둡고 저 태양이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어린 자식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하늘이 너를 머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있은들 장차 무엇을 의지한단 말이냐?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너를 따라가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리라. 네 형과 네 누이와 너의 어머니도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 목숨은 남아 있어도 이는 마음은 죽고 형용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직 통곡할 뿐이로다. 밤 지내기가 1년처럼 길구나.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글.자식을 잃은 어버이의 심정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글이 있을까?)
7.무술년(1598)
--진중에서 읊음--
한바다에 가을 바람 서느러운 밤
하염없이 홀로 앉아 생각하노니
어느 때나 이 나라 편안하리요
지금은 큰 난리를 겪고 있다네
공적은 사람마다 낮춰 보련만
이름은 부질없이 세상이 아네
변방의 근심을 평정한 뒤에
도연명 귀거래사 나도 읊으리
(213)1598년10월3일 맑음.도독(명나라 장수 진린)이 유제독의 비밀서류에 의하여 초저녁에 나가 싸워서 자정에 이르도록 격전해서 명나라 배 沙船 19척과 호선 20여척이 불타서 도독이 뛰고 자빠지고 하는 것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다.안골 만호 우수가 탄환에 맞았다.
(214)10월6일 맑고도 서북풍이 크게 불었다. 도원수가 군관을 보내서 말하기를,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고 한다. 통분할 일이다.나라 일이 장차 어이 되려는가?
(215)11월8일 도독부에 나가서 위로연을 베풀어 종일 술을 마시다가 어둘 무렵에 돌아왔다.이윽고 도독이 보자고 청하기에 즉시 나갔더니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 왜교(승주군 해룡면)의 적들이 10일경에 도망해 철수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통지되어 왔으니 급히 진군해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는 것이었다.
11월9일 도독과 함께 일제히 행군해서 백서량(여수시남면)에 이르러 진을 쳤다.
11월10일 좌수영 앞바다로 가서 진을 쳤다.
11월11일 유도로 가서 진을 쳤다.
11월13일 왜선 10여 척이 장도에 나타났으므로 곧 도독과 약속하고 해군을 거느리고 추격하니 왜선은 물러가 움츠리고 종일토록 나오지 않는다. 도독과 함께 장도로 돌아와 진을 쳤다.
11월14일 왜선 2척이 강화할 목적으로 바다 가운데까지 나오자, 도독은 왜말 통역관을 시켜서 왜선을 맞아 조용히 붉은 기와 환도 등의 물건을 받았다. 오후 8시경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2마리와 술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11월16일 도독이 진문동을 倭營으로 들여 보내더니, 이윽고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을 도독에게 갖다 바쳤다.
1598년11월17일(마지막 일기)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적의 중간 배 1척이 군량미를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갔더니 왜적은 언덕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사로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군사에게 빼앗겼다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이틀 뒤 11월19일 새벽 노량(남해대교 부근)해전에서 전사함)
(내 땅을 지키는 삼도 수군 통제사가 엄연히 있는데, 그리고 명량해전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왜군과 싸워 장쾌한 승리를 거둔 바 있는데, 이 왜군과 명나라 도독은 시방 무슨 추잡하고 해괴한 거래를 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장군은 왜 한마디 비난의 말도 없이 담담하게(?)기록만 하고 있는가! 애통하다.할 말도 하지 못하고 할 일도 마저하지 못하고, 도연명처럼 고향땅으로 돌아가 편안한 여생을 보내 보지도 못하고, 그리움과 스산한 삶을 한순간에 내려놓고 영영 떠나시다니--)
'책 ·영화 ·강연 이야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이 전하는 인디언 이야기 (0) | 2022.08.20 |
---|---|
동몽선습(童蒙先習) (0) | 2022.08.15 |
'죽이는' 수녀들의 이야기Prayer for the Dying (0) | 2022.08.08 |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질 볼트 테일러 (0) | 2022.08.02 |
천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0) | 2022.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