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동해중학교

맑은 바람 2022. 11. 13. 16:45

경북 포항시에서 구룡포 쪽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바닷가 솔숲 속에 단층 건물 한 동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바로 내 스물 셋의 나이와 함께 떠오르는 <동해중학교>다.
1970년--
졸업도 하기 전 2월에 그곳에 부임했다.
뜨내기 선생들이 매년 자리를 뜨곤 하는 간이역 같은 학교라 한시가 급했던 모양이었다.

1학년 세 반, 2, 3학년 각기 두 반, 모두 7개 학급이 전부인 미니학교였다.
선생이 모자라니 턱없는 요구도 한다. 국문과 출신에게 가정도 가르치고 영문법도 좀 가르치란다.

교단에 서는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서울에서 내려가는 선생들이 꽤 있었지만 이 아이들은 서울말이 무척 생경한 모양이다.
인사말에는 귀기울일 생각 않고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실실거리며 웃기만 한다.
개중에는 늦은 나이에 중학교엘 들어와 턱수염이 시커먼 열 일곱 여덟의 총각도 한둘 있으니 이제 대학을 갓 나온 풋내기 선생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이곳 아이들은 학교는 건성이다.
모내기철이 되면 학교는 오전 수업만 마치고 아이들을 귀가시킨다.
모두 돌아가서 모를 내거나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뜯겨야 했다.
가정 방문이란 걸 다니다 보면 한적한 시골길에서 아이들과 마주치는 때가 있다.
좀 전까지도 소와 함께 아이의 모습이 보였는데 소 혼자 오는 게 아닌가?
아이는 선생님 보기가 창피해서 소 등 뒤로 몸을 바짝 붙여버린 것이다.

농번기가 지나고 솔숲에 바람 한 점 없이 후덥지근한 7월이 되면 역시 오전 수업만 한다.
불과 500미터 전방에 출렁이는 바다가 있어 아이들은 모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닷가로 뛰어나간다.

바닷가 아이들이라 모두 물개 새끼들처럼 물이 자유롭다.
마음껏 헤엄치고 장난하며 오후 시간을 보낸다.

집에 가면 일 속에 묻혀 사는 생활이기에 이곳 아이들은 학교가 피신처이자 천국이란다.

그때 1학년이었던 아이들--손순득, 이정녀, 안필순, 이귀호, 김정자, 김복자,염귀순---- 모두 사십 중반을 향해 가는 아줌씨들이 되었을 테지.

지난 2월, 벼르고 벼르던 끝에 그곳 동해중학교를 찾았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순간을 체험했다.

단층건물은 온 데 간 데 없고 5층짜리 건물의 <정보산업고등학교> 한켠에 셋방살이하듯 동해중학교가 붙어 있고 그 넓던 뽕나무밭이 있던 자리에 고속화도로가 나 있었다.

솔숲이 없었더라면 그나마 학교 위치도 알아낼 수 없었을 게다.

형산강을 건너면서 문득, 그때 검문을 하러 버스에 오르곤 했던 헌병 생각이 났다.
후리후리한 키에 준수한 콧날과 철모 밑에서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던 그--
한때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쪼그라 들어가고 있겠지---(200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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