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아버님 전상서

맑은 바람 2022. 11. 13. 16:53

아버지를 유택에 모시고 흐른 세월이 어느덧 스무 해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간 아버지를 찾아 뵌 것이 몇 손가락을 꼽을 정도도 못 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못내 고개가 숙여집니다.

지난 겨울, 아버지의 둘째 외손자가 자꾸 아버지를 뵈러 가자는 걸 차일피일 미뤘더니
"엄마, 외할아버지 친딸 맞어?"
하더군요.

이제사 고백하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전 단 한번도 애틋하게 '아버지'를 불러 본 적이 없었어요.

오히려 저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학교에서 해마다 새로 나누어주는 환경조사서의 '아버지 직업란'을 쓸 때마다 갈등을 겪어야 했으니까요.
평소대로 솔직하게 쓰면 '조리사'라고 해야 할 텐데, 그게 도무지 창피해서 '상업'이라고 얼버무리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솔직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미웠고 회사원이나 공무원인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늘 술에 절은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시면 엄마의 잔소리가 마중을 나가, 밤새도록 계속되는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우리들은 숨을 죽이고 자는 척하며 엄마, 아버지 모두를 미워 했습니다.

한번은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오시지 않아 엄마랑 마중을 나갔더니, 만취 상태가 되어 길에서 잠이 들어 계시더군요.
그때 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아버지 신발을 일부러 벗겨 감추고는 신이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집까지 양말바람으로 걸어가셔야 한다고. 그래서 고약한 딸 덕분에 집까지 맨발로 걸어오신 적이 있지요.

마침내 어느 날, 아버지는 간암 선고를 받으셨지요. 술과 아스피린 과다 복용으로 간이 완전히 못쓰게 된 거지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언을 듣고서야 외국에 나가 있는 오빠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을 때,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하루 밤낮을 아들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날, 밤새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다음 날 아침에서야 바람처럼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덤덤히, 아무런 슬픔 같은 걸 느끼지 못한 채로 아버지를 작별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왜 불현듯 아버지가 저 때문에 남다른 슬픔과 고통을 겪기도 하시고 또 행복해 하셨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요?

제가 대학교 일 학년 때,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라디오 본체보다 더 큰 밧데리를 매단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사 왔더니, 몹시 화를 내시며
"힘들게 벌어 이런 걸 왜 사냐?" 고 호통을 치셨지요.
그러시더니 집에만 오시면 늘 라디오를 머리맡에다 두고 보물단지 아끼듯 하셨지요.

자식 넷을 다 대학까지 보내셨으면서도 졸업식장에 참석해 보신 건,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요.
졸업식장에서 엄마와 저와 셋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니가 젤 효녀다!" 를 거듭 되뇌시면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이 둘을 낳은 후 뇌종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아버진 손수 만드신 음식을 싸 들고 병원에 오셔서 아무 말 못하고 처연히 저를 내려다보시기만 하셨어요. 그때 아버지 눈시울이 벌개진 걸 저는 보았습니다.

그 후 몇 년 뒤에 아버진 영영 우리 곁을 떠나셨지요.
다행히 제가 완쾌된 모습을 보시고서 말이예요.

저는 지금도 가끔 아버지 꿈을 꾸어요.
더러 말하기를 죽은 사람 꿈은 불길하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저는 아버지 꿈을 꾸고 나면 오히려 막힌 일도 풀리는 때가 많아요.
아버지가 생전에 못다 베푼 사랑을 저 세상에서 베풀고 계실 거라는 굳은 믿음이 저를 사로잡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
며칠 후면 아버지 기일이 돌아옵니다.
다시금 꿈으로 제게 오시어 당신의 크신 사랑을 전해 주소서.

2001년 5월 7일 큰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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