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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계절 ---전혜린

맑은 바람 2023. 1. 2. 17:17

전혜린 지음/범우사/164쪽/초판1쇄1976.6/5판5쇄 2019.6/읽은 때 2022.12.30~2023.1.2

8차례나 발행한, 문자 그대로 스테디 셀러/무엇이 이 책을 스테디 셀러로 만들었을까?/우선 범우사 문고라서? 책이 작고 얇고 게다가 한시대의 우상이었던, 요절한 천재 이야기라서~?

전혜린(1934~1965.1.11)
평남 순천/1남 7녀 중 장녀/경기-서울법대-뭔헨대 독문과 졸업/1964 성균관대 조교수/1968년, 일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출간

(24)스물아홉 전혜린:
전과 비할 것 같으면 나 자신의 본질이나 현실이나 미래에 별로 강렬한 호기심이 안 일어나고,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에 대한 권태기-- 이와 같이 나이를 잊고 사는 생활, 바쁜 일과로 찬 직장생활.자기에 대한 호기심의 고갈, 미래에 대한 강렬한 흥미의 결여, 과거에 대한 냉담한 비감상주의---이런 여러 가지 30대라는 선의 전후로 여자에게 수반하는 보편적인 만성의 징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30-31)내 기억 속의 완벽한 순간들--
놀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이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서른이라는 어떤 한계선을 경계로 해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다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밀폐된 내면에서의 자기 수련이 아니라 사회와 현실 속에서 옛날에 내가 가졌던 認識愛와 순수와 정열을 던져넣고 싶다.
(32-33)먼곳에의 그리움(떠나고 싶은 마음)
먼곳에의 그리움!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내 영혼에 언제나 괴어 있는 이 그리움의 샘을 올해는 몇 개월 아니 몇 주일 동안만이라도 채우고 싶다./모든 플랜은 그것이 미래의 불확실한 신비에 속해 있을 때만 찬란한 것이 아닐까?/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아마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 본다.
(36-40)뮌헨의 몽마르트르, 슈바빙:
슈바빙의 주도로인,거대한 포플러 가로수로 장식되어 있는 아름다운 레오폴드 가를 따라 올라가면 사람들은 언제나 평범한 셀러리맨과 중산계급 주부들에 섞인 슈바빙 가(슈바빙족)를 볼 수 있다.
한 잔의 커피 또는 아무것도 안 마시고 담배만을 연거푸 피우면서 몇시간이라도 그들은 토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화나 축음기판, 줄리에타 마시나와 하이데거, 라이오넬 헴튼과 석간신문,시, 기계, 건축,연애.강의노트, 소련의 로켓--등이 화제다. 그러나 슈바빙적인 것은 어떤 얘기 속에도 그 자체가 아니라 행간에 놓여 있다. 말해지지 않는 속에 억제된 감동, 욕망, 기대가 스며있다.돈, 시간표, 소시민 근성, 인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그들로부터 자유로움의 의식이 어떤 화제 사이에도 그들을 침묵 속에 굳게 맺어서 일종의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테마는 예술이다. 감수성 있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누구나 가진 청춘과 보헴과 천재에의 꿈을 일상사로서 생활하고 있는 곳,胃보다는 두뇌가,환상이 우선하는 곳--이런 곳이 슈바빙인 것 같다./슈바빙을 유명하게 만든 또하나의 원인은 수많은 싼 음식집과 댄스홀이다./어떤 외국사람에게도 정신적 고향만을 같이한다면 지리적 고향은 의식하지 않게 해 주고 잊게 만드는 곳이 슈바빙인 것같다./하여간 슈바빙은 발전해가는 기계 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말하자면 시계 바늘과 뮤즈의 미소도 발을 멈추고 얼어 붙어버린 것 같다./슈바빙가의 무위와 허영과 천재연한 태도 속에서도 거부할 수 없이 풍기며 평상인에게도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자유'인 것 같다.
(64-65)왜 독일인가?
친구 주혜의 주선으로 그녀의 아버지 친구인 독일인의 도움을 받아 독일을 가게 됨/언제나 내 입에는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절이 떠나지 않았고 갑자기 지평선이 무한대로까지 넓어진 느낌이 났었다. 그때의 그신선한 흥미와의 이유 없는 마음의 약동을 아마 나는 일생 다시는 가져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어디에 가게 되더라도./그때까지 국내에서도 여행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는 나였고 내 집 이외에는 친척집에서도 자본 일이 없는 나였었다. 미칠듯이 울었던 생각이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1955년가을이었다.
(73)戰後 독일의 젊은이들:
정신에 굴레를 씌우던 도덕도, 지옥의 공포를 주던 종교도 없어졌다.내 멋대로다.내 책임 하에---
(독일)고교생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숭배하는 인물의 1위가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내가 본 많은 대학생들의 방을 장식하는 사진이 개구리처럼 눈을 뒤집어뜨고 트럼펫을 불고 있는 땀과 원시적인 힘과 이상한 종교의식적인 신비감과 기괴와 암흑과 폭발하는 에너지에 넘친 이글거리는 암스트롱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사진이었다.
책은 왜 안 보냐고 물으면 '직접 살기를 원하므로'라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다.산다는 것은 그들 틴에이저에 있어서는 우선 음악, 리듬, 소음,성---이런 것을 뜻하는 것 같았다.
(86-87)가을이면 앓는 병(죽음에의 유혹)
매년 가을이면 몇 주일이나 학교도 못 나오게 되고 앓아눕게 된다.의사는 신경의 병이라지만 나 자신은 내가 '존재에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절실하고 긴박하게 生과 死만을 집요하게 생각하고 不眠不食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生과 死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死에 대한 생각이 나를 전적으로 사로잡아 버린다.
(90-91)철든 나(1964)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한 권의 책이 맘에 들 때,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비가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을때---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하루하루가 마치 보너스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하루 무사히 살아넘겼구나 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할 때 몹시 감사하고 싶은--우주에,신에--마음이 우러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101-102)딸 정화:
내가 현재 갖고 있는 행복 중에 내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다하지 못하는 행복이 있다. 그것은 정화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정화라는 모습을 통해서.
정화같이 끝없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에게 주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는데 주어진 것은 인생의 덤으로써의 우연이거나 또는 높은 질서에 속하는 우주의 의사였으리라./지상의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정화가 중요하다. 고귀하다. 정화는 나의 생의 질서요 근원이요 목적이다. 어떤 고귀한 '이데아'보다도 정화의 끝이 살짝 올라간 몹시도 작은 귀엽디귀여운 코가 나에게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 태양같은, 해바라기같은 아이다.
(111)죽음에의 유혹1959.2.28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에 종막을 고한다는 것에 그렇게도 자주 희열을 느낀다. 나는 내 자신과 온갖 것에 계속 몰두하고픈 마음은 없다.너무나 지치고 지쳐 진절머리가 난다.
(113)태아를 품고도 1959.2.28
아이는 내 몸 안에서 매우 힘차게 태동한다.나는 그것이 몹시 싫다.아이는 벌써 빨리 세상을 보고자.하고 이제는 몹시 보챈다.그러나 도대체 인생이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거의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이다.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자살하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없다.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정당한 것이다.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도 장차 엄마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凡人은 그 경지를 넘볼 수가 없구나!)
(116)헤세로부터의 편지
(1959.1.1)(헤세와 전혜린의 남편은 막역한 사이인가 보다. 단둘이 섣달 그믐을 보내며 축배를 들었다니!)**헤르만 헷세1877~1962
헤세는 83세에도 새해의 소망을 이렇게 말했다.
1.건강, 건강, 건강!
2. 좋은 과제와 성공
3. 철수의 성공
4. 건강하고 영리한 아이
5.약간의 돈
(123)전혜린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 不在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을 가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따뜻한 아궁이로, 가족에게로, 엄마의 젖가슴으로---어느 곳이든 그를 위한 사랑과 기도가 있는 것이면--/모성애! 난 그것을 얼마나 미칠 듯이 아쉬워하는가!
난 그것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라났고 그래서 의식하지 못하는 새, 모성애의 동경은 내 가슴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화를 내거나 불만일 때면 그것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를 도와줄 아무도 없다. 참으로 난 극단으로 기울어져 있다. 죽고 싶게 내 자신이 부끄럽다./내가 가장 동경하는 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그래야만 하듯이 사랑에 충만하고 오직사랑뿐인---
(140)건강은 알파와 오메가:
(공부에 매달리느라 두세 시간밖에 잘 수 없어 쇠약한 전혜린은 첫딸을 낳고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는 건강이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게까지 얼마나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절대적인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이 체험했고, 아기의 분만을 계기로 나의 전 생활방식이 달라졌고 인생관도 많은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160)정화의 교육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평범한 학교로만 골라서 다니게 하고 싶다.부모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교육은 "내적인 안정감을 주는 일"이라고 페스탈로치가 말했듯이 아이를 예방하는 일만이 부모의 올바른 임무인 것 같다./부모 없이도 과오를 범하지 않고 살아나갈 것이다. 이 부모없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교육의 목표라는 것은 생각해 보면 역사적인 진리다 완전한 아이에게 부모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부모는 자기가 무로 되기 위해 아이를 기른 것이다.그리고 자기가 무로 된 순간에 그 교육은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무가 되고 싶다.정화가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부모에게 기대는 것은 죽음에 기대는 것이다. 앞을 보지 않고 뒤를 보고사는 것이다.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존재의 무게를 전부정화 위에 얹어서 정화를 질식시키고 싶지 않다./내가 나자신의 생을포기하는 분량 만큼, 그만큼 정화의 짐이 무거워진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가장 실망스러운 대목. 그녀는 정화의 홀로서기를 돕기 위해 6살짜리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갔나? 모성애를 그리 부르짖더니! 2023년 현재, 63세가 된 정화에게 묻고 싶다, 행복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