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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밀 흐라발<너무 시끄러운 고독>

맑은 바람 2023. 3. 3. 21:50

보후밀 흐라발 장편소설/이창실 옮김/문학동네/142쪽/1판1쇄 2016.7/1판7쇄 2017.1/읽은때 2023.2.28~3.3

보후밀 흐라발(1914~1997)
체코 브르노 출생/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법학전공/독일군에 의해 대학이 폐쇄되자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49세에 소설을 쓰기로 결심, '바닥의 작은 진주'를 출간, 작가로 데뷔/1964년 첫 장편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프라하의 봄' 이후 1989년까지 자신의 많은 작품이 20여 년간 출판금지되었음에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체코소설의 슬픈 왕', '체코의 국민작가'로 각광받았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현대작가'로 평가받음.

(700페이지를 극복(?)하고 145쪽짜리를 대하니 기분이 가볍다. 처절하지는 않지만 침울하기는 마찬가지/폐지 압축공인 한탸가 주인공인 1인칭소설)

1장
주인공은 35년간 폐지 압축하는 일에 매달려 살아왔다.
(10)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홀처럼 녹아들 때까지.
(10-1)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12)나에게 독서는 기분전환이나 소일거리가 아님은 물론, 쉽게 잠들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12-1)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18)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영원과 무한도 나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2장
(23)책이 폐지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이 장서들(부르주아 저택이나 성에서 나온)은 그곳에서 킬로그램당 1코루나에 팔릴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보고 놀라거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그렇게 나는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25)"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명을 목 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칼 샌드버그의 싯구 중에서

3장
(38)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상태에 놓인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4장
(60)각각의 정육면체들은 푹푹 찌는 여름날 정오에 시골 푸줏간 갈고리에 걸린 소의 커다란 넓적다리를 연상시켰다. 눈을 든 순간,예수와 노자가 사라지고 없다는 걸 깨달았다. 터키 옥색과 붉은색 치마를 입은 내 집시 여자들처럼 그들도 흰 회칠이 된 계단을 되올라가 버렸고, 내 맥주 단지는 비어 있었다. 나는 절뚝거리거나 때로는 한 손으로 짚으며 계단을 올라갔다.너무 시끄러운 내 고독 탓에 머리가 좀 어질어질했다--뒷골목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쐬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든 빈 단지를 꽉 움켜잡았다.
5장
(71)이마누엘 칸트의 아름다운 글귀:
"나의 생각은 언제나 더 크고 새로운 감탄으로 차오르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마음 속에 살아있는 도덕률이다--"
"여름밤의 떨리는 미광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달의 형태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우정, 영원으로 형성된 고도의 감각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75)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이 일을 하면서 전능의 무한한 영역에 내던져졌음을 깨닫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81)사실 나는 땅거미가 지는 해질 무렵을 너무도 사랑했다.하루 중에서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시각에는 모든 거리와 장소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명상에 잠긴 듯 온화해졌고 그순간만은 나 역시 아름다운 청년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6장
(90)나는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유리벽 너머로 트럭들이 손때 묻지 않은 새 책들을 쏟아놓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책들은 어느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98)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했다.부브니의 속도로 종이를 갈퀴로 퍼담았고, 반짝이는 표지의 책들이 내 곁에서 수다를 떨어대도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안돼 넌 그럴 수 없어. 단 한 권의 책도 펼쳐볼 권리가 없어. 잔혹한 한국 형리처럼 냉정해져야 해'라고 쉴새없이 나 자신을 타일렀다.('잔혹한 한국 형리처럼'이라니?) 

7장
(115)내 삶이라고 해봐야, 저 아래 내 지하실에서 사회주의 노동단원 두 명이 짓이겨 대는 작은 생쥐 한 마리만도 못한 것이긴 하지만--

8장
(119)카페 '검은 양조장' 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 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131)나는 녹색 버튼의 작동을 중단하고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욕조에 들어가는 세네카처럼 나는 한쪽 다리를 압축통에 넣고 잠시 기다린다. 다른 한 쪽 다리도 마저 통 안으로 무겁게 떨어져내린다
나는 뙤리를 틀고 살핀 다음 무릎을 꿇은 자세로 녹색 버튼을 누르고 완충물인 책과 폐지 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독일시인이자 철학자)를 꽉 쥔다.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단면이 내 늑골을 뚫고 들어온다.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온다.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겪는 것일까? 압축기의 중압에 내 몸이 아이들의 주머니칼처럼 둘로 접힌다.
 
**이 소설은 1977년 프라하에서 지하 출판으로 유통되었고 1980년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체코에서는 1989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출간되었다.--옮긴이의 말
(독서클럽에서 지정해준 책이다. 숙제는, 다 읽고 한 문장만 뽑아 보는 것이다.
딱 한 문장--어떤 것이 그를 대표하거나, 나를 대표하는 문장이 될 수 있을까.
번역자의 장황한(?)해설이 첨부된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