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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맑은 바람 2023. 6. 1. 21:50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ㆍ 김화영 옮김/현대문학/초판1쇄2002년 1월/초판15쇄 2007년3월/274쪽/

읽은 때 2023년 5월21일~6월1일

(바로직전 장장 696쪽의 벽돌책을 떼고 274쪽의 책을 대하니, 이 책은 두께 자체만으로도 가볍고 호감이 간다.

또 누가 만든 책인가. 내 문학의 길에서 가장 친근한 친구로 함께해 준 '현대문학'이 아닌가!
제목도 너무 간절하게 다가온다.

걷기를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다리가 아파 잘 걸을 수 없으니 '걷기예찬'에 더욱 공감할 수밖에.
그런데 책 읽은 기록과 기억이 없는데, 이 꼼꼼한 줄긋기는 언제, 누가 한 것일까, 새삼스럽기만 하다.)

다비드 르 브르통(1953~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 교수/'몸의 문제'에 관한 많은 저서가 있다./'몸과 사회', '살아있는 살', '몸이여, 안녕' 등

--차례--
*길 떠나는 문턱에서
(9)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12)육체의 중요성이 점차로 줄어들면서 인간은 세계관에 상처를 입고 현실에 작용하는 범위가 제한되며 자아의 존재감이 감소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 약화된다.
(14)걷는 동안 여행자는 자신에 대하여,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혹은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고 뜻하지 않은 수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15)시간과 장소의 향유인 보행은 현대성으로부터의 도피요 비웃음이다. 걷기는 미친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질러가는 지름길이요 거리를 유지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대중들이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이나 혹은 반대로 여가활동의 수단으로 걷기를 중요시하는 것은 곧 우리사회에서 육체의 지위가 어떤 것임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6)나의 의도는 가슴 뿌듯한 기쁨을 안고 기꺼이 걷는 걸음에 대하여 얘기하는 데 있다.만남과 대화를 가져오는 걸음, 시간을 음미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멈추거나 가던 길을 계속하는 그런 걸음 말이다.내가 원하는 것은 즐거움에로의 초대일뿐 잘 걷는 방법의 안내가 아니다.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그 고즈넉한 즐거움.
(17)단순한 산책의 이야기:
걷는 즐거움과 책읽기의 즐거움/모든 글쓰기는 다른 글쓰기에서 자양분을 얻는 것이니 작가의 붓끝에 자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는 저 환희에 빚지고 있음을 글 속에 밝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밖에 이 책 속에 담아놓은 것은 스쳐 지나가는 추억들, 중요하면서도 사소한 인상, 만남,대화,한마디로 말해서 세상 사는 흥취 같은 것이다.

*걷는 맛
(21)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걷기는 어떤 정신상태, 세계 앞에서의 행복한 겸손, 현대의 기술과 이동수단들에 대한 무관심, 사물에 대한 상대성의 감각을 전제로 한다.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즐기는 센스를 새롭게 해준다
(24)걷기는 오늘날 우리네 사회의 성급하고 초조한 생활을 헝클어놓는 온갖 근심걱정들을 잠시 멈추게 해준다./발을 놀려 걷는 사람은 세상 앞에 벌거벗은 존재로 돌아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음을 느낀다.
(28-29)어느 해부터인가 구름조각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기듯 나는 끊임없이 떠도는 생각들에 부대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바다기슭을 떠돌았는데 이윽고 지난해 가을에는 강가에 있는 내 오두막에서 해묵은 거미줄들을 쓸어버렸다.이내 한 해의 끝이 되었고 또 봄이 돌아오자 가벼운 안개 속을 지나 시라가와의 울타리 저 너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여행벽의 신이 내 정신을 흔들고 길의 신들이 부르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지라 나는 찢어진 바지를 꿰매고 모자끈을 손보는 즉시 슬개골 밑에 쑥뜸을 붙이고서 벌써부터 마쓰시마의 달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1988년 발행, 바쇼의 <여행일기> 중에서
**마쓰오 바쇼(1644~1694)일본의 시인/한때 사무라이
(30)걸어서 떠나는 사람은 익명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즐기고 함께 길을 가는 동행이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외에는 더 이상 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입장이 된 것을 즐긴다.주저해 왔던 일을 결행하기 위하여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길건 짧건 어느 한동안에 있어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망설였던 '무릎인공관절수술'을 위해 일정을 잡아놓으니 이렇게 맘이 편할 수가 없다.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루비콘강을 건넜다' 라는 말들이--)
(44~45)걷기는 사물들의 본래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일깨워주는 인식의 한 방식이며 세상만사의 제맛을 되찾아 즐기기 위한 보람있는 우회적 수단이다./열정적인 보행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당신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준 나머지 정신의 편협함과 모든 오만이 닦여나가고 오직 호기심만이 남아서 자유롭게 제 역할을 다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걷기는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방법론이며 스스로 거쳐온 자연을 자기 속으로 흡수하고 일상적인 인식 및 지각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세계와 접촉하는 한 수단이다.
(49)짐은 인간을 말해준다. 짐은 물질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인간의 분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공정한 관찰자는 짐을 보고 그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것,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장에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여행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여행을 할 때는 배낭 이외에 활기, 쾌활함, 용기, 그리고 즐거운 마음을 충분히 비축해 가지고 떠나는 것이 매우좋다.--로돌프 퇴퍼의 '지그자그여행' 중에서
*로돌프 퇴퍼:(1799~1846)현대만화의 아버지
(50)도보로 산책하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여야 한다. 도보로 하는 산책은 반드시 혼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거나 계속하여 가거나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51)'내가 혼자일 적만큼 덜 외로운 때는 없는 것이다.--나는 들판에 나가면 들처럼 식물이 되어 지내고싶다.'--윌리엄 해즐리트의 '여행 떠나기' 중에서
(59)먼길을 가는 데는 정신적 각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각오가 좋은 신발과 순조로운 소화작용의 뒷받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68-70)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주위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다./침묵은 어떤 장소의 서명인 양 메아리치는 울림이다./침묵은 또한 풍경을 짓누르며 타오르는 태양에서 생겨나는 무거운 납의 덮개이기도 하다./침묵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리의 사라짐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자질,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의 가벼운 맥박이다.
(78--79)함께 나누는 침묵은 의기투합의 징표로서 공간의 고즈넉함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을 연장시켜준다. 언어는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는다. 침묵은 그 갈라짐을 막아보지만 결정적인 성공은 불가능하다. 정신 집중의 노력은 말에 부딪쳐 깨어져 버린다.주의력을 일깨우는 것이 말이므로 그 때문에 정신이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는 우리를 풍경으로부터 떼어낸다.대화는 장소의 정령에 대한 배반인 동시에 사회규범을 만족시키는 수단이며 자신만의 황홀한 격리상태에서 빠져나와 안도감을 느끼는 한 방식이다./더할 수 없이 약한 시간의 꽃병을 깨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83)노래 부르며 걷기:
어떤 나그네들에게 노래는 소리나는 지팡이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촉진제인 동시에 그 장소의 정령에 대한 친근감과 찬미의 표시다.
(85-87)40일간 방 안에 연금된 젊은 장교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의 여행:
자비에르는 연금 장소를 탐험과 명상의 장으로 탈바꿈시켜 가지고 그 장소에서 장기간에 걸친 미시적 여행을 시작한다./'그들은 내가 작은 한 점에 불과한 도시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해 놓고 오히려 내게 우주 전체를 허락했다. 광대한 공간과 영원이 내 손 안에 있는것이다.'--자비에르의 '내 방 안의 여행' 중에서
이렇게 볼 때 걷기가 반드시 어떤 광대한 지리적 공간을 전제로 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초라한 작은 방안에서도 보행은 충분히 가능하다.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예리한 시선의 자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말이다.자기 집안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보행자라고 해도 적어도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옴짝달싹할 수 없다고 여겼던 부동의 상태에 활력을 불어 넣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그리하여 선수를 쳐서 정신을 해방시킴으로써 현실의 속임수에 불과한 부동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91)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베풀어 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볼 때 걷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94)보행에는 내 생각들에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한자리에 머물고 있으면 거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속에 내 정신이 담긴다.--장 자크 루소
(95)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키에르케고르
(95)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몫을 하고싶어한다. 때로는 들판을 가로질러서, 때로는 종이 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건실한 그의 역할을 당당히 해낸다.--니체
(95-98)이름:
도보여행자는 이름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다./타관에서 온 나그네는 바로 길을 묻는 사람이며 장소의 이름을 묻는 사람이다./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이름은 공간의 세계 내적 자리매김이며 개인적 지리학의 고안 혹은 육체의 척도에 적용한 지리학이다.
(108)걷기는 원초적인 것, 원소적인 것과의 접촉이다. 걷기는 대지와의 만남이다.
(111)한밤중에 달빛을 받으며 숲속이나 들판을 걷게 되면 그때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별빛 속이나 캄캄한 어둠 속에 서면 인간은 무한하고 진동하는 어떤 우주 속에 던져진 피조물로 되돌아간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되고 그 순간의 어렴풋하지만 강력한 우주론 혹은 개인적 종교성에 빠져든다. 밤은 인간을 경이와 두려움이라는 성스러움의 두 가지 얼굴과 대면시킨다.그것은 일상적인 지각의 세계에서 뿌리가 뽑혀 나와서 자아를 초월하는 피안의 세계와 접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115)보행은 세계의 희열을 향한 자기개방이다. 그것이 내면적인 휴지와 평정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악천후는 여행에 소금과도 같은 것이다. 비록 그 고요한 질서를 뒤흔들어놓기는 하지만 악천후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보증한다.
(136)산책은 걷기의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형식이다. 혼자 혹은 여럿이서 하는 산책은 숨을 가다듬기 위한, 시간을 길들이고 인간적인 높이에서 지각되는 어떤 세계를 기억하기 위한, 휴식, 말, 혹은 목적없는 거닐음에로의 고요한 초대다.
(138)산책은 친숙한 것의 낯설음을 고안해 낸다.산책은 디테일들의 변화와 변주를 민감하게 느끼도록 함으로써 시선에 낯섦의 새로움을 가져다 준다.(시의 출발은 낯설게 보기다!)
(141)글로 쓰는 여행
루소는 고백록을 집필하면서 그에게 도보 여행은 끝없는 행복의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에 느꼈던 인상들을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한다고 적고 있다.
'내가 이제는 더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된 삶의 소소한 일들 중에서 내가 가장 아쉽게 느끼는 것은 여행일기를 적어두지 않았다는 것이다.'--루소의 <고백록> 중에서
(141-2)'나는 노랗게 바랜 여행수첩을 뒤적여본다. 그러니까 어느 하나 죽어 없어진 것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이렇게 그 모든 것이 깨어나서 반쯤 지워진 해묵은 페이지들로부터 솟아올라 다시 수도원이 되고 수도사가 되고 그림들과 바다가 되다니! 그리하여 나의 친구도 그때의 아름답던 모습 그대로, 꽃다운 청춘의 모습 그대로, 독수리 같은 푸른 눈으로 시가 가득한 가슴으로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땅속에서 다시 솟아오른다---카잔차키스의 <그레코에게 보내는 편지>
(142)'여행자의 지팡이를 손에서 내려놓고 나서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쉽사리 그 지팡이를 다시 잡게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슬픈 마음으로 예감한다. 바로 그러한 예감 속에서, 그는 산악탐험 시절에 자신이 밟아갔던 길로 들어서고 싶어질 훗날의 사람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추억과 경험의 이야기를 이 기록 속에 담아 두고자 한 것이다.---로돌프 퇴퍼의 <지그재그 여행> 중에서
(걷기가 부자유스러워지면서 이런 글들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지--)
(143)우리는 사실 글을 쓰기 위해서 걷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하고 이미지들을 포착하고 감미로운 환상에 빠져들기 위하여, 추억과 계획을 쌓기 위하여 걷는 것이다.

*지평을 걷는 사람들
(151)카베사 데 바카
16세기 스페인 귀족으로 항해사가 되어 식민지 개척에 나섬/1527년 플로리다 원정대(600명)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가 살아난 극소수의 몇 사람(4명) 중 하나/파라과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전제적인 통치방식 때문에 해임됨/아프리카로 귀양감/1555년 회고록을 씀
(155)르네 카이예(1799~1838)
프랑스인/조실부모/삼촌슬하에서 자람/1816년 마을사람들이 돈을 모아 사준 신발을 신고 세네갈로 떠나는 루아르호 선상에 오른다/항구도시 생루이에서 다카르로/톰북투에 가는 것이 그의 소망/여행 중 다친 발과 괴혈병으로 고생함/마침내 톰북투에 당도했으나 크게 실망함/사하라를 횡단하고 페즈를 거쳐 탕헤르에서 프랑스 툴롱으로 떠나는 배에 오른다./1830년 여행기발표/1838년 38세의 나이에 말라리아로 숨을 거둔다. 여행기 <팀북투의 정체를 밝힌다:카이예의 놀라운 모험>

*서아프리카의 도시 톰북투 탐험에서 살아돌아온 최초의 유럽인/톰북투는 한때 중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중심지이며, 황금의 도시로 알려져, 유럽인의 관심을 끌었다.


(166-176)리차드 버튼
나일강의 원천을 찾아 나섬/걷기의 영웅적인 표상/ 규율을 싫어하고 박식하며 호기심이 많음/ 1856년 6월, 동아프리카의 대호수를 향해 도보탐험의 길에 오름/넉 달 반 동안 90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카제(탄자니아의 타보라)에 도착한다/질병으로 걸을 수 없게 된 버튼을 짐꾼들이 떠멘 채 몇 주일 후 대상행렬은 탕가니카 호수에 도착한다./그 아름다운 풍경 앞에 버튼은 모든 고통을 잊었다./유럽인이 이 호슷가에 발 딛은 것이 이번이 최초인 것이다./훗날,스피크와 버튼의 탐험에서, 나일강과 콩고강의 발원이 빅토리아 호수와 탕가니카 호수라는 사실을 인정받게 된다 .
(177)미셸 비외샹주
비외샹주는 모로코 남부와 모리타니아 사이에 있는 사막의 약탈자들 손에 맡겨진 한 지역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꿈이다./1929년 9월, 비외샹주 형제는 사막과 위험의 한복판에 버림받은 신화적 도시 스마라에 접근하는 최초의 유럽인이 되겠다고 마음먹는다./두 달 동안 1400km의 고통의 대횡단을 감행한다./1930년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양력11월1일) 다음날, 그는 스마라에 도착한다-/비외샹주의 비밀일기는 그의 사후에 발표됐다.

*도시에서 걷기
(191)사람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왠지 끌리는 데가 있는 법. 도시는 어느 곳이나 다 주관적인 관계의 대상이다.  어떤 도시를 걸어다니면서 자신의 숨은 모습을 발견하는 또하나의 방식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표류하듯 그 도시의 골목들을 이리저리 흘러다녀 보는 일이다.
(195)도시에서의 걷기는 몸속에 간직된 주름이라고 할 수 있다./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도시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오직 육체를 통해서만 기분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걷는 걸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터이다.  한가롭게 거니는 것이야말로 도시에서 걷는 진정한 기술의 이름이다.
(197)여름철 카페의 테라스:
삶의 풍경이 전개되는 극장의 객석으로 변한다. 카페 앞을 하릴없이 거니는 남자 혹은 여자들이 배우로 변한다.
(217)도시는 계속적으로 행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도시는 무수한 얼굴들의 숲을 보여준다. 도시에서 산책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변에서 타자들을 바라본다는 것, 그와 동시에 그들의 시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걷기의 정신성
(236)순례/영적인 걷기
오늘날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들에는 거쳐가는 순례자들이 수천 명에 이른다. 그러나 자신의 신심을 당당하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정신수양을 위해서,혹은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혹은 자신보다 앞선 수백만의 선배들에 상징적으로 합류함으로써 오늘날의 삶의 리듬을 끊어보고 싶어서 떠나는 것이다./신앙을 추구하는 길 대신에 인식을 추구하는길, 혹은 인간적 역사에 대한 충실함의 길이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된다. 진리의 길이 의미의 길로 변한다.
(237)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 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다.
(250)거듭나기로서의 걷기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것에만 이 세계를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걷는 것은 헐벗음의 훈련이다.  걷기는 인간을 세계와 정대면하게 만든다./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251)'아름다운 라벤더빛 길이 매순간 하얗게 드러난다. 아무도 그 길을 따라오지 않았다. 그 길 역시 밝아오는 날과 함께 태어났다. 저기 저 마을이 잠에서 깨어나 존재의 세계로 등장하기 위하여 그대를 기다린다.'--구스타브 루드의 <낙원을 위한 에세이>중에서
'저 작고 은밀한 계곡의 안쪽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아주 조그마한 샘가에 서있는 은백양나무---잎사귀 달린 신, 사막의 촉촉한 눈--만이 아니라 무지개처럼 타오르는 빛의 왕관, 순수한 정신, 순수한 존재,인간사를 초월한 순수 지성이 금방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며 일어설 것만 같은 느낌이다.'---E. 에비의 <고독한 사막> 중에서
(255)걷기는 삶의 불안과 고뇌를 치료하는 약이다./걷기는 세계의 자명함을 되찾게 해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걷기는 하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되어 불행을 기회로 탈바꿈시킨다. 인간을 바꾼다는 영원한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길의 연금술이 인간을 삶의 길 위에 세워놓는다.
(261)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우리를 만들고 해체한다. 여행이 우리를 창조한다.

*옮긴이의 말
(262)걷는 즐거움에로의 초대
파리를 떠나기 몇 시간 전 마지막으로 서점에 들러 진열된 수많은 책들 중에서 오직 제목과 목차와 출판사와 저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지와 책 두께의 관상만으로 판단하여 집어든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하나가 이 책이다./몸무게가 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조금씩 습관을 들인 결과 걷는 것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행복 중의 하나가 되었다.
(263)이 책은 건강을 위하여 많이 걷기를 권장하는 책이 아니다. 걷는 것은 몸으로 걷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유의 중심에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산인 몸이 있다.
사실 문명이란 몸에 부착시키거나 몸을 에워싸거나 몸을 실어나르는 수많은 보조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결과 몸은 정작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그런 각도에서 이 책은 사유의 귀중한 기회라고 생각된다.
(264)걷기예찬은 삶의 예찬이요, 생명의 예찬인 동시에 깊은 인식의 예찬이다.
(직장생활로 바쁠 때에는 걷는 시간도 아까워 가까운 길도 마을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제 시간이 넉넉한 지금은 다리가 아파서 걷는 것이 즐겁지 않을 뿐더러 괴롭기까지 하다. 대개의 사람들이 겪는 생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