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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 테츠시의 <반야심경(般若心經)>

맑은 바람 2023. 11. 13. 13:22

야마나  테츠시(1949~) 지음/최성현 옮김/불광출판사/174쪽/일어초판1991/한국어 초판 2020.4/2023.6 초판 6쇄/읽은 때 2023년11월6일~11월13일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행복에 관하여
(7)반야심경은 비록 짧지만 그 속에 불교의 정수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방대한 불교 경전을 가장 짧은 글 속에 줄여넣은 맑은 이슬과 같은 경이 반야심경입니다.
(9)행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달리 말하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 그걸 위해 반야심경을 낭송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이란 작은 경 속에는 나는 물론, 다른 존재와 삶의 모든 순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들어있습니다.
(11-12)반야심경은 262자밖에 안 된다.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짧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짧은 경전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답답해하던 차에 역자는 일본여행 중 이 책을 만난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1991년 출간 이후 30여 년 간 일본의 스테디셀러)이라는 광고 문구가 눈에 띄었다.
불교용어를 쓰지 않고 반야심경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14)"한 수행자가 있었다.그는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련하는가운데 세상의 모든 것이 空함을 깊이 이해하며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이 반야심경이 하고자 하는 말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세 가지다. 괴로움과 공과 반야바라밀다가 그것이다.

테츠시는 이 책의 거의 모든 지면을 이 세 가지를 말하는 데 쓴다.
테츠시는 말한다.
"반야심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 하나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법, 그리하여 행복을 얻는 길, 그것 하나다."
(21)깨달음과 반대의 상태를 '無明'이라 합니다. 모른다 라는 뜻입니다.
불교는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깨달은'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렇게 ''앎을 통해 나의 행동방식, 곧 내 삶의 방식을 바꿔 가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지혜를 일러 '般若'라고 합니다. '반야'란 산스크리트어로 지혜를 뜻하는 '프라즈냐'라는 낱말의 중국어 번역입니다.*산스크리트어:인도계 언어들의 조상
반야심경은 본래 '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어의 '파라미타'라는 음을 한자로 옮긴 것입니다. 파라미타란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란 '지혜의 완성'을 말합니다.
반야심경의 '心'은 '중심,핵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이란 '지혜의 완성, 그 핵심을 설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시작
(31)반야경은 대승불교의 바탕이 됩니다. 반야심경은 AD300~500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가 접하는 <반야심경>도 현장스님의 번역입니다.
(33-39)우리말 <반야심경>
觀自在菩薩
관세음보살이
行深般若波羅密多時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할 때
照見五蘊皆空 *蘊쌓을 온
인간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다섯 요소는 모두 실체가 없음을 확실히 알고
度一切苦厄
일체의 괴로움을 극복했다.
舍利子(*10대 제자 중 가장 유명함)
사리자여 잘 들어보라
色不異空
모양있는것은 空과 다르지 않고
空不異色
空한 것은 모양 있는 것과 다르지않다.
色卽是空
모양 있는 것은 '空'하고
空卽是色
'空'은 모양 있는 것을 만들고 있다.
受想行識
受(감각작용)ㆍ想(표상작용)ㆍ行(표상에 따라 생기는 意思 작용)ㆍ식(인식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음의 활동도
亦復如是 (*復다시 부)
또한 모양있는 것처럼 실체가 아니다
舍利子
사리자여, 잘 들어보라
是諸法空相
이와같이 모든 것은 '공'한 성질을 피할 수 없으므로
不生不滅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고
不垢不淨 (*더러울垢)
더러운 것도 없는가 하면 깨끗한 것도 없고
不增不滅
늘어나는 것도 없는가 하면 줄어드는 것도 없다
是故空中無色
이처럼 공의 세계에서는 모양 있는것도 없는가 하면
無受想行識
감각,지각,표상.의사,인식 작용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마음도 없다.
無眼耳鼻舌身意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생각 등도 없고
無色聲香味觸法
모양이나 소리나 향이나 맛이나 감촉이나 법(인식 대상) 등도 없고
無眼界乃至無意識界
눈과 그 눈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세계도 없고 생각하는주체와 생각되어지는 객체로 이루어지는 세계도 없고
無無明亦無無明盡
무명도 없고 무명이 없어지는 것도없고
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
늙고 죽는 일도 없고 늙고 죽는 일이 다하는 일 또한 없다
無苦集滅道
붓다가 가르쳐준 괴로움에 관한 네가지 진리(괴로움이 있음.괴로움에는 원인이 있음.괴로움을 없앨 수 있음.괴로움을 없애는 데는 길이 있음)도 없고
無智亦無得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도 없고 또한 깨닫는다는 것도 없다
以無所得故
얻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으로
菩提薩타(보리살타)
보살은
依般若波羅密多故
반야바라밀다에 따라
心無가碍
마음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다
無가碍故 無有恐怖
마음에 사로잡힘이 없으므로 공포도 없다
遠離一切顚倒夢想
본말이 전도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究竟涅槃
절대적인 대안심의 경지에 이르는것이다
三世諸佛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가
依般若波羅密多故
이 반야바라일다에 따라
得阿누多羅三막三菩提
완벽한 깨달음을 얻으셨다
故知般若波羅密多
그러므로 다음 것을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是大神呪
커다란 진언이고
是大明呪
밝은 진언이고
是無上呪
위 없는 진언이고
是無等等呪
견줄 것이 없는 진언이다
能除一切苦
능히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眞實不虛
진실하고 허위가 아닌 경이다
故說般若波羅密多呪
이제 반야바라밀다 진언을 설하노라
卽說呪曰
진언은 다음과 같다
揭諦揭諦(아제아제)
가고가서
婆羅揭諦(바라아제)
저 언덕에 이른 자여
婆羅僧揭諦(바라승아제)
저 언덕에 완전히 이른 자여
菩提娑婆訶(모지사바하)
깨달음이여, 경사로세

**반야심경에서는 '보리'를 '모지'라 읽는다 함. '사바하'는 진언을 마치면서 '아멘'하는 의미와 같다고 함.

--행복
**자신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과 별개가 아니다
(44)이 세상에 경쟁과 다툼이 있는 것은 많은 사람이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요?
(50-51)붓다는 이런 상태(끊임없이 세속의 욕구를 좇는)를 '無明'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괴로움'의 진짜 뿌리라고 부릅니다. 붓다는 이런 삶의 방식, 굳 무명 상태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고 또 잠시 행복해진다 해도 그 행복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괴로움
(54)붓다의 중심 테마는 '행복'이었습니다. 실제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불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55)붓다의 실천적 행복론
四聖諦(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도 합니다.
1나는 괴로움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단계(알아차림)
2괴로움이 일어나는 얼개를 아는 단계
3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고 나도 거기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단계
4훈련법을 실천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 가는 단계
(56)苦의 원뜻:
산스크리트어 원문인 'Dukkha'는 車軸과 車輪 사이의 틈에 탈이 생겨 잘 돌아가지 않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요컨대 무엇인가 잘 안 되고 있는 상태, 불만족한 상태, 어긋나 있는 상태, 조화롭지 않은 상태,안정이 안 돼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58)우리 인생은 무엇이 행운이 될지 최후의 최후까지 알 수 없습니다.
(59-64)괴로움의 원인 알아내기:
원인은 無明입니다. '무명'이란 무지한 상태, 곧 알아채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여러 가지 일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쫓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속의 욕망을 좇는 일을 貪慾, 곧 탐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욕망에 쫓긴 나머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나이면서 내가 아닌 상태'가 양적으로 확대돼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화나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라는 감정은 방향이 바뀐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자신을 멈출 수 없는 상태라면, 화는 자신에게 불쾌한 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충동에 지배 당해 스스로를 멈출 수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 완벽히 독립적인 존재란 없다-
(70-71)空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철두철미 조건 지어진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늘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에 늘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실체가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를 자꾸 줄여 가면 '空' 하나로 집약됩니다. 하지만 이 공이 만만치 않습니다.한편 공의 뜻을 머리로 이해한다거나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의 나날살이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불교 따위 아무리 공부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空을 깊게 이해하면 반드시 삶의 방식이 바뀝니다. 그것이 '空'이자 '空의 힘'입니다.
(74)붓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습니다.사람은 어떻게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75-76)반야심경의 세 가지 열쇠 말: 괴로움ㆍ공ㆍ반야
공과 괴로움은 한 짝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주제는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78)괴로움과 공과 반야, 이 세가지가 키워드입니다. 이 세가지를 알면 불교를 알았다고 해도 좋습니다. 다만 그 앎에는 깊고 낮음이 있어 그것을 깊이 체득해 가는데 붓다조차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79)반야의 지혜란 무엇일까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화나거나 슬플 때 '내가 화났구나, 내가 지금 슬프구나'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매순간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느끼는지를 아는, 자각하는 지혜가 '반야의 지혜'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이 지혜만이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는 물음에 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81)알아차림,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는' 것은, 곧 自覺은 그 대상과 하나가 돼 있을 때는 불가능합니다.예를 들어 자신이 화 자체가 돼 있을 때는 '나는 화가 나 있다는 걸 아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로부터 몸을 빼지 않으면 안됩니다.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82)자아란 정신과 몸의 복합체:
자아가, 나 자신이 '공'하다는 것은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도 '공'하고 몸도 '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실체가 아닙니다.
(85-86)동물의 경우 행동의 거의 100%가 자동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고정돼 있는 행동을 '본능'이라고 합니다.
인간 또한 스스로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지만, 실상은 과거에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바깥으로부터의 정보에 자동적인 반응을 반복할 때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다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무의식=무자각=無明)'
뿐입니다.
내 감정은 내가 아닌 것에 촉발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나는 내가 아닌 것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바뀝니다. '空'입니다.
(8791)'色'은 곧 '空'이다
우리는 늘 상상하고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의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최대원인 중 하나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을 생각한다라는 말입니다. 곧 이미지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불러낸 이미지일 뿐인데, 그 이미지는 진짜 이미지와 같은 힘으로 우리를구속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반응을 일으킵니다.
(97-99)空은 곧 色이다.
우리는 진짜로 실재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을 비롯한 정보에 반응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조금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우리가 틀림없이 실재하고 있는 것에 반응하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실제로는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반응이 그 대상의 현실성을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희망
바깥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108)'내'가 바뀌면 '바깥세계'도 바뀐다.
우리의 화나 기쁨이나 슬픔은 모두 최종적으로는 나로부터 나옵니다. 바깥의 일들은 우리의 감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줄 뿐입니다.어디까지나 '나'가 주체입니다.나에 변화가 일어나면 무엇에 화를 내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을 기뻐할것이냐 하는 바깥세계에 대한 나의 반응이 바뀝니다.바깥을 향한 나의 반응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바깥세계 자체가 바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나와 바깥은 서로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여기서 구원의 가능성이, 길이 열립니다.
(110)만약 우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으로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남의 칭찬 따위를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113)반야의 지혜에 따라 비로소 삶이 바뀐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12단계--
(붓다의 12연기설)
1.無明  무지, 어리석음
2.行     뭔가를 만드는 잠재적인힘
3.識     인식
4.名色 정신과 물질
5.六入 감각의 6가지 영역
6.觸.    접촉
7.受.     감각
8.愛.     집착하는 생각
9.取.     집착하는 행위
10.有.   생성
11.生.   출생
12.老死. 늙음과 죽음 괴로움

--알아차림
--멈추어 냉정하게 바라볼 때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삶을 바꾸는 여덟 가지 바른 길:
(8 正道)
1.正見. 바르게 보기
2.正思. 바른 생각
3.正語. 바른 말
4.正業. 바른 행동
5.正命. 바른 생활
6.正精進 바른 노력
7.正念 바른 알아차림
**이 훈련은 '지금, 여기'에 사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8.正定 바른 마음의 통일

이것의 목표가 '반야의 지혜를 완성하는 것', 곧  '반야바라밀다'임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130)마음을 맑게 하면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청정하면 집착이나 분노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티없이 갖는 것이란, 자신의 마음에서 집착이나 분노의 因을 없애가는 것을 말합니다. 因이 없는 곳에는 果도 없습니다.
(138)正定(삶을 바꾸는 8가지 방법 중 여덟 번째)
8정도 가운데 正念과 함께 중요한것이 正定, 곧 명상입니다.
이것은 禪이라고도 하는데, 명상의 목적만 알면 어디서나 어떤 자세로 해도 됩니다.
명상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깥세계에 조건 지어져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의 나날의 행동을 그 조건지어짐으로부터 풀어내는 데 있습니다. 조건 지어짐이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하는 일은 '지금, 여기', 현재에 사는훈련이라고 해도좋습니다.
(139-145)수상행식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활동 네 가지를 말함
1.受 감각작용. 보는 것
2.想 표상(이미지)작용, 기억
3.行 마음과 몸이 조건지어지는 작용, 행동
4.識 인식작용, 우리를 괴로움에 빠트리고 그것을 돕는 정신 활동

 

명상이 필요한 것은 이렇게 조건 지어져 있는 일상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想이 行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것이 명상입니다.
우리는 나날의 삶 속에서,예를 들어 10분이나 20분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고요히 자기 정신과 하나가 되어 지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 안 되는 그 시간이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가는 큰 힘을가지고 있습니다.
호흡을 의식하는 것, 들고나는 숨에 의식을 두는 것만으로도 바로 자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받아들임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줄까?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151)자신에 집착하고 있을 뿐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세월이 가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줄까요?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가 나를 받아들여 줄까요? 자신이 인정해 주지 않는데 나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이 대목이 나를 뭉클하게 한다.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귀히 여겼나, 남의 눈에 비친 내 모습만을 생각하고 살지 않았나,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님도 네 몸 사랑을 먼저 말씀하셨네요.)
(152-153)자신에 대한 태도와 남에 대한 태도는 하나입니다. 나는 사랑스럽다 여기면서 남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 ?그렇지 않은 인간도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을 받아들이는(자기를 향한 요구를 버리는)행위는 기적같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남을 향한 요구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요구 없이 남을 대할 수 있으면 상처를 입는 일 또한 없습니다.요구를 버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읽기
우리에게는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168-171)<반야심경> 끝 구절:
揭諦揭諦(아제아제)
가고가서
婆羅揭諦(바라아제)
저 언덕에 이른 자여
婆羅僧揭諦(바라승아제)
저 언덕에 완전히 이른 자여
菩提娑婆訶(모지사바하)
깨달음이여, 경사로세
[저자의 해석:우리 모두는 벌써 강을 건넜다. 여기가 저 언덕이다.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

자신을 받아들일 때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긍정하는 주문이 필요합니다. <반야심경> 전체가 이 주문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최종적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분량도 적고 불교용어를 배제하고 쓴 글이라 읽을 만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간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난 이쯤에서 하차하고 싶다. '나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명상을 통해 하면 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