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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전영애 (3) 309~495쪽

맑은 바람 2024. 11. 8. 22:50

(309) 베르톨트 브레히트 (1898~1956)
참여문학의 선봉인 극작가이자 시인/독일 아우크스브르크 직물공장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뮌헨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나치집권 전에 덴마크로 망명/스웨덴, 핀란드, 소련을 거쳐 미국 할리우드에 이르기까지 십오 년간 망명생활을 하고 1948년 동베를린으로 귀환, 동독시단의 대부적 존재가 되었다./배우인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하여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을 상연했다./이 희곡들은 그의 서사극 이론을 바탕에 깐 작품들로 사회의 변혁을 요구하며 당대를 풍미했고, 아직도 변혁에의 요구가 큰 곳에서는 어디서나 읽힌다.
*베를린앙상블--1949년 베를린에서 창립한 독일 극단

*세상을 바꾸어보려 한 문인--브레히트의 베를린
(325)슈프레 강둑, 베를린 앙상블 앞 공터의 브레히트 동상 그리고 세 개의 말씀의 기둥에 새겨진 글씨:
"모든 예술은 예술 중의 예술, 삶의 기술에 기여한다. 예술가는 사회에 대해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를 책임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327)브레히트의 서재:
공자의 초상과 모택동의 글이 걸려 있다. 그리고 벽에는 일본 가부키의 가면이 몇 개 걸려있고, 생시에 이미 떠놓고. 흡족하게 바라보았다는 자신의 얼굴 석고상도 있다.

(331)볼프 비어만 1936~
정치의식이 두드러진 시를 거침없이 스스로 쓰고 작곡하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가수시인/함부르크. 유대인 노동자 가정 출신/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으며 어머니는 열성적인 공산당원이었다./17세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감/서독 쾰른에서 연주 후 동독 당국에서 국적을 박탈하여 이내 서독에 머물게 됨/시집<철사줄 하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혀로><프로이센의 이카루스><거꾸로 돈 세상--나 그것 보기 즐겁네>등이 있다.

비어만 시집 <철사줄 하프>의 표지 삽화

*분단 독일의 가수시인--비어만의 베를린


<프로이센의 이카루스>
1.
거기, 프리드리히가 얕게
물위로 걸음을 내딛는 곳,
   거기 슈프레 강 위에 걸려 있는
바이덴담교. 거기 멋진 프로이센 독수리의 모습 그대 볼 수 있다
   내가 난간에 서면
그럴 때면 거기 프로이센의 이카루스가 서 있다.
쇳물 부어 만든 잿빛 날개를 달고
두 팔이 하도 아파
그는 날아오르지 못한다--그는 추락하지도 않고
바람을 일으키지도 않고--녹아버리지도 않는다
   슈프레 강 위 난간에서는
---이하 2, 3 내용 생략--

 

(346)2005년 세계작가 포럼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비어만은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는 호텔방에 전영애 작가를 초대해서 4시간 반 동안 자신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348)여섯 살이던 제 2차 세계대전 말, 오만여 명이 타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찌 자신이 투사가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내가 쓰는 시들이 제아무리 절실함에서 쓰였다 하여도. 아직, 언제까지고 아직, 시가 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349)고트프리트 벤 1886~1956
만스펠트의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마부르크, 베를린 등지에서 공부하고 세계대전 중에는 브뤼셀에서 군의관으로 종군하였으며 전후 베를린에서 피부비뇨기과 의사로 개업함(1917~1935)/1912년, 세기말의 가치붕괴와 극단적인 허무주의가 반영된 얇은 팸플릿 시집<시체공시소 외>를 펴내 독일 詩史에 한 획을 그으며 등장했다./나치시대에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렸으나 그럼에도 전후 독일 서독 시단의 가장 큰 기둥이 된 인물이었다.

*극렬했던 모더니즘--벤의 마부르크
(351)나에게 벤의 시는, 난해하기로 유명할 만큼 응축된 세계여서, 하나의 세계, 아니, 거의 하나의 우주라할 量感으로 다가왔었다.
휘말렸던 역사의 소용돌이와 그가 겪은 개인사의 무게가 막중하게 실려 있으면서도 벤은 그 모든 것 너머에다가 유례없을 만치 치열하게 홀로, 시의, 美의 제국을 터 닦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352)내 마음에 다가온 평범한 시구 하나:

<더 외로운 적은 없어라>
더 외로운 적은 없어라, 8월보다
충족의 시간--산녘에는
붉은 불빛, 금빛 불길
하지만 네 뜰의 환희는 어디에 있는가?

맑은 호수들, 부드러운 하늘,
깨끗하고 아련히 빛나는 밭들
하지만 네가 대표했던 제국의
승리와 승리의 증거들은 어디에 있는가?

온갖 것이 행복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곳
포도주 향기 속에서, 사물들의 도취속에서
눈길을 나누고 반지를 나누는 곳--
거기서 너는 反 행복, 정신을 섬기고 있구나.

(369)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
네카 강변의 작은 마을 라우펜에서 태어나 튀빙엔 신학교에서 헤겔, 쉘링 등과 교유하며 공부했다/후반생을 광인으로 살았음에도 가끔씩 써놓은 시편들에서 인생의 철리를 꿰뚫는 혜안이 비쳐나오는 태생적인 시인/장편소설 <휘페리온>과 희곡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있다.

*맨머리로 뇌우 속에 섰던 시인--휠덜린의 네카 강변
(372)광기에 빠져들기 직전, 삼십육 세의 횔덜린은 생을 다 살고 되돌아보는 듯한 짧은 시 한 편을 쓴다. 그의 생애는 반으로 가른 듯 둘로 나누어진다.열정으로 가득했던 생의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 36년을 덮은 어둠이 몰려오기 직전 생애의 꼭 가운데 지점에서였다.

생의 절반

누런 배들과 함께
야생 장미로 가득차
땅은 호수로 드리워 있다
너희 아리따운 백조여
입맞춤에 취해
머리를 담그는구나
성스러이 맑은 물속으로.

아아, 어디서, 내가 구할까, 겨울이
되면, 꽃을, 또 어디서
햇살을,
땅그림자를?
장벽들이 서 있다
말없이 차갑게, 바람 속에
깃발들이 쇳소리를 내고 있다.

(375) 인생 행로
보다 큰 것을 너 또한 뜻하였다, 그러나 사랑이
우리 모두를 꺾어내리고, 고통이 더욱 세차게 굽혀놓는다.
  그렇지만 우리의 화살은 헛되이
온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위로 가든 아래로 가든!  성스러운 밤에,
말없는 자연이 이루어지는 낮을 생각하는 그때
지배하지 않는가, 가장 가파른 명부에서도
한가닥 바름이, 옳음이 아직도 지배하지 않는가?

그것을 나는 경험하였다. 그럴 것이, 인간 스승처럼
그대들 천상의 힘이여, 그대들 만물을 유지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알기로, 조심스럽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는 법이 결코 없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천상의 아들은 말한다.
실하게 자양분을 얻어서, 모든 것에대한 감사를 배우라
그리고 자유를 이해하라
불쑥 떠나는 자유를, 어디로든 원하는 곳으로.

(381)횔덜린의 사랑:
시련은 사랑으로부터 왔다.열정적이고 가난했던 시인 횔덜린은 공부를 마치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의 집에서 그는, 은행가의 아내 주제테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
(그후 그 집에서 쫓겨나 스위스와 프랑스 등지를 떠돌다 광인이 되어 죽었다)
(383-384) <휘페리온의 운명의 노래>는 모두 3연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3연은 인간의 운명을 다룬다.마지막 연인 이 3연은 3행부터 마지막 행까지는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에겐
  쉴 곳이 주어져 있지 않네.
    떨어지네, 사라지네.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물이 암벽에서
          암벽으로 내동댕이쳐지듯
             하나의 시각에서 다음 시각으로
                여러 해를 두고 불확실함 속으로

그 모든 추락의 귀착점--"불확실함"은 압권이다.  무수히 인용되는 구절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 삶이 어디에 이르는가. 무언가를 알겠다고, 무언가를 얻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는 어디에 이르는가.  마침내 가 닿는 곳은 어디인가.다만 불확실함으로의 추락이라고 한다.

(387)프리드리히 쉴러[1759~1805]
슈트트가르트 부근의 아바하에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제후가세운 사관학교 칼스슐레에 입학하여 의학 공부를 하였으며 그곳에서 쓴 <군도(1782)>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 오래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괴테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독일의 국민문인/많은 시를 썼으나 근본적으로 드라마 작가이고, 미적 교육을 통해 국민 의식을 제고하려 괴테와 함께 힘썼다./역사공부에 매진하여 후일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대학 역사학교수가 되었다./걸작드라마 <돈 카를로스><빌헬름 텔><마리아 슈트아르트><오를레앙의 처녀><데메테리우스>등이 있다.

*우정에 놓은 기념비, 환희의 송가 '기쁨에게'--쉴러의 마바하
(393)쉴러의 생가에서:
유일한 어린시절 유품이라는 아기저고리는 이리저리 기운 자욱이 선명했다. 그 생애 또한 어느 정도는 저러했다.불굴의 정신이 깃들지 않았더라면 누더기처럼 누추했을, 그냥 사라졌을 그 생애 속에서 한 시인이 이루어낸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397)쉴러의 대표작 <기쁨에게>는 친구 쾨르너가 라이프치히 집으로 초대하여 일 년 반을 살게해 준 데 대한 감사의 시이다.

(407)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
시인/60여 년을 쓴 대하드라마 <파우스트>의 저자/문학의 모든 장르를 두루 망라하는 작가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교육,문공,산업,세무 네 부서를 담당한 정치인이며, 광학,동물학, 식물학,기상학 등 자연과학의 여러분야를 아우른 과학자이고. 미술, 음악, 연극 등. 문화예술 전반에도 큰 기여를 했다./그때까지 유럽에서 후진성을 면하지 못했던 독일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렸다./긴 생애 동안 매일 새벽 다섯 시 반부터 오후 한 시경까지 글을 쓰고 그 다음에 다른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괴테의 일터, 바이마르 궁전

큰시인의 집, 괴테하우스--괴테의 바이마르
(413)종이시대의 가장 생산적인 작가:
괴테는 그침없이 일했다. 괴테 사후 얼마 안 되어 나온 바이마르판 괴테전집은 143권이고, 탄생 250주년 즈음에 나온 프랑크푸르트 판 전집은 44권, 뮌헨 판은 33권이다.각 권의 분량이 종종 권당 1500여 쪽에 육박한다.
(413-415)바이마르와의 인연:
1775년 11월 26살의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에 왔다.잠깐 머물 작정이었다.---그렇게 온 곳에서 괴테는 1832년 82세로 죽을 때까지 머문다.---1786년 9월 3일 새벽, 괴테는 문득 도망치듯 로마로 떠나 2년을 머물기도 한다.---괴테가 이곳에 머문 것은 무엇보다 안나 아말리아 모후라는 똑똑하고 야무진 여성 덕분이다. 이 사람은 16세에 시집와서 18세에 과부가 되었는데, 그녀는 아들들을 잘 키우고자 독일의 당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바이마르로 불러모았다.괴테,쉴러,헤르더,빌란트 등 쟁쟁한 '정신'들이 그들이며 이 작은 궁정, 작은 소공국 바이마르가 '문화'를 대변하게 된 것은 그 덕분이다.
(415-417)괴테하우스:
제후가 신분에 걸맞은 집을 내주었다.---가장 흥미로운 곳은 괴테 자신만의 공간이다.이 공간은 서재와 육천여 권의 책이 쌓인 장서실, 그리고 서재에 딸린 작은 침실로 이루어져 있다.침실은 바로 곁의 하인방보다 작다.짧은 휴식을 취했을 곳이고, 또한 마지막의 긴 휴식---임종을 맞은 곳이다.
(418-419)<파우스트>:
20세 청년 시절부터 임종 직전까지 60여 년을 두고 쓰인 大作/악마와 계약을 맺어 영혼을 팔아 24년간 지상의 온갖 향락을 누리다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단순한 기독교적 권선징악의 줄거리를 괴테는 '노력하는 인간'의 거대한 드라마로 만들었다./단지 향락의 대가로 영혼을 파는 것이 아니다. 파우스트는 영혼을 걸고서라도 붙들어두고 싶은 어느 만족의 순간에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라고 외치며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주어야 한다./이는 바로 한없는 욕망의 추동을 받는 근대인의 드라마를 갈음한다./이 대작은 비할 데 없이 정교한 운문으로 쓰였다.12111행 전체가 운율의 보고로 불릴 만큼 다채로운 운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전체 12111행이 한 글자도 가감없이 공연된 완판본 공연은 死後 167년이 지난 1999년에야 이루어졌다./21시간의 마라톤 공연이었다.
(420)그 방대한 연구와 창작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하나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면 --'경탄'하는 능력일 것이다.
괴테에게는 어떤 나이에든 어떤 상황에서든 세상과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굳어지지 않은 채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았고 삶의 어느 시기에건 바로 자기 자신을 넘어섰고, 그럼으로써 문학사에도 새로운 한 시기가 열렸다.
(425)괴테의 名句:
**감사할 줄 모르다면 그대가 나쁜 사람이고 감사할 줄 안다면, 그대의 형편이 나쁜 것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그대 나만큼 오래 떠돌았거든 나처럼 인생을 사랑해 보라.

 

**나의 인생을 몽땅 가져가거라, 내가 살아온 그대로
남들은 잠을 자서 그대의 취기를 깨우는데 나의 취기는 종이 위에 적혀 있다.

*큰 시인을 빚어낸 곳--괴테의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생가


(432)프랑크푸르트는 괴테의 생가가 있는 곳/2차세계대전 당시 폭격에 대비해 집 치수를 정확히 재 놓고 집기들을 옮겨 놓았다가 전후에 그대로 복원했다
(433-434)집입구의 샘물 뒤에 적힌 시:
노래와 형상--<서동시집> 중에서

그리스인들이야 그 진흙을
눌러 모습을 빚으라지
자신의 두 손이 빚은 형상에게서
그 황홀함을 높이라지

하지만 우리는 즐거이
유프라테스에 손을 넣어
그 강물에 속에서 저어본다네
물결 따라 물결 거슬러.

그렇게 나, 영혼의 불길을 끄면
노래, 노래 울려퍼지리

시인의 맑은 손이 길으면
물이 둥글게 뭉쳐지리

---시인의 맑은 두 손 안에서 저절로 뭉쳐진 물덩이, 물의 球는 압축된 시인의 꿈 같다. '물의 구'라는 소재는 인도에서 왔지만, 괴테를 통하여 시적 은유로 승화되었다.이 빛나는 은유는 이곳이 시인의 집의 입구임을 아름답게 상기시킨다.--

(434-448)<시와 진실>에 대해:
시와 진실은 그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맞물린 시대를 보여주겠다는 선명한의도로 "절반은 역사적으로, 절반은 허구적으로"쓰인 독특한 자서전이다./허구의 편지로 시작되는서문에서부터 픽션의 역할이 두드러져보이며 픽션은 사실 이상으로 진실을 밝혀주는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다./이 <시와 진실>의 시작 부분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여전히 자서전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게렘스'라는 테라스 공간에서 거리를 향해 접시를 내던져 깨트리며 놀던 이야기/아버지가 법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자녀교육에 전념한 일/어리고 명랑하고 낙천적인 어머니 이야기/그러나 괴테는 아버지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빚어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시와 진실>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세상을, 또 배움과 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꼬마, 소년, 청년 괴테의 모습이 이집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창조적 종합능력은, 어려서든 나이들어서든 괴테의 가장 큰 장기였던 것 같다./소년 괴테는 히브리어를 배울 때 훤히 아는구약을 히브리어로 읽고 구약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정리한다./제4장은 노년기에 다시 쓴 재구성이긴 하지만 <시와진실>의 빛나는 부분 중 하나이고 개인적으로 내가 읽어본 성서에 대한 그 어떤 글보다 선명하게 구약을 전달해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복잡하고 방대한 세상사의 핵을 짚어내어 자신의 말로 전달하는 능력, 또한 사람의 마음을 오가는 무수한 움직임의 핵심적 가닥을 보아내는 능력, 이 역시 내내 괴테의 장기였다./칠 년 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괴테의 집에 거주했다.그때 만난 프랑스장군 드 토랑 백작은 어린 괴테에게 자신의 엄격한 아버지와는 달리, 지극히 긍정적인 아버지상이자 괴테의 첫 친구이기도 했다./4층 괴테의 옆방에는 할머니가 어린 괴테에게 선물한 인형극 상자가 있다. 인형극 놀이는 괴테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었고 훗날 대작 희곡 <빌헬름 마이스터>, <파우스트> 같은 작품을 낳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450--451)26세에 끝낸 <시와 진실>의 끝부분:
자, 자! 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영들의 채찍을 받은 듯 시간의 태양말들은 우리들 운명이 가벼운 수레를 끌고 질주한다.하여 우리들에게 남은 것은, 용기있게 마음 다잡고 채찍 굳게 쥐고 왼편, 오른편에서, 여기 돌, 저기 낭떠러지에서 바퀴를 돌리는 일뿐, 어디로 가는지야 누군들 알랴? 어디서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렇듯 혼신의 힘으로 알 수 없는자신의 운명에 몸을 내맡김으로써 열어갔던 세계, 바로 예술가이자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무엇보다 시인이었던 괴테의 생애이다.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는 내게 언제든 이런 인물이 스스로를 치열하게 빚어간 작업장처럼 보인다.


*길위의 집, 카사 디 괴테--괴테의 로마
(456-457)<이탈리아기행>:
"모든 것이 밀려들며 다가온다"서른일곱. 아직도 젊다. "큰일들에 매진해 보고 싶다, 배우고 교육받고 싶다.마흔 살이 되기 전에"
이탈리아라는 하나의 세계로 그를 떠민 것은 이러한 초조함이었을 것이다. 일국의 재상이, 기분전환으로 관광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밤기차 속에서 읽은 <이탈리아기행>에서, 괴테가 찾아다니고 머물렀던 작은 도시 비첸차에 있는 팔라디오의 건축물/젊은날 괴테의 분신과도 같았던 불우한 천재시인 토르콰토 타소의 감옥과 무덤을 만난다./지금은 열 시간 조금 넘은 시간이면 닿을 곳을, 당시는 두 달에서 이틀 모자라는 시간이 걸렸다./책을 덮은 후 괴테가 매료되었던 팔레르모의 아름다운 정원들, 또 괴테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시칠리아 앞바다의 소용돌이가 잔상으로 남는다/"로마에 온 날부터"괴테는 "두번째로 태어난 것 같다.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괴테는 이탈리아 전역을 두루 여행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다. 그 2 년은 자신의 인생을, 문학사를 바꾼시기였다.
(462)'로마의 비가'  중에서:
"그대 하나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오 로마여, 하지만 사랑이 없이는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로마 또한 로마가 아니다"
(471~472)미뇽이 부르는 그리움의 노래:
미뇽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신비로운 인물/빌헬름 마이스터는 이탈리아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그대 아시나요, 레몬꽃 피는 나라
짙은 잎새 속에서 황금빛 오렌지가 이글거리고
푸른하늘에서 한가닥 미풍이 불어오는 곳
치자꽃 고요히, 드높이 월계수 서 있는 곳
그대 아시지요,
                      그곳으로! 그곳으로
그대와 함께, 오 나를 지켜주시는 이여, 가고 싶어요.

이 남국이 한 시인의 마음에 부어넣은 것들은 오래오래, 그의 긴 나머지 생애를 두고 이런저런 모습으로 응결되었다.

*길 끝의 집, 노시인의 마지막 사랑--괴테의 마리엔바트
(475)마리엔바트:
노시인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체코의 도시 마리안스케 라즈네, 독일어로 마리엔바트/<비가>와 그에 얽힌 일화로 유명해진 도시
(476)<비가>
삶의 끝에서 어둠으로의 문턱을 한순간 햇살처럼 밝혔던 환한 존재를 놓쳐버리고 돌아서는 괴로움을 담고 있다./손에 잡힐 듯 빛나는 영상 하나를 잃고,빈손으로 다시 빈집으로 되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빈 마차 안에서 달력종이 빈곳에다 정신없이 써내려간 시이다./빈집으로돌아와서는 곱게 淸書해 놓은 뒤에, 시인은 병이 든다.

74세의 괴테가 정식 청혼했던 체코 귀족가문의 딸 올리케 폰 레베초브, 당시 19세, 후에 수녀원장이 됨


[에필로그] 여주시 강천면 걸은리--마침내 찾은 나의 거처.
(493)다만 몇 시간을 여기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수 있기 위해,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한밤중이든 꼭두새벽이든 나는 먼거리를 달려온다.여기 오면 숨이 쉬어진다.숨을 고를 수 있다. 이 조그만 집 다락에 오그리고 있노라면 시들었다가 다시물병에 담가둔 꽃처럼 내가 조금씩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494)덮쳐오는 어둠 앞에서 작은 등불처럼 서 있는 집. 그런 집의 주인이라는 황감한 행복을 내가 이즈음 누리고 있다. 온세상을 헐떡이며 달려온 길 끝에서.  세상살이의아픔이야 그 어디에선들 사라질 리없이 글에 배지만.
이런 사치를 하늘이 내게 준 것은,내게 써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아서일 것 같다.

작가의 작업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주로 밤기차를 이용해 <시인의 집>을 찾아다닌 그녀, 내 안에 살고 있는 그녀의 글이라 500 쪽에서 다섯 쪽 모자라는 엄청난(?) 분량의 기행문을 지루한 줄 모르고 읽어냈다.

이 大役事를 마친 내게 칭찬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