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이야기/겨울

까치밥

맑은 바람 2008. 9. 17. 22:51

겨울햇살이 거실 마루까지 들어와 찰랑대는 한낮,  감나무 가지에 아까부터 참새들이 날아와 정신없이 감을 쪼아 대고 있다. 까치밥으로 스무 너덧 개 남아 있던 것이 어느새 반 이상이 줄었다.

그동안 거실에 앉아서 보니 정작 까치는 안 보이고 어느 날은 비둘기들이, 어느 날은 참새들이 날아든다.

처음엔 한두 마리가 조심스레 날아와 먹기 좋은 자리를 잡느라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며 조바심을 하더니

이제는 비둘기고 참새고 떼를 지어 날아와 제각기 한자리씩 차지하고 느긋하게 쪼아 먹는다.

이제 소한이고 경칩이 아직 멀었는데 까치밥이 눈에 띄게 줄어드니 걱정이 된다.

좀 더 남겨둘 걸. 남편의 말을 귀담아 들을 걸.


 붉노랗게 물든 잎들도 거의 다 져버린 어느 날, 감이 다 익었는데 왜 안 따느냐고 남편에게 성화를 댔더니,

날을 잡아 마지못한 듯 감을 따며 하는 말이,


“이 동네 사람들은 감을 따지 않고 그대로들 두든데. 우리만 이렇게 휑하게 따는 거 아냐?”

“아냐, 그 사람들도 감 따는 거 내가 봤어. 까치밥을 좀 넉넉히 남겨 논 것뿐야.”


 몇 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오던 해에는 감이 가지가 휘도록 열려서 근 두 접은 실히 되게 감을 땄다.

거실에 수북하게 쌓아놓고 예쁘게 깎아 실에 하나하나 꿰어 베란다에 널었다. 한 열흘 지나니 분이 뽀얗게 나는

곶감이 되었다. 아주 가까운 이들 조금씩 맛 뵈고 냉동실에 넣어두고  겨우내 아껴가며 그야말로 ‘곶감 빼먹듯’

먹으면서 단독주택에 사는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했다. 물론 그때는 까치밥이고 뭐고 없이 가지가 텅 비도록 땄다.

 생각 있는 까치가 와서 보았더라면 얼마나 얄미웠을까? 인정머리 없는 새 주인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을 것이다.


 사실, 이 집과 인연을 맺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새들 때문이었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가족이 함께 나서서 집을 보러 다녔는데, 지금 사는 집 동네로 들어서니 사위가 조용한데 유난히 새들의 노랫소리가 영롱하게 들리는 게, 갑자기 무슨 산중에라도 들어온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식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사한 뒤로 골목을 천천히 들어오며 동네를 살피니 집집마다 크고 작은 나무들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고 감나무가 한 그루씩 있는데 가을이면 그 붉고 탐스런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새들의 겨우살이가 풍족했으리라.


 올 가을에는 내 몫보다 까치밥을 먼저 헤아려, 감은 그저 따는 시늉만 하고 비둘기 참새 까치들에게 긴 겨울을

걱정 없이 나도록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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