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을 만나려거든 정약용, 박지원, 이덕무 등의 조선 지식인의 글들을 보라 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들이 기록한 한문으로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한글 번역문에서도 그들의 생각과
기분을 알 수 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언어가 달라 온전히 그들의 글의 향기를 느낄 수 없음이 아쉽기는 하지만.
48편의 짤막한 단상들로 엮어진 이 책엔, 사물을 관조하여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는 조선지식인의 ‘고상한 품격’과 ‘우아한 정취’가 담겨 있다.
한때 조선의 이름난 정치가들로 명성을 날린 사람들이지만 일에 대한 보람과 기쁨 등을 언급한 글은 보이지 않는다.
귀양살이 할 때, 산중에 홀로 머물 때 꽃(매화, 국화, 연꽃-)과 나무(대나무, 밤나무, 소나무, 잣나무-)와 풀(난초)과 곤충(왕거미, 벼룩)과 새(꿩, 까치)들 그리고 자연현상(풀숲을 지나가는 바람, 천둥소리, 계곡물)에서 삶의 교훈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그 아름다움에 취하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인생은 바람 같은 것
뛰어난 재주와 웅변술, 용맹과 지모, 공적과 훈공, 부유함과 사치스러움 같은 것도 수천 년 안에 높고 얕게 울리고 흔들리며 넓고 크게 돌고 돌아 사라져 버리니 바람이 허공에서 일어났다 사라져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사람도 바람이고 나도 바람인데 유독 나만 바람의 해를 입겠으며 옛날도 바람이고 지금도 바람인데 단지 이 집에만 바람이 불겠는가?
바람이 거처한 곳에 길이 있다. 그러므로 막막한 중에 정신을 모으고 빈곳에 형체를 맡겨서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더라도 거스르지 말고 거슬러 오더라도 맞서지 않는다면 바람 또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편안함도 없고 흔들림도 없고 바람도 없고 깃들 것도 없다면 또한 모면할 것이 무엇이 있어서 기뻐하며 잃을 것이 무엇이 있다고 두려워하겠는가? -왕 성순<麗韓十家文抄>
**창경궁에 있는 사도세자의 그림
창경궁 환경전 서쪽에 ‘景春’이라고 하는 전각이 있다. 우리 숙종대왕과 인원왕후께서 머무셨던 곳이고 그 이후로 돌아가신 내 아버님께서 그곳에 거처하셨다. 또한 내가 태어난 곳도 바로 경춘전이다.
경춘전 동쪽 벽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은 내가 태어나기 전날 밤에 돌아가신 내 아버님의 꿈에 용이 침실로 들어왔는데 나를 낳고 보니 예전 꿈 속에서 보았던 용처럼 생겨 손수 벽에다 용을 그려 아들을 낳은 기쁨을 드러내신 것이다. 지금 그 그림을 보아도 먹물이 촉촉이 젖은 듯하고 뿔과 비늘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림을 바라보며 항상 아버님의 손놀림을 느낄 때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와락 눈물이 쏟아지곤 한다. 더불어 이렇게 기록을 남겨 훗날 사람들이 이 그림의 가치를 잘 알아서 감히 더럽히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자 한다. -정조대왕<弘齋全書>
**욕심과 근심에서 벗어나 덕을 가까이
내가 벼룩을 꺼리면서부터 養生(건강관리)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기쁨 분노 욕심 두려움 근심의 다섯 가지 성정을 타고나 바탕을 이루고 모든 지각을 모아 마음이 된다. 그래서 남녀가 거처하는 집, 음식의 맛과 영양, 부귀공명은 사람에게 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을 해롭게 한다.
어찌 벼룩만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겠는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 한 가지로 뚜렷하면 온갖 사물을 부릴 수 있고 모든 해로움에서 벗어나 홀로 설 수 있다. 반면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누어져 있으면 온갖 사물이 나를 부리고 모든 해로움이 한꺼번에 생겨난다.
참으로 한 가지로 얻어 덕을 두텁게 품고 덕을 품어 온갖 사물이 해를 입히지 못하면 양생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강희맹 < 續東文選 >
*속동문선:1518년 간행된, 성종, 중종 연간의 시문집
**‘나’를 지키는 일만한 것이 없다
나(吾)는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좋아해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가깝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않을 것 같다가도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으로 달아나는지 알 수조차 없다.
이익과 녹봉으로 유혹하면 가버리고, 위엄과 재앙으로 겁을 주어도 가버리고,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률만 들어도 가버리고, 까만 눈썹에 새하얀 치아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만 보아도 가버린다. 더욱이 한번 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도 없다.
이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나’다. 어찌 실과 끈으로 묶고 빗장과 자물쇠로 채워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약용<여유당전서>
**굶주림 속에서도 여유롭고 한가한 박 지원
집안에서 고요하게 지내다 보면 아무 생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세상사를 멀리하고 게으르게 지내는 데 익숙해져 다른 사람의 경조사를 찾는 일조차 아주 끊어버렸다. 바야흐로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지내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다. 자다가 일어나 책을 보고 또 책을 보다가 잠이 들어도 깨워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더러 하루 종일 실컷 잠을 자고 간혹 하루 종일 글을 써서 내 뜻을 표현하기도 한다.
나를 위하는 마음은 楊朱와 다름없고
세상 사람을 두루 사랑하는 마음은 묵자와 같네
살림살이가 어려워 밥을 굶기는 안회와 다름없고
집안에 죽은 듯 틀어박혀 있기는 노자와 같네
시원스럽게 탁 트인 마음은 장자와 다름없고
고요하게 선을 닦는 마음은 석가와 같네
세상사에 공손하지 않음은 柳下惠와 다름없고
술을 찬양하고 즐겨 마심은 劉伶과 같네
생계를 꾸리지 못해 밥을 빌어먹음은 한신과 다름없고
잠을 잘 자는 것은 100일 동안 깨어나지 않는 陳(진)摶(단)과 같네
거문고를 타는 것은 子桑과 다름없고
글을 쓰는 것은 揚(양)雄(웅)과 같네
자신을 옛사람에 비유하는 것은 제갈공명과 다름없으니 나는 거의 聖人에 가깝네
단지 키는 9척 4촌이나 되는 曺交보다 작고
청렴결백하기는 오릉에 숨어 가난하게 살다 죽은 오릉자에 미치지 못하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박지원 <연암집>
**혼자서도 잘 노는 법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책과 더불어 어울리면 된다.
책이 없을 때는 구름과 안개가 벗이 되고
구름과 안개조차 없다면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나는 비둘기에게 내 마음을 의탁한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가 없으면
남쪽 동네 회화나무와 벗 삼고
원추리 잎사귀 사이 귀뚜라미를 감상하며 즐긴다.
내가 사랑해도 시기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면 모두 나의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이덕무< 靑莊館全書 > *청장관은 이덕무의 호
2009. 1. 5(월)
'책 ·영화 ·강연 이야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루쉰 산문집 (0) | 2009.01.18 |
---|---|
19. 아Q정전 루쉰 (0) | 2009.01.15 |
17. 그림 읽어 주는 여자- 한 젬마 (0) | 2008.12.25 |
16.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 -조윤선 (0) | 2008.12.21 |
15. 징비록 -임진왜란 치욕사 (0) | 2008.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