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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영언- 김천택

맑은 바람 2009. 2. 4. 11:01

 

-내게는 아주 오래 된 책 한 권이 있다.

1946년 8월 30일에 통문관에서 발행한 책으로 1968년 11월 15일 청계천 어느 책방에서 구입했다.

가로 113 mm, 세로 150mm의 국반판인데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사이에 낡고 헐어 지금은 손을 대기만 해도 종이가루가 떨어진다.  물론 제본도 2쪽이 떨어져나갔다.

집안 여기저기, 책꽂이나 심지어 설합 속에 있는 어느 물건 하나 저절로 굴러들어온 것은 없다. 발품을 팔고 다니며 돈을 지불하고 샀거나 인연 지은 이들이 선물로 주었거나 내 육신과 정신의 힘을 쏟아 넣은 댓가로 받은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잊혀진 채로 집안 어딘가에 있다가 어느 날 그 존재가 드러나, 새삼 귀중한 대접을 받거나 아니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된다.

이 청구영언은 다행이도 전자가 되어, 책이 완전히 헐고 글씨가 흐려 보기 힘들어지기 전에 정리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청구영언이 책으로 엮어진 것은 220년 전(1946년 현재)이다.

2009년 시점에서 보면 283년 전인 1726년이다.

김천택의 호는 南坡(남파)이며 벼슬은 포교였다. 그러나 김수장, 김성기(거문고 연주자)와 함께 敬亭 歌壇(경정가단)을 대표하는 비범한 가객이자 唱曲家(창곡가)였다.

<靑丘永言(청구영언)>은 현존하는 시조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千十數 首(수)가 실려있어 명실상부한 最古(최고) 最大(최대)의 寶典(보전)이다.

고려 중엽 발생하여 조선 시대에 꽃을 피운 시조는 초기에는 황진이, 정철, 윤선도로 대표되는 상류층의 작가들이 많았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상류층의 경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경제 세력인 중인 계급에 자리를 내주었다. 따라서 이전의 도학적, 관념적인 분위기에서 향락적, 즉흥적이며 호색, 滑稽(골계), 사실에 치중하는 시조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이 두 부류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시조문학 작품집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여기서는 읽기 좋게 띄어쓰기를 하고, 내용은 이해하기 쉽고 많은 사람의 공감을 살 만한 것들을 추려 현대어로 바꾸어 놓았다.  '아래 아'는 현대 표기로 바꿈****


(1) 

松林(송림)에 눈이 오니 가지마다 곳지로다 (솔숲에 눈이 내리니 가지마다 눈꽃이 피었구나)


한 가지 것거내여 님 계신 듸 드리고져 (가지 하나 꺾어서 사랑하는 임께 드리고 싶네)

님 계셔 보오신 후에 녹아진들 어이리 (임께서 보시고 난 뒤에야 눈꽃이 녹아 없어진들 어떠리)


(2) 이황

淸凉山 육육봉을 아느니 나와 白鷗 (청량산 12봉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와 갈매기뿐)

白鷗야 헌사하랴 못미들슨 桃花이로다(갈매기야 소문내겠느냐마는 복숭아꽃은 못 믿겠구나)

桃花야 떠지지마라 漁子이 알까하노라(복숭아꽃이여,떠내려가지마라 사공이 알까 걱정이다)


(3)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헤내여(길고 긴 겨울밤의 한가운데를 도려내어)

춘풍 니블 아래 셔리셔리 너헛다가(따뜻한 이불 속에 깊이깊이 넣어두었다가 )

어룬 님 오신날 밤이여드란 구뷔구뷔 펴리라(사랑하는 임 오시는 밤에 마냥 펼쳐놓으리라)


(4)황진이

어저 내일이아 그릴 줄을 모로던가(아아, 나의 일이여, 그리될 줄을 몰랐던가 )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가지 말라 붙들었더라면 갔겠는가마는 굳이 )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나하노라(가시라 해놓고 그리워하는 마음 나도 모르겠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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