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 ·강연 이야기/책

밥벌이의 지겨움/김훈 에세이

맑은 바람 2012. 2. 9. 22:33

밥벌이의 지겨움을 단 한 순간이라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현재 진행형일 때 더욱 피부에 와 닿는다.

 

그의 글은 . 시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제대로 읽힌다.

읽기에 속도를 내려 들거나 마음이 무언가에 쫒기는 때에는 뭘 읽었는지도 모르는 게

김훈의 글이다.

읽었다 해도 맛없는 음식을 먹은 거나 같다.

 

그는 21C에 아직도 연필과 지우개로 글을 쓴다. ‘천연기념물감이다.

그는 운전면허증이 없을뿐더러 자동차를 몹시 기피한다. 그가 이용하는 것은 전철, 기차, 자전거,

튼튼한 두 다리--

그는 남자의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살고 싶고 마누라보다도 오래 살고싶다고 말한다.

그 말이 우습게 들린다. 그러면서도 일하기 싫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그러기에 책 제목도 <밥벌이의 지겨움>이라 드러내놓고 썼지.

그러나 누가 그를 놀고먹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의 글들을 보면 피를 잉크로 삼아 찍어 쓴 글 같구만--

 

<좋은 글귀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 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나여, 어째서 늙은 강물 옆에서 침묵하지 못하는가.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세월은 무자비한 불도저처럼 인간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다.

늙어서 표정을 잃어버리는 노인들이 있고 늙어도 표정이 넘치는 노인들이 있다.

그래서 노인의 얼굴은 그가 살아온, 생애의 지도이며 궤적이다.

 

**지도자가 귀족의 명예심을 잃을 때 서민의 지옥은 시작된다.

 

**민족의 생존을 유린하는 강자들을 향하여 저항과 事大를 반복하는 내 약소한 조국의

약소하지 않은 운명을 나는 긍정한다.

 

**좋은 소금은 폭양 속에서 고요히 온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날에 가장 향기로운 소금은 인간에게로 온다.

 

**봄에는 찰나의 덧없음에 미혹되는 한 微物로서 살아간다.

봄에는 봄을 바라보는 일 이외에는 다른 짓을 할 시간이 없다.

 

**벌레들은 11월에 모두 사라진다.

그것들은 이슬이 마르듯이 사라지고 주검의 자취를 이 세상에 남기지 않는다.

 

**항구로 돌아올 때 배는 바다로 나아갈 때처럼 가지런히 사려진 밧줄 뭉치를 싣고 있었다.

노동은 없었던 일처럼, 보이지 않았고 선원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잘 사려진 밧줄이 햇볕에 말라서 반짝거렸다. 고기비늘들이 그 밧줄에 말라붙어 있었다.

 

**가을 자작나무의 냄새는 향기롭다. 이 세상의 모든 나무들 중에서 자작나무가 가장 빛나는 나무다.

자작나무는 늘 빛 속에 서있다. 흔들리면서 떨면서 자작나무는 빛과 더불어 놀고 빛과 더불어 잠든다.

단풍드는 가을의 자작나무는 빛의 찬란한 제국을 이룬다.

자작나무의 잎은 바람에 날려서 땅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가장 아름답다.

자작나무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계절 속에서 하나의 완벽한 축복에 도달해 있다.

가을 자작나무 숲에서 나는 기다림 없는 시간을 꿈꾼다.

 

**뿌리 뽑히고 거덜난 삶 속에서 삶에 대한 신뢰를 발견하는 일은 늘 눈물겹다.

고난에 찬 삶을 통해서 말없는 실천에 도달한 그들의 삶은 성자의 삶처럼 보였다.

 

이런 일련의 글들이 그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각인시킨다.

기대 이상은 아니지만 재밌는 에세이다.(20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