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omy Day-
자꾸 가라앉는 기분을 추스르며 열무김치를 담갔다.
사러가고 다듬고 씻고 절이고 헹구고 하는 과정은 모두 영감이 했으니, 뭐 내가 담갔다고 말하기도
그러네~
하긴 풀물 쑤고 물고추 갈고 양파 다듬어 갈고 파 다듬어 썰고 멸치젓, 새우젓, 생강, 마늘, 소금 넣고
양념 국물 만드느라 두어 시간 꼬박 서서 일했으니 내가 담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모처럼 별러서 김치를 담그면서도 손 따로 머리 따로 가슴 따로인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그눔의 영화 때문인 것 같다.
<케빈에 대하여>를 한번 보라는 동생의 문자를 받고 어제 일부러 압구정동까지 가서 영화를 봤다.
<케빈에 대하여>는 각종 상을 휩쓸고 ‘2011년 최고의 영화’라고 극찬을 받은 영화다.
내용보다는 영화적 테크닉과 주인공들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면에서 그런 것 같다.
주인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냉혈동물처럼 반응하더니 고등학생이 되어
가족과 친구들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刑을 살게 된다.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나?
부부에게만 궁합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궁합’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이 母子는 만나서는 안 되는 惡緣으로 만났나 보다.
엄마는 보통의 엄마처럼 아이를 대했으나 돌아오는 건 언제나 싸늘하고 섬뜩한 반응-
결국은 끔찍한 사고를 친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 나오면서 투덜거렸다.
사람들은 왜 그런 걸 돈 주고 볼까?
눈만 뜨면 TV와 신문이 영화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한 사건들을,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들을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내가 일부러 시간과 돈을 쓰면서 영화관에 가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보는 동안 喜怒哀樂의 감정을 충분히 맛보면서도 주인공들로 인해 행복감을 느끼고 싶다.
그래서 전쟁영화, 범죄영화, 공포영화, 스릴러들은 보지 않는다. 상상력이 빈곤해서인가 공상과학영화도 재미없다.
최근에 본 영화로 재미있고 행복감을 준 영화는 영국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과
일본영화 <해피해피 브래드>다.
뭐니뭐니해도 실버영화관의 영화들이 딱 내 수준에 맞는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사랑은 비를 타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유 없는 반항> <카사블랑카>
<에덴의 동쪽>--
이렇게 혼자 궁시렁거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불꽃 놀이하는 것처럼 천둥 번개가 치고 심란함을 더하더니 어느새 비가 잠시 주춤해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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