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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징비록>

맑은 바람 2015. 2. 14. 09:56

***오늘(2월 14일) 오후 9시 40분부터 KBS 1 주말 연속 대하 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된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분함과 부끄러움으로 가슴이 뛴다.

 

유성룡(1542~1607) 65세 歿  임진왜란(1592. 4. 13~1598. 2. 17) 때 도체찰사


‘懲(징)毖(비)錄(록)’의 뜻: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의 치욕사이다. 정확히 말하면 왕을 비롯한 당시 정권을 쥔 책임자들, 고위관리들의 치욕스런 모습들이 각양각색으로 드러난 이야기다.

 

100년간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면서 외세의 침략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다가 문신 우대, 무신 박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군사력을 키우지 않은 것이 倭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다.

게다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끼리 의견이 엇갈리고 미래에 대한 대비를 안일하게 했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척후병이 있으면 민심을 소란케  한다고 목을 치고

의병을 일으키면 명령에 복종 않는다고 쳐 없애고

소신껏 싸우는 아군을 모함해서 관직을 박탈시키고--

 

우리 쪽에서 조금만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도 혼비백산했다는 왜구인데

멀리 적이 보이기만 해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했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침내 적의 무차별 공격과 아군의 끝없는 퇴각은 7년 동안 전국토를 잿더미로 만들고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도적으로 변하거나 전염병의 창궐로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가족을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일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 


 우리에게 무기가 없었던 게 아니다.

조총에 대항할 만한 무기가 없었냐? 그건 아니다.

비격진천뢰와 대완구가 있지 않은가!

다만 우리에겐 통솔력 있는 장수와 지략이 부족했던 것이다.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쓸 만한 무기가 제작되긴 했어도 이를 대량 생산해서 적재적소에 쓰는 일을 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임금이 궁궐을 비우고 파천할 때 백성들은 누굴 믿으란 말인가?

젊은 왕자들도 대책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니, 만일 왕자들이 칼을 들고 나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더라면 백성들과 장수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파죽지세로 당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그래도 일부 과거 국록을 먹었던 의병장들은 세력을 모아 풍전등화의 나라를 지키려다 전사했다.

그러나 현직 관리들은 목숨 끈을 잡고 요리조리 도망이나 다니고 게다가 첩자들까지 설쳤으니

국가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은 것이다.

 

 명나라 제독의 안하무인은 또 어땠는가.

우리 군사의 생각을 제멋대로 무시하고 방자하게 굴며 군사식량이나 축내고-- 

하기사 제 나라 군대는 도망 다니기 바쁜데 원정 온 군인들이 그 꼴을 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라든가

싸울 마음이 나겠는가?

오죽하면 우리 군사들이 끝가지 싸운 곳에서는 왜구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비까지 세워서 장한 조국애를

칭송했겠는가?(전주부근 웅치고개에서 정담과 변응정 장수가 지휘한 전투-‘조선의 충성스런 정신과

의로운 기운을 기린다.’는 비목을 만들어 줌)


이렇게 뭍에서는 활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후퇴행진을 하는 중에 거제도 앞바다에서 들려온 승전소식은 얼마나  찌는 여름날의 한 줄기 시원한 물줄기 같았겠는가?

 

장하다, 충무공이시여!

그는 ‘작전’이란 걸 처음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사람이다.

‘죽으면 살리라’하고 생각한 사람이다.

천하가 인정하는 포악한 명나라 장수 진 린도 감복하게 한 이순신-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줄 알았고 지혜가 별처럼 빛났다.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으며 그의 영구행렬을 따라온 백성들은

“공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며 그의 길을 막았다.

권세에 굴하지 않고 도리에 어긋난 일은 죽어도 할 수 없다는 오기를 지닌 사람--

그의 이른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자 우리 겨레의 큰 슬픔이다.


4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반일 감정만 내세워 그들을 비하하거나 모멸감을  주고 싶어할뿐

과연 제대로 우리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와신상담했는가.

<징비록>은 우리 조상의 부끄러운 이야기이자, 지금 우리들의 모습,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음은 임진왜란의 패배가 필연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말들이다.


*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명나라 장수 이 여송이 조령을 지나며 한 말


*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문인 출신의 순찰사들의 오합지졸 병력을 두고 유성룡이 개탄한 말


* 김명원과 신각 - 김명원의 부장 신각은 왜적이 우리나라에 침략한 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적을 격퇴시켜 승리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김명원의 ‘신각은 명령 불복종한자’ 라는 무고에 의해 처형됐다.

김명원이야말로 도원수의 몸으로 적의 침입이 있자 무기와 화포를 물에 던지고 옷을 갈아입고 도망친 

자였다.   그는 훗날 우의정,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어리석도다, 선조임금이여!


* ‘한가할 때는 근본을 다스리고 급할 때는 보이는 것부터 다스린다.’고 하는 말에 따라 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하고 때가 되면 적을 제압해야 할 터인데 귀국에서는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부사 심유경의 말


*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인데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

-일본의 야스히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