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34년만에 만나는 제자

맑은 바람 2019. 8. 18. 09:54

어제가 立春이었으니 이제 기분만으로도 봄이 저만치 오고 있는 듯한데 유난히 햇살 좋은 아침,

우체부가 건네준 소포 속에서 스물여덟 살 선생님은 열다섯 소년을 만났네.

다섯 권의 책과 다섯 장의 CD와 그리고 잔잔한 필체의 카드 한 장-

사진이라도 보면 먼 기억을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음카페와 네이버를 탐색해 보았는데

마곡동 한마음교회까지만 나오고 김 목사님 사진은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쉬웠네.

이름의 가운데 글자 받침이 ‘ㅁ'인지 ’ㅇ’인지도 헷갈렸는데 카드에 한자로 이름을 써서 금세 알아보았네.

"---‘세상의 모든 권력 가운데 양심의 깨끗함보다 더 큰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신 선생님께

이제 50의 나이에, 그 옛날 서툴고 아직 세상을 향해 날개 짓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인사를 드립니다." 는 말은 오히려 나를 더 감동시키네그려.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제자가 불쑥 나타나면 선생님들은 조심스럽게 경계를 한다며,

편지를 먼저 보내드리겠으니 보고 안심이 되시면 뵙겠다고 했을 때, 난 짐짓 “그럼 경찰서에 조회해 보면 되겠네.” 했더니,

전화 저편에서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네~, 저 전과기록 같은 것 없습니다.” 했지.


함께 밥을 먹을 만한 곳을 얘기했더니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서 식사대접을 해야 되는데, 식당 같은데서 밥을 사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는 말에 이제는 내가 오히려 조심스러워지며 이렇게 깍듯한 제자에게 허튼 구석을 보이면 어쩌나 걱정이 슬슬 든다네.

살면서 이렇게 가끔, 아득히 멀어진 그 옛날의 호숫가로 불러내 주는 제자가 있어, 그저 먹고 사는 데만 급급하게 살아온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먼.

선물포장이 정성스럽고 아름다워 가족 모두에게 보여주고 편지도 읽히며 자랑을 한 후 선물을 풀어 보니 세상에,

내가 골라도 그렇게 골고루 고르기 어려운 책들과 CD들이어서 무릎을 쳤네.

하나하나 살피니 어찌나 반갑고 가슴 설레는지--

퇴직한 선생님이니, 노년을 좀더 고상하고 격조 있게 살라는 제자의 조언이 책과 CD 속에 들어있는 듯하여 더욱 고마우이.

가까운 시일에 인사동 어디쯤에서 보아야겠네.

그리고 내가 뿌린 조그만 씨앗이 좋은 땅과 하늘과 햇빛을 만나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올려다보고 싶네.


                          2008년 2월 5일 옛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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