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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기행3(2)김산~아사카와 다쿠미

맑은 바람 2021. 1. 11. 01:27

(128쪽~241쪽)  김병종 지음

-타향의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28쪽)10.김산과 상하이
김산:(1905~1938)평북 용천 출신/본명 장지락/혁명가/무정부주의자.

1920년, 만 16세의 나이로 상하이 망명/1924 조선공산당 베이징 지부 설립.

"나에게 상하이는 새로운 세계였으며 서양의 물질 문명과 움직이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를 처음으로 본 곳이었다. 나는 모든 풍요로움과 모든 비참함이 함께 어우러진 채, 여러나라 말이 사용되고 있는, 이 드넓은 도시에 매료되었다."

 

상하이는 그에게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는 관문과 같았다./당시 중국에 머물면서 한 대학에서 일본어와 경제학 그리고 물리학과 화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수재였다(루쉰도서관 담당자의 말)/그 지적  열망과 아름다운 혼과 우수의 얼굴을 지닌 청년 김산은, 서른 살을 갓 넘어 중국 공산당에게 일본스파이로 몰려 극비리에 처형되었다고 한다/1938년 중국공산당은 그에 대한 명예회복과 당적 회복을 발표했으며 출생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광복 60주년을 맞던 2005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도 했다./1941년 뉴욕에서 님 웨일즈라는  여기자가 김산의 생애를 담은 '아리랑' 을 출간하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가 펄 벅이었다.

(140쪽)11.김염과 상하이
김염:(1910~1983)본명 김덕린/부친 김필순(세브란스 의전을 세우다시피한, 의학계의 태두이자 독립운동가, 42세에 타살로 짐작되는 죽음을 당함)/고모 김필례는 정신여고 교장과 이사장 역임/중국 영화 역사상'영화 황제'라는 칭호를 들었던 단 한 사람, 무용가 최승희와 독립운동가 김산이 민족의 자랑으로 삼있던 사람, 그의 브로마이드를 사려고 선남선녀들이 개봉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는 사람, 그러나 동료 영화배우였던 장칭이 주도한 문화대혁명 때는 커피와 버터를 좋아한 반혁명 서양파 분자라 하여 철저히 비판받아야 했던 사람, 전설적인 미남배우 루돌프 발렌티노를 뺨치는 외모를 가졌던 사람, 그는 영화로 일제에 저항한 정의로운 배우였다./한중 교류금지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지에 뼈를 묻다

 

김염가는 그야말로 당대 최고 名門家의 하나였다.

그의 가계를 펼치자 곧 한국 근대 '기독교사'와  '의학사'  그리고 '독립운동사'가 함께 딸려나왔다.

김염가의 사람들을 하나둘 만나보면서 나는 조선 호랑이처럼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으로 여겼던 명문가 사람들이 아직도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옹의 부인 김명진 여사의 중국어 소개장과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비행기를 탔다.

여행에  관해서라면 나는 갖다붙일 구실이 없어서 가방을 못 꾸리는 사람, 꾸물 댈 이유가 없었다(전생에 내 친구였나?)

 

김염의 부인 친이여사:77세의 나이로는 볼 수 없는, 오십이 될까말까하는 미모의 여인.

친이는 살아서 전설이 된 여인이었다/백합처럼 은은하고 향기있는 미모/상하이영화인 협회 회장/김지미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적이 있다/
김염의 대표작:어광곡, 대로, 어머니, 야초한화

(156쪽)12.최건과 베이징
최건:(1961~) 조선족 3세/아버지는 트럼펫 연주자, 어머니는 조선족 가무단 단원/1984년 록밴드'칠합판'을 결성/중국 록음악의 개척자/베이징 필 트럼펫 연주자
톈안먼  사건 때:그때 우리는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습니다.'一無所有',  최건의 노래였죠.그것은 당시 우리들의 군가였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내 꿈을, 자유를 네게 주겠어.'라는 그의 노랫말은  그대로 우리의 구호였습니다.(조선족 청년 염씨의 증언)/최건이란 이름의 조선족 청년은 당시 신화처럼 떠오른 베이징 민주화 운동의 꽃이었다./그는 노래하는 사상가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그의 팬 중에는 유독 청년, 그중에서도 남성팬이 많았다. 대학생과 지식인층이 많았다.말하고 싶어도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의 노래는 대신 말해 주었다./그러나 그의 노래는 위험하고 불순한 노래로 공안의 추적을 받았다.
작품:붉은 깃발 아래의 알, 일무소유, 난니완, 조롱 속의 새, 베이징 이야기, 최후의 총탄, 한 자루의 칼처럼, 저항, 해결,

(166쪽)13.최승희와 도쿄

(169)최승희 의 춤: 세계 유수의 언론에 신비와 환상의 춤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발레 <광시곡>


최승희:(1911~1967?)해주 출생/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3년이 못 되어 이시이 무용연구소의 간판 스타가 된다./창조적 예술가는 언제나 전통의 질서에 대해 회의한다. 끝없이 창조적 파괴를 꿈꾼다. 그래서 '나쁜생각'이야말로 창조적 예술가의 힘이 되는 것이다./그녀는 조선 제일의 춤꾼  한성준 문하에 들어가 보살춤,장구춤, 궁중무, 승무 같은  전통무용을 재창조해 마침내 세계를 휘어잡음/1946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1958년 남편이 숙청되면서 최승희의 인생도 내리막길을 향한다./그러나 근래에 복권이 이루어져 그녀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됨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예와 최악의 몰락을 함께  체험했던 최승희/20대에 이미 일본에서 자서전이 간행되고 그녀의 춤인생을 주제로 만든 영화 '반도의 무희'가 장장 4년 동안 상연되는 기록을 세웠던 별 중의 별이었다./서른이 되기 전 유럽의 저명 국제무용 경연에 심사위원으로 초대받고, 메트로폴리탄 뮤직 컴퍼니 주관 공연으로 뉴욕,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를 달구어 놓았다. 카네기홀과 파리 살 플레옐 극장을 시작으로 브뤼셀, 칸, 마르세유,  밀라노, 피렌체, 로마와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페루, 멕시코 그리고 베이징과 상하이를 숨가쁘게 비상했던  조선의 백조였다/그 캄캄하던 1930년대에 마사 그레이엄과 뉴욕 세인트제임스 극장에서 합동공연을 했고, 일본 무용수가 평생 한 번 서보는 게 소원이라는 도쿄의 제국 극장에서는 17일 연속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세계가 오히려 비좁던 그 여자에게는 그러나 정작 고향이 없었다./남에서는 친일파요 월북자라고, 북에서는 자본주의 성향의 반혁명 예술가라고  버림받았던 것이다
작품:에헤야  노아라, 초립동, 화랑무, 신로심불로, 장구춤, 춘향애사,즉흥무, 옥저의 곡, 보현보살, 천하대장군

 

(이 책은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심장이 조이는 느낌.

세계가 좁다하고 날던 새도 이념의 조롱 속에 갇히게 되면 그만 병들어 죽고 마는--
이응노도, 윤이상도, 최승희도 다 때를 잘못 만난 걸까, 나라를  잘못  만난 걸까?

이념의 장벽은 아무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예술인이라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인가?--

'파도야 어쩌란  말인가, 날 어쩌란 말인가! '

 

오늘도 뉴스앵커는 전한다.
코로나로 떼죽음하는 세계인들,
꽁꽁 언 길 위를 오들오들 떨며 헤매는 세 살짜리 아이,
주인을 만나지 못해 안락사라는 미명 아래 주사바늘에 찔려 죽어가는 강아지들,
AI로 수만 마리가 살처분되는
생지옥같은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180쪽)14.윤동주와 후쿠오카
윤동주:(1917~1945)북간도 명동촌 출생/용정에서 성장/1942년 도쿄릿교대학--도지사 대학으로 옮겨 다니던 중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됨--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됨/도지사  대학에 대표작 '서시'를 친필로 적은 시비가 있다.

(190쪽)15.정조문ㆍ정영희와 교토
정조문:(1918~1989)경북 예천 출생/1932년 일본에 건너와 사업을 하다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심취, 이후 고미술과 민예품 수집,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움/
딸 정영희는 '이청'이라는 조선식 음식점 겸 찻집을 운영한다/부친이 미술로 그러했듯이 자신은 담박하면서도 격조 있는 조선의 맛으로 동포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02쪽)16.이삼평과  아리타

(209)조선 도공 이삼평:흙과 불과 달빛만을 벗삼았던 도공 이삼평의 상상화


이삼평:(?~1655)공주 출생/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도자기의 신'으로 불림/
아리타에서 도자기를 빚음(아리타 도기의 시조)/규슈 사가 현 아리타는 일본 최초로 백자를 생산한 곳/세월이 멈춘 듯한 그곳에서 나는 시간의 숨결과 옛 조선 도공들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낀다. 그러면서 한편 쓸쓸하다. 왜 아리타 도자기의 스승 나라인 한국에는 이런 '시간의 앙금'  '세월의 숨결'을 찾을 수 없는가.  왜 강진, 여주, 이천은 오랜 도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급조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가. 왜 우리에게는 아리타가 없고 징더전이 없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되 전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리라./얼마 안 되는 읍 단위 인구에 도자기 가마만 이백여 개에 이르고, 삼백 곳이 넘는 도포(도자기 가게) 중에는 13,  14대를 이어온 오래된 가게들이 예사로이 있는 곳/아리타는 물 속의 도시처럼 적막하고 곳곳에 시간이 퇴적되어 있었다./이삼평의 도자기 가마터가 아직 남아 있다.

**'후지하라 리세이도'(이조의 청화백자를 모으는 집):외국인으로서 세계에서 가장많은 조선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오사카 소재

(216쪽)
17.김우진 윤심덕과 현해탄

(220)고독한 천재 김우진, 뛰지 못한 준마


김우진:(1897~1926)목포 거부이며 개화사상가인 김성규의 장남/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았으나 시창작과 연극에 심취
윤심덕:(1897~1926)평양출생/도쿄 우에노 음악학교 우등졸업/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일본 제국극장 전속가수 제의를 받았으나 국내로 들어와 활동무대도 없이 빈곤과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가족부양으로 생활고를 겪음/예술가가 어떤 시대, 어떤 조국을 만나 태어나고 활동하느냐는 개인적 재능 이상으로 중요하다.

(예술가 뿐이겠는가?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 결혼은 또 어떻구? 그게 다 인연이라는 게 아닐까.)

선구적인 신여성 예술가들에게 가혹했던 시대, 예술적 고뇌에 앞서 세상과 싸워야 했던 시절이었다. 통념과 인습의 벽 앞에 힘겨운 저항의 날갯짓을 하다가 때로는 무자비한 여론의 칼에  난자당하기도 했다. 김명순이 그러했고 나혜석이 그러했다.세상은 그네들을 잠시 선망하고 오래 질시했다. 그 목에 걸어준 무지개는 밧줄이 되고 가시가 되어 옥죄어 들었다.

(232쪽) 18.아사카와 다쿠미와 망우리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조선총독부 산림과 산림 기수/조선 민예 연구가
꿈에서라도 조선인이 되고 싶었던 일본인/한복에 흰고무신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녔고 한옥에서 조선의 자기는 물론 나무와 돌로 만들어진 모든 것과  더불어 살았다./조선의 도자기와 옹기와 소반을 사랑했다. 사랑하여  글로 남기고 책으로 썼고 미술관을 건립했다. /그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은 알리려 노럭했다.

(232)망우리--성문밖 최고의 명당/한용운, 방정환, 오세창, 박인환, 문일평,조봉암, 장덕수  등 빛나는 별과도같은 민족 지성들이 잠들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미리 알았더라면 읽었을까?  마음이 너무 무겁다.
'美人薄命'-여기서 '미인'은 외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게다. 재능이 뛰어나거나 두뇌가 남달리 명석한 사람, 선각자들을 두루 포함하는 것일 테지-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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