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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기행3 (1)전혜린~루드밀라 남

맑은 바람 2021. 1. 10. 01:08

타향의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병종/문학동네/241쪽/읽은 때:2021.1.8~1.10
(1)12쪽 전혜린~127쪽 류드밀라 남

(화첩기행 세 권째 읽기 시작함. 빨려들 듯 손을 떼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
화사한 그림이 있고, 작가와 동시대를 살며 바라본 사람들이 글의 대상인데다, 그들의 족적을 따라 지구여행자가 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니 이 아니 즐거울 수가!, 여행이 단절된 이 시기에~)
(12쪽)1.전혜린과 뮌헨


전혜린:(1934~1965)부친이 법률가/경기여고-서울법대-독문과로 전과-독일 뮌헨대학으로 유학/1959년 독문학박사 학위를 받음/한국여성 최초의  유학생/서울법대 강사/성균관대 교수/수필가/번역문학가/1950년대에 머나먼 뮌헨까지 홀로 유학을 떠났을 만큼 그녀는 꿈과 자유를 삶으로 실천했다. 여성에게 주어진 인습의 굴레나 통념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실존적 자아의 요구에만 부응하려 한 것이다./그녀에게 슈바빙은 참된 예술이 남아있는 공간이자 청춘의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문학가이기 전에 생의 예술가였다./나는 뮌헨에서 돌아온 후 다시 서울에서 그녀의 자취와 흔적을 좇아보았다. 그러나 거의 완벽에 가깝게 그녀의 흔적은 잡히지 않았다. 뮌헨이 환각이었다면 서울은 현실이었다/서울은 모든 추억이나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거대한 진공의 도시였다.
(어느 정치인이 서울을 '천박한 도시'라고 폄하(?)해서 국민의 원성을  샀는데,  공인이 할 소리는 못돼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인가?)

 

(34쪽)2.이미륵과 뮌헨

(41)망망대해-이미륵의 생애는 망망대해에서 떠도는 것같이 외롭고 고독한 것이었다

이미륵:(1899~1950)본명 이의경/평남 해주 3대 독자로 출생/경성의전 입학/3.1운동에 가담, 일경에 쫓겨 상하이에 잠시 피신 후 독일로 감/1928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박사 학위를 받음/독일에서도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1948년 뮌헨대학 동양학부 외래교수로 한국학, 동양철학 강의/위암으로 사망
작품:하늘의 천사, 압록강은 흐른다(1946)무던이, 실종자, 탈출기

(34)나는 지금 병에 걸려 있다. 병의 이름은 驛馬直星(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님) 이곳 아닌 저곳으로만 향하는 이 갈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이곳'은 늘 나른하고 '저곳'은 늘 설렘과 신비로 다가오는가
이미륵은 1920년대 경성의전을 다니다가 문득 독일로 떠나버렸다./그의 글은 독일어로 쓰인 가장 빼어난 문장 중 하나라는 평을 들으며 오랫동안 괴테의 글과 함께 중고교 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열렬한 반일운동가였던 이미륵은 독일에 와서도 쿠르트 후버 총장의 반나치 운동에 동조했다.
이미륵이라는 자유와 지성의 불기둥은 언제나 반억압, 반독재의 편에 섰던 것이다./이미륵의 존재를 우리앞에 드러내 보여준 분, 정규화교수의 말--
"우리 근대사의 가장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분이시다"
"그는 다시 나타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독일 유명 신문에 '압록강은 흐른다' 서평만 백 회 이상 실렸지요. 영어, 프랑스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면서 <압록강은 흐른다>는 펄벅의 대지가 중국을 알린 것 못지않게 한국을 드러냈습니다. 이학박사였지만 서예와 한시에도 높은 경지에 이룬 분이었지요."

(처음으로 유럽의 낯선 나라에 발을 내딛고 선진 문물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용기있게 도전한 조선의 선각자들 이야기가 가슴을 뛰게 한다. 그런 이들을 발굴해서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분들을 만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김병종작가, 그리고 문학세계가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와, 아침독서의 행복을 만끽하게 한다)

(46쪽)3.윤이상과 통영-베를린
윤이상:(1917~1995)경남 산청 출생/3세 때부터 통영에서 성장/통영여고, 부산사범에서 음악교사로 있을 때 부인을 만남(통영여고 국어교사 이수자)/1957년 베를린음대 졸업/베를린음대 명예교수/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받음/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이 뽑은  역사상 최고음악가 44인에 선정됨/북한에서는 15층 건물에 '윤이상 음악연구소' 설립

작품:처용의 노래, 낙동강, 70여 편의 동요 작곡, 첼로소나타 1번,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 오, 연꽃 속의 진주여, 예악, 나비의 미망인(수감 중에 작곡), 심청, '광주여, 영원하라',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1967년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 서울로 강제소환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세계 음악계의 구명운동으로 1969년 풀려나 독일로 귀국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 이리 창피한지~그들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인은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세계가 알아주는 인물이어도, 일단 무언가로 털리기 시작하면 어림도 없다. 탈탈 털리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그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은 이들에게서조차)
"베를린 청년 중에 피카소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윤이상 모르는 사람은 없다."-베를린 소재 국제 윤이상학회 볼프강의 말
"윤이상 음악을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해란 늘 지식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식보다는 느낌이다. 많은 유럽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느낌으로 좋아한다."
"그는 유난히 조국과 고향 얘기를 많이 했다. 그의 음악적 영감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온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그는 꿈꾸는 소년처럼 행복해했다."
"그는 자기 조국과 고향에 대해 좋은 것들만 이야기했다. 단지 고문과 감옥생활의 후유증으로 코르티손류의 독한 약을 한움큼씩 먹는 것을 보면서 그가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 베를린의 습한 날씨가 그에게는 좋지 않았다. 고향 통영의 따뜻한 날씨였다면 그는 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51)"귀국하면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의 흙을 만지게 된다. 그때 그 흙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사랑합니다.--윤이상 '조국에 대한 연서' 중에서
(53)"결혼을 제외하고 내 생애는 언제나 분단의 경계 위에 선 것이었다. 내 음악의 대부분은 그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바쳐졌다."-윤이상

(62쪽)4.진은숙과 베를린
진은숙:(1961~)작곡가/부친은 목사/형편이 어려워 차이콥스키, 스트라빈스키  등의 교향곡 악보를 필사하면서 공부했다./1982년 서울음대 작곡과에 입학/1985년 20대 중반에 가우데아무스상 수상/같은 해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 음대에서 세계적 거장 죄르지 리게티에게 작곡 수업을 받는다./2004년 바이올린협주곡으로 그라베 마이어 작곡상 수상(작곡가의 노벨상)/2005 아르놀트 쉔베르크 음악상 수상/2006년부터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작곡가/2007<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뮌헨 바이에른극장에서 초연. 극찬을 받음(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의 개막작)/2009일본 산토리홀에서 동양의 전통악기 생황을 서양음악 형식에 접목한 생황협주곡 '슈'를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2010년  피에르 대공 작곡상 수상/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현대음악 예술 감독

자그마한 몸집에 반짝이는 눈빛, 윤이상에 이어 세계 최고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인정받은 그의 음악은 일상의 논리를 전복하면서도 난해하지 않아 듣는이를 매혹시킨다./졸업  후 행방이 묘연했던 그녀는 '예술가가 숨어 일하기 좋은' 베를린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모든 예술적 시도와 실험을 품고  곰삭여 숙성시키는 베를린의 분위기는 이방의 예술가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윤이상에 이어 한국 작곡가로서 후폭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진은숙은 이미 세계의 작곡계를 이끈 다섯 명의 차세대 작곡가에 오른 바 있다.
작품: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72쪽)5.노은님과 함부르크
노은님:(1946~  )전주 출생/9개월 과정의 간호보조교육을 받은 뒤 1970년 파독 간호사로 독일로 감/화가/1990년부터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의 교수/성요하네스 교회당의 동화적인 유리그림이 있다
공모전에 입상하거나 시에서 주는 후원금을 받을 때 혹은 건물에 조형물을 설치할 때마다, 그녀와 친했던 미술가 친구들이 꼭 한두 명씩 떨어져 나간다고 씁쓰름하게 웃었다/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같던 자신을 발견하여 숨은 보석으로 빛나게 해준 독일이 고맙기는 하지만, 예술가들의 세계는 숨막히는 경쟁의 연속으로 꽉 차 있을 뿐이라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 칠십이 넘어서도, 별 거 아닌 걸 가지고도 차마 내색은 못하면서 질투하고 시샘하는 인간들인데, 뛰어난 사람들한테는 오죽할까?)
(74)독일말도 못하는 채 처음 왔을 때 참으로 막막했어요. 병원 일이 끝나면 숙소에 돌아와 자페증 환자처럼 그림만 그렸지요. 어느날 우연히 내 그림을 본 간호부장이 함부르크 미술대학의 한 교수에게 소개했는데 그 길로 특례입학이 되어 미술대학생으로 변신했어요.
6년여 동안 병원 밤근무를 하면서 대학에 다녔는데 동양에서 온 사투리같은 나의 그림이 먹혀들기 시작했지요./그녀는 자신이 새, 나무, 풀, 물고기, 별 같은 자연의 세계를 그리는 이유는 그 속에 고향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십여 년의 독일생활 속에서도 한국의 들길에서 만남 직한 시골아주머니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

(80쪽)6.이응노와 파리
이응노:(1904~1989)충남 홍성 출생/호 고암/파리 공원묘지에 안장/
동양화가로서 이미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파리로 와 동과 서를 조화시키는 그림을 그렸다./한국에서 자연을 그리던 것이 파리에선 문자를 그리고 인간을 그리는 일로 바뀌었다./파리는 지금껏 그가 그려온 농경문화의 도시가 아니었다. 세련이 극에 달한 무명과 문화의 도시였다. 그는 산수화가 아닌 추상화의 실험을 시작했다./1964년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서양인 후학 양성.
"그이는 파리에  그림을 배우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르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해요."(부인 박인경)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름/1977년 백건우 부부의 북한 납치사건의 배후로 지목, 국내활동이 전면 금지됨.
"통일무-이 그림처럼 조국통일이 되는 날이 오면 우리 민족의 동포들이 기쁜 마음으로 춤을 추게 될 것이며, 나는 이러한 작업을 할 때 의무와 기쁨을 함께 느끼고 있다."(이응노)

(90쪽)7.빅토르 최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빅토르 최:(1962~1990)러시아 록그룹 '키노'의 리더이자 영화배우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야간 특급열차/옆 침대의 미녀.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그녀의 육체가 눈앞 가득 출렁인다.유혹은 눈에서 오나니, 돌아누워 잠을 청해보건만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다(절창이다!)
수많은 젊은이가 그를 따랐다. 러시아 전역에 그의 배지를 달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백만 명이 넘었고 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있었던 그의 마지막 공연에는 십만 명이 모였다. 고르바초프는 그에게 동지라고 부르며 함께 일하자고 했다. 그 순간 블리히나 거리 15번지 보일러실 화부 출신의 록가수는 러시아혁명사에서 또하나의 별이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연 두 달 뒤인 1990년 8월 15일 그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는다. 한국 서울에서의 공연을 눈앞에 두고.
비석의 메모:
"비짜는 죽지 않았다. 단지 그는 천국으로 공연여행을 떠났을 뿐이다.공연이 끝나면---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 몰라도 빅토르 최는 우리를 바꾸었어요"--어느  팬클럽 소녀의 말
블리히나 15번지:그 건물부터 뒷마당에 이르는 벽은 온통 빅토르에  관한 글과 그림으로 가득찬 광란의 캔버스였다.
"때로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곡을 썼지요. 대개 일이 끝나는 늦은 밤에야 자기 일을 시작했어요. 밤새 만든 곡을 새벽녘 기타와 함께 흥얼거리는 소릴 듣는 것이 참 감미로웠어요. 그의 곡을 세상에서 내가 맨 처음 듣곤 했죠."-동료의 말

빅토르 최의 예언적인 문구:
"우리는 먼저 익은 열매.죽음의 신은 우리를 먼저 덮칠 것이다"
"내가 사랑한 것은 레닌그라드의 달과 별. 나는 모스크바를 싫어한다."/빅토르 최는 소련 역사를 움직인 13명의 위인 '페레스트로이카의 별'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작품:혈액형, 밤을 보았다,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변화,  우리 눈앞에, 한 모금의 물, 밤, 이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레드 웨이브

(104쪽)8.아나톨리 김과 모스크바
아나톨리 김:(1939~  )고려인 3세/미술을 공부했으나 후에 고리키문학대학에 입학, 작가가 됨/유랑의 삶을 살고 있는 카레이스키(고려인)의 애달픈 삶을 기록하는 것이 목표/소련 작가 동맹의 중심작가/작품이 교과서에도 실림/
좋지 않은 경제상황에도 볼쇼이 극장과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과 트레치야코프 국립미술관 앞에 늘어선 줄이 생생합니다. 그 행렬에서 나는 낮고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와 대지를 적시는 볼가 강물처럼 인간의 영혼을 감싸안는 예술의 크고 부드러운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예술은 온갖 궁핍과 곤란마저 이겨내게 하는 종교같은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힘에 무릎꿇지 않게 하는 최후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문학은 상처를 싸매고 보듬어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선배작가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그 길을 가려합니다."(아나톨리 김)
작품:사할린의 방랑자들, 수채화, 푸른섬, 다람쥐, 아버지 숲, 켄타우로스의 마을, 신의 플루트, 요나섬, '초원, 내 푸른 영혼', 폐자의 통나무집,

(116쪽)9.류드밀라 남과  모스크바
류드밀라 남:(1947~2007)카자흐스탄 알마티 출생/남애리/고려인2세/초등학교 교사/하바롭스크 음악전문학교와 그네신 음악원, 후에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에서 성악 공부/러시아 제1의 소프라노(1977~1996)/독창회만 12회를 엶/볼쇼이의 진주/러시아 인민공훈배우/대구예술대학교수

예술은 자본의 꽃이기 이전에 절망을 이기는 노래라고/러시아도 똑같이 힘든 세월을 지냈지만  그럴수록 볼쇼이 극장에, 마린스키 극장 앞에 사람들은 줄을 섰다고/이들은 경제가 무너지고  나라가 깨져나가도  문화를 지니고 있으면 다시 일어선다고  굳게 믿고 있지요/가수로서 내 생애에 가장 감격스러웠던 것은 볼쇼이의 프리마돈나로 미국과 유럽의 무대를 뒤흔들었던 때가 아닙니다. 1988년 서울에서 무대도 객석도 눈물바다가 되어 아리랑, 도라지,가고파를 불렀을 때입니다./나는 다시 서울에 가서 소망의 아리아  아리랑을 부르고 싶습니다. 내가 외로울 때 고국이 불러주었듯이 시름에 잠긴 고국을 위해 이번에 제가 가서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말로 불러 시련의 조국에 바치고 싶습니다. 나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10.김산과 상하이
11.김염과 상하이
12.최건과 베이징
13.최승희와 도쿄
14.윤동주와 후쿠오카
15.정조문 정영희와 교토
16.이삼평과  아리타
17.김우진 윤심덕과 현해탄
18.아사카와 다쿠미와 망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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