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 ·강연 이야기/책

내 짐은 내 날개다

맑은 바람 2021. 1. 15. 23:13

--자연을 그리는 화가 노은님의 그림이 있는 에세이
노은님/샨티/267쪽/2004.2초판2쇄/읽은 때:2021.1.13~ 1.15

47개의 토막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시작부터 가슴 설레게 한다.
필력이 만만치 않다. 부담없이 술술 읽히나 그게 쉬운 게 아니다.
'나의  작은성'은 지은 지 250년 된 고성을 35년간 빌려서 별장으로 쓰고 있는 얘기다.

앞 개울에는 숭어가 뛰고 거실에  있는 12개의 창은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시시각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런 집에 한번 살아 볼 수 있다면---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쉰여섯 살의 신부'는 또 얼마나 멋진가.
59세의 같은 대학교수를 남편으로 만난 그들은 젊은 사람 못지 않게, 호수 위에서 파티를 열고 인도 동해안의 말레디벤 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스쿠버다이빙을 즐긴다.

인생은 순간순간의 선택!  누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신부가 될 꿈을 꿀 수 있었겠는가?


(37)나는 그리움에 꽉찬 사람이었다. 배가 고파 길 떠난 짐승처럼 무엇인가를 찾아다녔고 반짝이는 아침 햇살처럼 어느 누구의 가슴 속에 깊숙이 스며들고 싶었다. 그 속에서 한줄기빛으로 사라지고 싶었던 나는 참으로 오랜 세월을 혼자 외롭게 지냈다. 그러나 이제 그 외로운 여정을 함께할 아름다운 도반을 만났다. 숨은 보석을 찾은 행복한 개구리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52)벌 받는 것 같았던 밤 근무:항구 근처의 시립외과병원에 근무할 때 이야기/독일이 연극으로 유명하다지만 병원에 근무하는 동안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이야말로 진짜  연극 중의 연극이었다/그녀의 환자들은 외국인 선원, 상파울리의 창녀들, 뱃사람, 술꾼,거지들-그들은 독일 밑바닥 생활자들이었다.
지금도 밤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잠들 때면 감사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10분만이라도 잤으면 했던 그때의 생활을 생각하면 밤이 되어 정상적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66)언니 이야기:아직도 소녀같이 맑은 면이 있는 언니는 늘 나를 위해 기도를 해왔다고 한다. 피카소처럼 유명한 화가가 되고 또 좋은 남편 만나서 외롭지 않게 살게 되라고--늦게나마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장난치며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된 데에는 언니의 기도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남을 칭찬하고 '그의 덕분에' 내가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노은님도 언니를 그렇게 이야기한다. '잘되면 내덕, 못되면 조상탓'은 인제 옛말이 되어가나 보다. 그랬으면 좋겠다)
(74)돈의 힘:돈이 있다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사람들은 돈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는 하지만 돈이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한다.
(85)친구가 들려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다시 빛을 통해 어둠 속으로 간다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던 곳이기에 다 잘 알고 있다.는.

모기 한 마리 개미 한 마리도 죽을 때 빛을 지나는가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곳은 지옥도 천국도 없이 모두가 다 잠자는 상태, 완전히 無 상태라니 위안이 된다.
(90)모든  물체에 눈을 달아줌:나무에 눈을 달아주면 잎이 살아나고, 곤충들은 눈을 뜨고 날아다니고, 물고기들은 눈을 뜨고 우주를 여행한다. 내 짚신과 책상 위의 전등에도 눈을 그려 넣어주었다. 내 스웨터에도 점무늬가 그려져 있다. 오늘도 어릴적 집앞 개울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들은 내 그림 속에서 동그란 눈을 달고 먼 시간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101)내가 쓰레기통에 버린 그림을 주워다 칭찬하는 미술교수:
그 후로 남몰래 주변의 쓰레기통을 뒤져 그곳에서 나온 재료들을 가지고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면서 쓰레기통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져 옷도 남이 버리는 것, 특히 쓸 만한데 버려지는 것들을 줍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어쩜 전생에 거지가 다시 태어나서 화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116)나의 역마살:여행은 돈하고는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떠나고자 하는 마음, 새로운 것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오스트렐리아와 빙하가 있는 곳만 빼고는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다.
독일사람들은 전에는 일하기 위해 먹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여행가기 위해 일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모두가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하고 사는데, 거기엔 우중충한 독일 날씨 탓이 크다.
영원한 여행 속에서 나는 바람과 시간과 모든 우주만물과 함께 흘러간다. 그럴 때면 내가 두고온 세상은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세계가 되고 만다. 나는 신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와도 같은 존재다.
나는 이 많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고, 마음대로 무엇이든 만질 수 있는 두 손이 있고, 가고싶은 곳에 데려다주는 두 발이 있으며, 그 모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121)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벽암록에서
(131)그녀의  남편 게하르트:그는 자기의 본업은 내 조수이고 부업이  교수란다. 그가 나에게  하는 것을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나는  그가 곁에 있어도 그립다. 웬일인지 나도 모른다.  쉰 살이 넘어 만난 까닭은 아마도 이렇게 더 많이그리워하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배려한 하늘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노골적으로  남편자랑을 하는데 은님씨가 밉지 않다. 그녀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그럼 나는? 방금 읽은 브런치 글에서  그랬지?
비교하는 일이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쓸데없는 일이라고~
(135)참 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절이든 교회든 집이든 내가  어디에 있는가 보다 내 마음이 고요한가 아니면 시끄러운가와 더 관계가 깊다. 같은 절에서도 스님들은 편한 밤을 보낼 수 있지만 나는 내 관념과 내가 만들어 놓은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 밤마다 시달리지 않았는가? 자신의 머릿속 관념에 매여 있는 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137)예술인 마을, 봅스베데:
유능한 작가들에게  공짜로 묵게 해주며 오로지 작품활동에만 전념하게 해주는 마을.
지상천국이 따로 없다. 세계적인 작가가 왜 이런 나라에서 배출되는지 알겠다. 긴 안목을 가지고 투자하는 풍토가 없는, 오로지 빨리빨리해서 성과를 얻으려는 나라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꿈같은 이야기~
(164)나는 정열적인 여자라 뭐든지 죽어라 사랑하고 죽어라 아파하고 죽어라 팔팔거린다. 붙잡힌 물고기처럼 팔딱거린다.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 탓이리라. 이제 남은 숙제는 조용해지는 것,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 세상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조화와 질서 속에 있는 것이기에.  게으른 것은 게으른대로,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으로, 거짓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로, 바보는 바보대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살게끔 내버려두는 것이 내 숙제인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는 커다란 숙제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앞서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큰 숙제일 것이다. 그 숙제를 푸는데 그림은 나에게 중요한 도구가되고 길이 된다.
(168)함부르크대학 교수가 되다:
원서를 내고 18개 관문을 거쳐 함부르크 시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데 일 년이 걸렸다. 
(일 년만에 합격통지를 받은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가. 그녀가 자랑스럽다)
(172)나는 자연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불행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행복한 사람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야 가고싶은 곳에 닿게 마련이다.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은 걸음은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놓은 것은 내 자신이 아니고 시간임을 느낀다.

(183)질투 속에서 살아남은 은님의 그림:이곳 작가들은 날더러 상어같이 무서운 여자라고 한다. 내가 그림과 함께 나타나면 다른 사람들이 꼼짝을 못한다고 불평한 데서 나온 말이다.
나는 젊은 작가들에게 말한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앞을 보고 가라고. 그림이 스승이니 모시고 살다보면 그림이 다 가르쳐준다고.
그림은 엄격하다. 엑스레이보다 투명하게 그림 그리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준다. 아무도 속일 수 없는 무서운 것이 진정한 예술인 것 같다.
(259)나는 죽는 날까지 내 그림을 통해 미련없이 모든 것을 태우고 살고 싶다. 내 고집까지 다 태워버리고  싶다. 덤으로 태어난 인생이고 엉터리로 살고 엉터리로 갈 망정 이 인생에 감사드리고 이 인생을 사랑하다가 내가 죽으면 그 나무 아래 어딘가에 '공짜로  살다 감'이라고 써 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한 세상은 둥근 원과 같다.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다만 시간이 우리를 변화시킬 뿐이다. 태어남과 죽음, 그 사이는  항상 오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뿐이다.
(260)내 짐은 내 날개다:
"아직 불이 되지 않은 당신이 어떻게 재가 되길 바라는가? " 라고 니체는 말했다. 그렇다. 우리 모두 불이 되어야 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다 그 속에 넣고 함께 타서 녹아야 한다. 좋은 음악, 좋은 그림, 좋은 문학에는 잘 갈무리된 아픔이 조용히 숨어 있게 마련이다.이것이 내면 깊숙이 흐르는 또 하나의 리듬이다.

 

책 제목 자체가 많은 의미를 함축한 '시'다.
대부분의 사람이 '짐' 이라고 생각되는 걸 짊어지고 산다. 사는 동안 어느 한때 짐을 내려놓아 홀가분한 상태가 없다.
무거운 짐을 벗게 되면 또 만들어서라도 짐을 진다.
노은님은 그 짐을 날개로 바꾸어 훨훨 날아올랐으니 얼마나 멋진가!~

 

작가의 글이 더욱 다가오고 맛깔스러운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1946년생)
역사의 격동기에 태어나 거친 풍랑을 무사히 헤치고 오늘에 이르렀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