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륵 지음/전혜린 옮김/2012.7 개정판 3쇄/범우/262쪽/읽은 때 2021.1.11~1.12
자전적 소설이라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묘사대상은 주로 '나를 키운 이들'이다.
많은 놀거리를 가르쳐준 반 년 연상의 착하고 영리한 사촌형 수암, 내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한글지식을 가르쳐준 둘째누나 어진이, '엄한듯 자애로우며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 말수가 적으면서도 속깊은 정을 드러내는 어머니, 신식학교에 들어갔을 때 사귄 친구들-공부를 썩 잘하고 영리한, 그러나 자주 아픈 기섭이는 내게 수학공부를 도와주었다. 말 잘하고 아는 것도 많은 용마는 학습전반에 도움을 주었다. 짝꿍인 만수는 잘 놀러다니고 악기를 잘 다루었으며 나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주었다.
(141)11살에 소학교 입학, 4년 후 신식중학교에 다니다가 휴학하게 됨:
-(나)수학, 물리. 화학--난 모든 것을 잘 알 수가 없어요.
-(어머니)네가 이 학교에서 충분히 재주가 없더라도 괜찮아! 우리들에게 그렇게까지 서투른 문화는 맞지 않는 거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얼마나 쉽게 고전이며 시를 배웠었니! 넌 총명했단다. 너를 괴롭히는 새 학교에서 나오너라. 그리고 올 가을에는 송림촌으로 가거라. 휴양하러 말이다. 그곳은 제일 작은 땅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농토다. 밤이며 감이며 많이 있다. 거기 가서 푹 쉬어라. 우리 일꾼들과 그들의 일을 익혀라. 한적한 마을에서는 네가 이 불안스런 읍에서보다 훨씬 더 잘 자랄 거야. 너는 옛 시대의 아이다.
(기품있는 어머니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식의 자존심을 지켜 주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27)남문에서 본 임금님의 글:
나는 조심스레 광고판 가까이 가서는 옥새가 찍혀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진짜 임금님의 글이었다. 그건 내 일생을 두고 최초로, 그리고 최후로 읽은 임금님의 글이었다.
그것은 내게는 장엄하면서도 슬펐다. 5백여 년 동안 우리를 보호해준 왕조의 작별의 글이었기 때문이다.(한일합병소식)
(엄연히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은, 조선말 풍경이 그린 듯 펼쳐져 더할 수 없이 재미있다. 묘사의 달인!)
(210)조국을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작별의 말:
너는 자주 낙심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충실히 너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에는 유럽에 갈 것이다. 이 에미 걱정은 말아라.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그처럼 빨리 가니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 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자!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이것이 지상에서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유럽에 간 첫해 겨울에 돌아가셨다.)
(215)그가 마지막 본 압록강:
나는 도시를 떠나 한번 더 강을 보기 위하여 언덕으로 올라갔다. 조용히 푸르게 빛나는 강은 저녁노을에 잠긴 양쪽 언덕 사이의 모래밭으로 흐르고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막을 길 없이 흐르고 흘렀다. 이편은 모든 것이 크고 음침하고 진지하였으나, 저편은 모든 것이 잘고 쾌활하였다. 언덕에는 빛나는 초가집들이 산재해 있었다. 또한 많은 굴뚝에서는 벌써 저녁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멀리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산맥과 산맥이 연달아 물결치고 있었다. 산은 햇빛에 빛났다. 또다시 황혼의 아름다운 빛에 물들었다가 서서히 푸른이내에 잠겨갔다.
나는 먼 남쪽의 골짜기며 시내가 있는 수양산을 눈앞에 보는 듯했다. 소년시절 언제나 저녁 음악을 들었던 이층탑 건물도 눈앞에 선했다. 나는 한번 더 저 남쪽에서 들려오는 황홀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소리없이 압록강은 흘렀다.
(220)공자에 대한 생각:
남경행 열차에서 볼만한 것은 잘 익은 보리밭 사이를 따뜻한 가을 햇빛 아래 도도히 흐르는 강이었고 붉고푸른 돛을 단 수많은 돛배의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수나라의 향락적인 황제가 제국의 남쪽으로 항해하기 위하여 만들게 했다는 바로 그 삼천리 운하였다. 그는 아마 그보다 2000년 전 쯤에 이 밭들을 방황하면서 인류에게 사치와 명성을 경고했던 위인을 잊었으리라. 우리는 공자가 탄생한 노나라(지금의 산뚱지방)를 달렸다. 그의 현명함 때문에 오늘도 중국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평화스러운 민족이 된 것이다.
(235)여객선 폴르카 호를 타고 유럽으로:
한국 사람은 중국학생들처럼 책을 읽는데 열중하지 않았다. 중국 학생의 대부분은 대개의 시간을 그들 숙소에서 마음대로 시원한 곳을 찾아 책을 읽기 위해 머물러 있었다. 책을 들고 있지 않은 중국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 반면에 책을 읽고있는 한국 사람은 더욱더 드물었다.
(이 이야기는 마음을 무척 언짢게 한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249)독일의 풍속과 습관에 대한 봉근(안중근 의사의 사촌)이의 충고:
너는 너무 말이 없고 너무 많이 생각한다. 침묵은 오래된 동방에서는 아직도 미덕으로 인정되나 서방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여기선 그게 비사교성의 표시로, 심지어는 거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언제나 이야기하는 데에 섞여 같이 대화를 나누어라.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 간에, 날씨나 기후나 또는 음식이나 옷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과 사교하는 동안에는, 땅에서 살고있는 이상엔 언제나 철학적인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단다. 유럽사람도 땅 위에서 살고 있으며 즐겨 세상이야기를 한다.
그의 연보에는 12세에 결혼, 18세에 첫딸을 낳고 20세에 아들을 얻는다. 그런데 자전적소설임에도 이 책 어디에도 아내나 자식이야기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때 결혼을 시키는(이미륵은 12세에 결혼) 조선의 조혼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나 나나 서로들 스스로 잘났다고 자기피알하는 시대에 비추어 보면 '나'의 인품과 덕성이 한층 높아보인다.
좋은 글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도 가르쳐준다
다만 김삿갓의 삶에 대해서 좀더 사실에 가깝게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김병연의 실제의 삶이 이 소설 속 이야기보다 훨씬 드라마틱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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