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3년 10월 14일 쓴 것임
글쓴이 김영권
-유리봉의 노랫소리-
교인인 친구에게서 이 책을 선물 받았을 때 오래 전 일들이 떠올라 무척 반가웠다.
하나는, 1980년대 중반, 지인이 자기 고향에 한번 놀러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모곡국민학교라는 곳을 안내하며, 오래 전에 이곳에 독립운동가 남궁억이라는 분이 교편을 잡고 살면서 무궁화 보급 운동에 힘쓰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 하나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남궁억 선생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무궁화에 새삼스런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되어 내가 사는 집 마당에 ‘백색단심무궁화’를 심어두고 보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이런 인연들로 ‘보리울의 달’은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책을 통해, 불우한 시대와 가정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정열과 의욕적으로 실천하는 남궁억 선생의 삶의 모습을 대하니 이제까지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고 따라서 고마운 마음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남궁억 선생(1863.12.27.~1939.4.5.)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식교육은 어느 아버지 못지않게 엄하고 서릿발 같았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길이 아니면 가지 말거라. 너 자신에겐 칼날처럼 엄격하고 남에겐 포근하게 대하거라.”
이 말씀은 한서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죽는 날까지 그의 좌우명이 되었다.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앞날을 위해 평생 몸 바친 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위의 멸시와 비웃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택한 길을 걸어간 일이며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평생 인력거를 타지 않은 일과 어린 제자들에게도 항상 경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준 일 등이 그를 입증한다.
선생은 총명함을 타고나 일찍부터 한문을 익히고 후에 통역관 양성학교인 <동문학>에 입학(1883)하였다. 그는 기우는 나라의 백성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조선의 힘을 기르는 길은 선진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년 후 우수한 성적으로 영어학교를 마친 선생은 고종황제의 영어통역관(1886)이 되었다.
후에 그는 임금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기도 했는데, 가는 곳마다 학교와 단체를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선생은 일제의 야욕이 서서히 조선을 좀먹어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 <독립협회>를 설립(1896), 수석총무로 일하면서 ‘독립신문’ 영어판을 발행하여 민족에게 독립심을 심어주고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사회를 개화하고 외세에 의존하려는 나라의 정책을 바로잡고자 했다.
선생은 또 최초의 국한문혼용 일간지 <황성신문>을 창간(1898), 사장을 역임하며 민족의 얼을 지키려 힘썼다.
그러나 일본의 치밀한 계략 아래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의 식민국가가 되었다.
남궁억 선생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무력한 자신을 탓하며 비탄과 실의에 빠졌다.
그때 그를 붙들어준 것이 기독교 신앙(1910 종교교회 입교)이었다.
일제지배하의 우리겨레의 모습은,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점령당하여 무참하게 살육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많이 닮았다.
“보라, 우리의 거룩한 곳, 우리의 아름다움이요 영광이던 곳이 폐허가 되었네. 이민족들이 그곳을 더럽혀 버렸네.”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그분께 희망을 두는 이는 아무도 약해지지 않는다.”
슬픔과 비통함 속에서도 안으로 더욱 결속하고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이 정의의 깃발을 휘날리실 그날을 굳게 믿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느님은 진리이자 희망이므로, 언젠가는 악이 멸하고 선이 승리할 것을 남궁억 선생은 굳게 믿고 더욱 신앙을 견고히 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선생은 기꺼이 자신을 조국에 바쳐야 할 한 알의 밀알이고자 했다.
그래서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정치가,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을 해왔던 선생은 한일합방이 되자 교육자의 길로 들어섰다. 오직 희망을 걸 사람은 자라는 아이들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배화학당에 영어교사로 근무(1910-)하면서 틈틈이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며 한편으로 한반도지도를 무궁화로 수놓게 했으며 손수건에도 무궁화 자수를 놓게 하여 우리 꽃 사랑을 통한 나라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었다. 또 교과서를 당신 뜻에 맞게 재편집하고 보다 익히기 쉽도록 노래로 만들어 가르쳤다.
그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의 대상이었다. 가는 곳마다 일제의 간섭이 따랐고 걸핏하면 감옥으로 끌려가 수감되고 고문당하였다.
일제는 한편으로 끊임없는 회유의 정책도 펼쳤으나 한서선생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의 간섭과 방해공작은 날로 극성스러워지고 선생은 수형생활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선친의 고향 홍천으로 가게 되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먼 길을 걷는 것은 무리이니 가마나 수레를 타고 가시라고 간곡히 권했으나 ‘남궁고집’ 선생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며 그 먼 길을 걸어가셨다.
남궁억 선생은 선친의 고향 보리울에서 그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셨다.
모곡학교를 세워 후학을 가르치고 무궁화 묘포에서 기른 무궁화를 전국 각지에 수십만 주를 보급하고 우리말 교과서 <조선이야기> <조선어 보충>을 직접 만들어 가르치셨다.
“생각은 실천의 어머니입니다. 실천하려는 노력과 능력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려면 농부의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하듯이-- ”
그가 뿌린 정신의 씨앗은 어린 새싹들의 마음과 정신에 뿌리내려 제고장 사랑, 나라사랑의 실천에 앞장서며 언젠가는 한반도가 무궁화동산이 되고 나아가 세계인의 마음속에 휘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아름다운 한국의 무궁화가 그들 가슴 속에도 아름답게 새겨지리라.
나는 지금 강원도 홍천 보리울 유리봉에서 들려오는 남궁억 선생의 나지막하나 힘찬 노랫소리를 듣는다.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동산
잘살아라 오천만의 대한민국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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