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라 지음/서해문집/383쪽/2014.9초판1쇄/2015.12초판 2쇄/읽은 때 2021.5.13~ 5.23
어떤 동기로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어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재고로 남겨둔 걸 구한 거다.
아마 헤밍웨이를 읽다가 그에게 영향을 끼친 거트루드 스타인이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하면서 그에 대해 이 책에서 다루었다는 걸 발견하고 사고자 했던 것 같다.
김미라: 요샌 작가소개가 파격적이다. 어디서 언제 태어났고 어느 학교를 나왔다는 천편일률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얼하며 산다는 얘기가 골자다. 정외과를 나온 사람이 라디오음악 방송작가를 33년째 하고 있으면서 예술가의 이야기를 글로 엮다니 재주와 학구적인 태도를 높이 살 만하다.
(방금 전까지 한 쪽에 34행이 들어있는 글을 대하다가 22행밖에 안되는 책을 대하니 마음까지 널널해진다.)
차례
1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
2.쉬잔 발라동(1865~1938)
3.이사도라 덩컨(1877~1927)
4.루 살로메(1861~1937)
5.알마 말러(1879~1964)
6.조르주 상드(1804~1876)
7.베티나 폰 아르님:(1785~1859)
1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
거트루드는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의 여성작가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남긴 작품보다는 그녀의 살롱을 드나들던 예술가의 면면과 그녀가 수집한 미술 작품 덕분에 더 유명해졌다.
오빠 리오 스타인과 함께 살았던 이 아파트는 피카소와 마티스, 세잔과 마네 그리고 후안 그리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는 화랑이었고, 파리특파원 헤밍웨이의 휴식처였으며, 에릭 사티의 연주회장이었다. 피츠제랄드 부부의 파티장이었고, 시인 아폴리네르와 그의 연인 마리 로랑생의 카페였으며, 헝가리 출신의 사진작가 만 레이와 미국의 작가 손턴 와일더와 셔우드 앤더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에게 열려 있던 최고의 살롱이었다.
그녀의 살롱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예술가를 한 장소에서 만난 적이 없고, 그토록 많은 그림을 한 장소에서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28)미술작품에 투자했다고 해서 거트루드가 엄청난 재산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플뢰리 가 27번지 아파트는 방 두 개와 12평 남짓한 스튜디오로 되어 있어서, 수집한 그림들을 촘촘히 걸어야 했다. 그녀는 그림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한편으로는 그림이 훌륭한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실용적인 미국인이었다. 거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림 가격이 싼 인상파와 입체파, 야수파 화가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들의 미래에 투자한 것이다. 투자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만들어 그들을 20세기의 거장으로 이끌어준 진정한 예술 애호가였다.
(30)컬렉션의 엄청난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트루드 남매가 파리의 예술가에게 품었던 애정이다. 그들의 무한 애정은 20세기 미술의 역사를 풍성하게 만들어준 유기농 비료같은 역할을 했다. 유명해지기 전의 피카소와 마티스가 전시장을 잡지 못할 때 그들은 자신의 집을 전시장으로 내주었다.
(김미라의 글은 낭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편한 이들과 탁자에 둘러앉아서 이 글을 서로 읽어주면 그 식탁이 더욱 풍성해지리)
(38)거트루드는 에즈라 파운드와 더불어 헤밍웨이의 문학에 등대처럼 방향을 제시했다. 에즈라 파운드는 헤밍웨이의 글에서 수식어를 모두 덜어내고 뼈대만 추려 돌려보내곤 했다. 거트루드 역시덜어낼 것이 없는 문체가 헤밍웨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헤밍웨이는 그것을 '빙산'에 비유했다. '작가는 수면 위의 빙산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에 맡겨야 한다.'는 과감한 생략이 헤밍웨이의 것이 되었다. 그의 문장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근육처럼 탄탄해졌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헤밍웨이의 첫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로 헤밍웨이는 작가로서의 빛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42)거트루드는 예술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처럼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매일매일 기적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기적은 정말 날마다 오니까"
2.쉬잔 발라동(1865~1938)
몽마르트르의 연인/밑바닥부터 인생을 시작해 화가로 생을 마감한 여인/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몰리에르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던 소녀가 화가로 성공함/그녀의 남다른 생애에는 로트레크와 드가처럼 인간적인 격려를 보내준 사람도 있었고, 에릭 사티처럼 순수한 사랑을 선물해준 연인도 있었다./그녀는 에릭 사티가 사랑한 유일한 여인이었다.
(57)사티는 '오베르주 뒤 클루'의 오프닝 공연을 하던 날 쉬잔을 만났다.--사티는 그녀와 함께 사는 6개월 동안 무려 300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다. 마치 지령문처럼 만날 장소와 이유를 쓴 편지를 보낼 때도 있었고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에도 편지를 써서 주었다. 평생의 사랑을 그녀에게 다 쏟아부었기 때문일까? 이 사랑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58)에릭사티의 음악 <짐노페디>, <그노시엔느> 같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카바레 음악의 접목이라고 할 수 있다.
(60)"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기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띠고? 휴식 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갓난아이 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을 흥얼거렸지. 그래, 내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에릭 사티의 일기 중에서
**1994년작 '사티와 쉬잔'이라는 영화가 있다.
(62)1880년, 몽마르트르에서 쉬잔은 모델로서 본격적인 삶을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평범한 듯하지만 모델로 서는 순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분위기를 표현했다. 몇몇 무명화가들의 모델을 거쳐 쉬잔은 르누아르의 모델이 되었다. 르누아르는 쉬잔을 모델로 여러 작품을 그렸다.
부지발의 무도회/도시의 무도회/목욕하는 여인은 쉬잔의 모습이다.
(65)로트레크는 쉬잔을 여인으로서도 사랑했지만 예술가로서도 아꼈다.쉬잔이라는 이름도 로트레크가 지어준 것이다.
(71)쉬잔이 그림에 재능을 가진 것을 알게 된 로트레크는 그녀를 드가에게 보냈다. 쉬잔은 드가를 만난 그날을 '내가 날개를 달던 날'이라고 표현했다. 서커스단의 소녀에서 모델을 거쳐 이제는 화가로서 당당히 세상에 등장한 쉬잔.
드가는 그녀를 모델로 삼은 적도 없었고 오로지 드가 자신처럼 그림을 그리는 동료화가로 대우했다.
(72)쉬잔은 18세에 아들을 낳았다. 미구엘 위트릴로가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주어서 모리스 위트릴로가 되었다. 그도 후에 화가가 되었다.그러나 엄마로부터 방치된 아이는 어릴 때부터 술을 마셨다.결국 16세에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사티는 위트릴로에게 화가의 꿈을 심어주었고 한 살 아래인 모딜리아니는 위트릴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서로 친구가 되었다.
(76)알콜중독치료의 방법으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위트릴로.
쉬잔은 인물만 그렸고 아들 위트릴로는 풍경만 그렸다.
"나는 내 작품에서 시든 꽃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 황폐해진 사원의 꺼져버린 촛내음이 풍겼으면 좋겠다."--모리스 위트릴로
위트릴로의 그림에는 유난히 흰색이 많이 쓰였다. 위트릴로의 '백색시대' 작품들은 인기가 높았다. 중년 이후의 위트릴로는 명성도 얻고 결혼도 하고 안정감을 찾았다.
(80)아이러니하게도 어린시절의 상처에서 조금씩 벗어나자 위트릴로의 그림은 힘을 잃었다. 외로움과 불행이 그의 붓이었고, 빛나는 물감이었고, 캔버스였던 것이다.
또 한 번의 충격은 변전소에 다니며 쉬잔의 모델이 된 친구 위테르와 쉬잔의 결혼이었다.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아들과 불화하며 아름다운 이브가 되었다.
(87)쉬잔 발라동은 맨발의 투사, 진흙탕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마침내 이긴 격투기의 승자 같다.--어항에 갇힌 금붕어 같은 삶이 아니라 천적인 메기와 더불어 실려가는 청어처럼 세상에 함몰되지 않으려 했던 여인.
3.이사도라 덩컨(1877~1927)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아일랜드계
영광과 고통의 이중주
(94)이사도라의 생애에 평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 그녀는 유별난 자의식과 비범한 재능을 품고 살았다. 춤에 모든 것을 거는 고집도 유별났고 사치스러움과 박애주의를 동시에 실현하는 유연함도 놀라웠다.
**영화 맨발의 이사도라
(97)그녀는 오랫동안 꿈꾸던 런던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화려한 여객선이 아니라 가축 수송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대영박물관은 그녀의 거대한 학교였고 켄싱턴 궁전 앞의 잘 가꾸어진 공원은 그녀를 위한 무대였다. 하루에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이 식사의 전부였지만 이사도라는 행복했다.
(98)그녀는 돈에 관한 자신의 성향을 '가난만큼이나 풍족함을 참아내지 못하는 아일랜드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이사도라에게는 먼 훗날이란 없었다.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이었다.
1900년, 파리에서 이사도라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을 알게 된 것이다.
(99)이사도라가 로댕의 조각에서 전율을 느꼈듯이 로댕은 이사도라와 니진스키의 춤에서 전율을 느꼈다. 갑갑한 발레복에 갇힌 무용이 아니라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체의 움직임이 그에게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100)예술가의 아지트 비롱관:로댕, 이사도라 덩컨, 라이너 마리아 릴케 부부, 장 콕토, 화가 마티스 등이 비롱관에 머물렀다.
(102)이사도라의 롤 모델 로이 풀러:이사도라보다 16년 연상의 미국 무용수/미국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최초의 무용수/퀴리부부의 도움을 받아(라듐으로 조명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줌) 성공한 로이는 자신의 춤을 퀴리부부에게 헌정한다./현대무용의 창시자
(106)베를린 젊은이들의 영혼을 뒤흔든 이사도라는 그녀의 꿈이었던 무용학교를 독일에 가장 먼저 설립했다.
(107)이사도라 덩컨을 키운 것은 철학자 니체였다. 니체는 '춤 출 수 없는 신은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춤추지 않는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썼다.
--이사도라는 본격적으로 니체철학을 탐구했다. 자신의 무용이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니체철학의 유혹으로 넋을 잃을 정도'였다고 썼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난해한 책이다. 이사도라는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을 그토록 잘 대변해준 책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109)이사도라가 유럽 그리고 독일로 간 것은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에 맞춰 춤추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음악은 그녀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니체와 바그너가 한때 열렬히 서로의 숭배자였던 것처럼 이사도라도 니체와 바그너의 숭배자였다.
(111)바이로이트에서 이사도라에게 마음껏 춤출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이는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였다.
(114)신 무대미술의 선구자 고든크레이그와 이사도라의 만남: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삶과 예술을 꿈꾼 이사도라는 크레이그와의 사이에 딸을 얻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다.
(115)재봉틀로 막대한 부를 쌓은 백만장자 패리스 싱어 덕분에 무용학교를 위기에서 구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으나 역시 결혼은 하지 않고 아들 하나를 얻었다.
(119) 세번째 연인은 앙드레 뮈라:다시 사랑하라는 처방전을 내려준 뮈라는 이사도라의 딸을 살리려 애쓰던 바로 그 의사였다. 그 슬픔의 순간을 기억나게 하므로 그들은 연인이 될 수 없었다.
(122)이사도라 생애 가장 큰 감명을 준 사람, 엘레오노라 두세:이탈리아 출신 연극배우/무대 위의 두세를 보고 이사도라는 '관객의 눈 앞에서 이룬 그 신적 존재로의 확대는 내가 목격한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취 중의 하나였다.'라고 표현했다./소박하고 기품있는 삶을 산 그녀는 화려하고 떠들썩한 것을 싫어했고 인터뷰도 사양했다./이사도라와 두세는 성향은 달랐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한 예술적 동지였다./두세의 공연을 본 안톤 체호프는 두세를 경이로운 배우라고 극찬했고, 조지 버나드 쇼마저도 '연극이 그토록 높은 예술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엘레오노라 두세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썼다./이사도라가 아이들을 잃고 고통 속에 방황할 때 두세는 전보를 쳤다. 피렌체에 있는 자기집으로 와서 쉬라고. 이사도라보다 스무살 연상이던 두세는 딸같은 그녀에게 두 아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고, 아이들의 사진에 입맞추면서 이사도라와 함께 울었다. 이사도라가 받은 최고의 위로였다.
(2008년 87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한이 많았다.
내가 어머니를 찾아 뵙곤 하는 날에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남동생에 대한 푸념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이제 고만 좀 하시라고, 모처럼의 시간을 왜 그런 이야기로 보내느냐'고 말을 막곤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했더니 그러지 말고 잠자코 들어드리라고 했다.
그 다음 번에 찾아뵀을 때 그렇게 했다.
'엄마 얘기 다 들어줄 테니 오늘은 맘껏 얘기하시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그렇게 얘기해 주니 내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아버지와 남동생 이야기를 더이상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어머니의 입을 막은 건 오직 내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이었나!)
(124)러시아에서의 공연:이사도라의 공연을 본 무용계의 황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이사도라가 제정러시아의 발레에 치명타를 안겼다고 표현했고 몇 년 뒤 러시아 최초의 현대 발레단 '발레뤼스'를 창단했다.
(125)이사도라의 무용학교:재능있는 소녀들에게 무료로 무용을 교육시키려는 꿈은 독일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128)단 한번의 결혼:43세의 나이에 18세 연하인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 결혼했다. 알콜중독자에다 언어가 통하지 않은 예세닌은 이사도라의 재산을 축내고 폭행을 일삼다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마침내 이혼했다.그 후 예세닌은 신혼여행 때 묵었던 호텔에서 피로 쓴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살했다.
(131)이사도라의 절망 탈출법:
1차대전의 참화에 휩싸여 있는 알바니아에서 구호사업을 펼치던 오빠가 그녀를 불렀다.
"몸은 한없이 지쳐 있었지만 알 수없는 이상한 행복감을 느낄"정도로 그녀는 구호활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니스에서 말년을 보낸 그녀는 술에 취해 서서히 망가졌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지금 영광을 향해 떠나요!"라고 말한 뒤 붉은 스카프로 50년의 세월을 매듭지어 버린 그녀의 생애는 한 편의 그리스 비극과도 같았다.
(이사도라와 버나드 쇼가 연애를 한 줄 알았는데 정작 버나드 쇼가 러브레타를 30년간 주고받은 이는 엘렌 테리였다
**엘렌 테리:이사도라의 연인 고든 크레이그의 어머니/걸어서 20분 거리에 산 적이 있으면서도 극소심남 버나드는 편지로 그의 마음을 전했다.
**스필버그 감독 영화 '라이벌': 엘레오노라 두세와 사라 베르나르의 이야기를 다룸(둘다 연극배우)
4.루 살로메(1861~1937)유대계러시아 출신/취리히대학에서 종교와 철학 공부
--나 자신이 되기를 소망하던 여인-
니체, 릴케, 프로이트의 연인, 수많은 남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대표적인 팜므파탈로 기억되는 여인.
(148)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제자들을 가차없이 내친 프로이트였지만 루에게는 언제나 관대했다.
미모와 지성과 학문적 열정, 예술가로서의 명성까지 가진 루 살로메의 등장에 프로이트는 무척 고무되었다.
(152)남자들이 그녀를 사랑한 까닭:그녀와 함께 있으면 남자들은 자신이 더욱 위대하다고 느낀다./지성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남자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그녀는 그 시대의 남자들이 이상적으로 꿈꾸는 여성이었다.
(153)불가근불가원 법칙:프로이트가 고수한 원칙/이 원칙으로 인간의 마음 고수인 프로이트는 루 살로매와의 사랑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나는 그녀를 몹시 사랑했소.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적인 매력은 전혀 느끼지 못했소"-프로이트의 고백
(154)니체의 고백:"루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여인이다."
루는 예술가들에게 잠재된 능력을 이끌어내는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루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누구라도 9개월 안에 명저를 쓴다"는 말이 있다.
(156)38세의 니체와 21세의 루가 만났을 때:"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162)니체의 인생에는 네 여자가 있었다. 어머니, 여동생 엘리자베트, 리스트의 딸이자 바그너의 아내였던 코지마 바그너, 그리고 루 살로메.
어머니와 여동생은 니체에 대한 맹목적 사랑으로 그를 망가뜨렸고, 코지마는 무관심으로 상처를 주었으며, 루는 치명적 매력과 거절로 그를 파괴했다. 니체는 루를 용서하지 않았다. 작품 속의 자라투스트라는 신비롭고 위대하지만 니체는 허물어지는 중이었다. 루살로매가 없었다면 이 책은 탄생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니체도 인정한 바 있다.
(163)루가 동양사학자 프리드리히 칼 안드레아스와 결혼을 발표한 후 4년 뒤 레는 루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던 강변에서 투신했다.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의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의 철학은 나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죽은지 100년쯤 지난 다음에야 이해될 것이다.'라고 말한 니체의 예언은 정확했다.
(169)라이너 마리아의 연인이 되다:1897년 5월, 22세의 릴케와 36세의 루 살로메가 만났다.
루의 소개로 릴케는 톨스토이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만났다.
(172)살아있는 신 톨스토이:릴케는 톨스토이와 함께 산책할 때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톨스토이의 장원 울타리 밖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이 그를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신을 바라보듯 톨스토이를 바라보는 민중의 시선--그 시대의 러시아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두 사람의 차르가 있다. 한 사람은 니콜라이 2세고 다른 한 사람은 레프 톨스토이다.'
(176)릴케와의 이별:루의 이별통보를 받고 상실감을 '두이노의 비가'로 승화시켜 릴케는 성공한 시인이 된다.
(179)릴케의 결혼과 로뎅과의 만남: 루와 이별 후 그녀를 꼭 닮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한다. 클라라는 로뎅의 제자였기에 자연스레 로뎅을 가까이하며 그의 비서가 되고 그의 전기를 쓰게 된다.
릴케는 영감이 떠올라야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로뎅은 작업하는 그 자체를 영감으로 삼았다. 릴케가 로뎅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거나 감정에 침몰되는 것이 아니라 조각가처럼 자연 속에서 일하며 대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는 것, 거친 대리석을 깎으며 그 안에서 형상을 찾는 조각가처럼 막막하고 두려운 세상을 깎아 시로 다듬는 것이야말로 로댕이 릴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188)巨富의 아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 ~1951)
유대인/부친이 철강업으로 부를 축적/집에 7대의 피아노가 있음/집안에서 로댕, 클림트, 브람스 등을 후원/히틀러와 린츠국립공업학교 동창/히틀러의 혐오감을 샀다/둘의 만남이 유대인의 역사를 바꿨을지도 모른다는 추측/항공공학박사/러셀의 제자가 되어 수학 철학 섭렵/클래식의 대가/케임브리지에 도착한 비트겐스타인을 보고 "저기 신이 도착했다"고 경제학자 케인즈가 외쳤다./부친사망 후 막대한 유산 상속을 거부하고 남은 재산마저 가난하고 유망한 작가를 후원했다./그 첫 수혜자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그는 톨스토이로부터 영향을 받아 물질에 초연했다/1차대전 참전 중에도 톨스토이의 책을 지니고 다녔다
5.알마 말러 그로피우스 베르펠(1879~1964)
오스트리아 빈/알마 마리아 쉰들러/작곡가/아버지 에밀 야콥 쉰들러는 풍경화가/그녀 13세에 부친이 돌아가심/3년 뒤 아버지의 제자와 모친 재혼/첫 번째 남편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두 번째 남편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세 번째 남편은 체코 출신의 시인이자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프란츠 베르펠/그러나 첫사랑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그밖에 표현주의의 대가 오스카 코코슈카, 작곡가이자 스승 알렉산더 쳄린스키, 홀른슈타인 신부가 있다
'내 아버지의 정원에서'라는 알마의 가곡 제목처럼 그녀의 남자들은 아버지 같이 나이가 많고 탁월한 예술가들이었다.
(간식타임)왜 베토벤인가?
베토벤은 예술을 비로소 예술가의 것으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다. 음악이란 왕족과 귀족의 주문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에게 영감이 떠오를 때 비로소 탄생되는 것임을 선언한 최초의 작곡가이다.
(215)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알마는 냉정하고 무겁고 칙칙한 말러를 점점 더 견딜 수 없었다.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정의 모든 짐을 지고 아내로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녀는 화려한 사교계를 그리워하며 옛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초청받게 되어 뉴욕으로 이주한다./알마에 대한 말러의 사랑이 잘 표현된 음악--교향곡5번 4악장
(217)알마의 위기:알마는 냉기가 감도는 결혼생활에 지쳐 있었다. 작곡가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아내가 되어 준다면 그의 생애 전부를 바쳐 행복하게 해 주겠다던 말러의 결혼서약은 어딘가에서 표류 중이었다.
(220)발터 그로피우스와의 만남:20세기 건축과 디자인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키가 크고 짙은 눈썹을 가진, 젊고 강하고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남자/요양원 의사의 소개로 알마의 춤파트너로 만나게 됨
(간식코너)(218)로댕과 말러:거물은 서로 알아보고 로댕이 조각한 말러상은 빈과 뉴욕, 필라델피아, 파리에 있다
(223)말러와 프로이트의 만남:알마의 외도 이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말러는 병을 얻음/말러와 프로이트는 둘다 똑같이 보헤미아 출신에 유대인이었으며 동년배에다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다./프로이트의 진단 결과 알마는 다시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들의 결혼생활엔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이들을 다룬 영화:Mahler on the Couch
(226)말러의 8번 교향곡:"이전의 내 교향곡은 이 작품을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일명 1000인 교향곡/1910년 9월1일, 뮌헨 초연 때 무대에 오른 인원이 1029명/합창단원 858명, 현악기 연주자 84명, 하프연주자 6명, 목관악기 연주자 22명, 금관악기 연주자 17명 총171명의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무대를 가득 채웠다./질 높은 음악, 거대한 스케일과 호기심까지 맞물려 대성공을 거둠
(230)코코슈카와의 만남:코코는 클림트의 제자이자 극작가./나치에 저항/후에 영국 콘월로 이주/알마는 코코의 모델이 됨
(234)알마를 모델로 한 '바람의 신부'는 코코슈카의 대표작/1980년 94세로 생을 마감함
(243)현대 건축의 거장 그로피우스와의 짧은 인연:1915년 8월, 그로피우스를 두 번째 남편으로 맞이함/알마는 그녀의 생애에 만난 모든 남자 중에서 그로피우스를 가장 사랑했다고 썼다./그는 자신의 삶에서 만난 가장 관대하고 고결한 사람이었다/그들의 부부생활은 1920년 10월에 끝났다
(나는 왜 이렇게 남의 연애사건에 열을 올리는가? 세기의 연인들 얘기라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행복과 불행의 날줄 씨줄로 엮인 인생 드라마라서~?)
(248)세번째 남편 베르펠:유대인/사귄지 9년만에 결혼/'베르나데트의 노래'로 유명해짐/카프카와 절친/알마와의 여행에서 알게 된 아르메니아 인 인종청소 사건을 다룬 '무사 다그의 40일'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름/알마의 명성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간식타임)(255)말러와 토마스 만:토마스 만은 자신을 키운 세 스승으로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를 꼽았지만 말러의 음악을 숭배했다. 그의 소설 '베니스에서 죽다'는 말러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 작품은 같은 제목으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6.조르주 상드(1804~1876)본명은 오로르 루실 뒤팽
--사랑하라, 삶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자유+평등=사랑
부친 모리스 뒤팽은 폴란드 왕족으로 기병대 장교, 모친 소피 들라보르드는 센 강변 새장수 딸로 단역배우로 둘은 1804년 결혼한다./ 상드 네 살 때 부친이 낙마사고로 죽음/상드에게 귀족교육을 원한 할머니의 바람에 따라 모친은 상드 곁을 떠남/남장한 상드는 소작농의 자녀들과 친구로 지냄/할머니는 상드에게 음악, 미술,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수학과 역사까지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을 포함한 약자와 더불어 사는 구체적방법도 터득하게 해주었다.
(270)할머니가 돌아가신 1821년, 17세의 상드는 노앙(프랑스 중부 앵드르 지방의 라샤트르의 한 마을)의 대저택을 물려받았다. 그곳은 농부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던 곳이고 위대한 예술가들을 불러들인 휴양지였으며, 세상에 지친 노년의 상드에게 안식을 주었던 곳, 노앙은 상드의 성지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예술계의 작은 성지이기도 하다.
**그녀의 손님들:쇼팽, 리스트, 발자크, 들라크루아, 하이네, 투르게네프, 플로베르, 성악가 폴린 비아르
(266)당대의 남성예술가들이 상드에 대해 남긴 글:오늘날의 인터넷 악성 댓글 못지 않게 가혹하다. 보들레르와 공쿠르 형제가 특히 잔혹한 평가를 남겼다. '하수구, 화장실'--
반대로 작가로서의 상드를 존경한 예술가도 많았다. 상드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문학에 담았고, 일하는 사람의 세상을 꿈꾼 노동운동가였으며, 유럽통합이 이루어지기 거의 150년 전부터 유럽통합을 열망한 선구자이자, 빅토르 위고와 어깨를 나란히 한 사회소설의 대가였다.
그녀는 경계를 무수히 뛰어넘은 혁명가였다.
(267)'사회는 언제나 나쁜 타깃을 찾는데 집착하고 있다'고 스위스 출신의 작가이자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또한 사회문제 중 많은 부분은 나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이나 상상력의 결여, 진부함 때문에 발생한다고 통찰했다. 상드는 1830년대가 찾던 나쁜 타깃에 스스로 먹이를 제공한 셈이다.
(271)상드의 4만여 통의 편지:지금도 발굴 중/그것은 상드가 기록한 그녀 자신이며, 그녀의 인생이며, 그녀가 몸담은 시대의 기록이다./편지에서 보듯 상드는 평생 어떤 상황에서나 솔직했다.부도덕한 면은 있을지언정 인정할 것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275)여자는 남자가 변할 것이라 생각하고 결혼한다. 그러나 남자는 변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여자는 변한다.
상드의 남자들:첫 남편 뒤드방 남작(사냥 파티 도박 방탕함)--법관 오렐리앙 드 세즈(약혼자가 있는 처지라 서신교환만)--법학도이자 무명작가 쥘 상도와 동거(조르주 상드라는 필명을 선물함)--1832년 상드는 작품 '앵디아나'로 주목받기 시작함/이듬해 자전적 소설 '렐리아' 발표--프로스페르 메리메--1833 알프레드 뮈세--쇼팽--알렉상드르 망소
**뮈세의 고백:나밖에 모르며 황량하게 살던 어느 날 나는 상드를 만났다.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사랑에 빠졌다/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키스' '푸른노트'는 뮈세와 상드의 이야기다/1835년에 사랑은 끝났다/뮈세의 소설 '세기아의 고백'은 뮈세와 상드의 사랑이야기다.
(간식)(295-298)쇼팽과 들라크루아:쇼팽이 외로운 파리생활을 할 때 곁에서 따뜻하게 보살펴 준 친구/전생에 쌍둥이였거나 짝이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닮은 영혼을 소유한 쇼팽에 대해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써놓았다. '나는 내가 몹시 사랑하는 훌륭한 인간 쇼팽과 한없이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한 예술가다./둘은 곱슬머리에 따뜻하고 고독한 눈빛, 우아한 정신, 훌륭한 태도를 공유했다./들라크루아는 이름난 화가이자 작가이며 연주자였다. 그의 일기는 18세기 중후반 프랑스 예술사를 알 수 있는, 루소의 <고백록>에 필적하는 기록이다.
(298)상드와 발자크:"당신은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그리시지요. 저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린다고 자부합니다. 단지 제게는 저속한 존재들이 더 흥미로울 뿐입니다. 저는그들을 확대시키고 추함과 어리석음이라는 방향으로 이상화시키지요."-발자크
상드가 숱한 남자들과 염문을 뿌릴 때 발자크는 허세와 탁월한 언변으로 명문가의 여성들과 스캔들을 만들었다. 그는 살아가는 내내 '명예와 재산과 사랑'에 배고팠다. 발자크와 상드가 서로 절친하기는 했으나 연정을 품은 적이 없다는 것도 특이하다.
(300)상드의 손님 투르게네프:독일과 러시아 작가들은 상드에게 호감을 보였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작가로 데뷔하기 전 상드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바 있다./투르게네프는 러시아 문학에서 제외되었던 농민을 문학 속으로 초대했다. 관련 작품으로 '사냥꾼의 수기'가 있다.
(304)상드와 빅토르 위고:동시대에 태어나서 활동하다가 똑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상드는 '오라스'를 썼다.
작가로서의 노선은 한동안 달랐으나 위고와 상드는 서민의 삶을 문학에 담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공유했다./위고는 그녀에 대해서 '그녀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상드는 위대한 인간이 된다.'고 얘기했으며, 상드의 장례식에서 그녀를 '영원불멸한 위대한 영혼'이라고 했다.
(311)훌륭한 여성들과의 만남:
플로라 트리스탄--심장에 총알을 품은 여인(실제로 이혼당한 남편이 복수심으로 권총을 쏘았으나 심장부근에 박혀 빼내지 못한 채로 살았음)/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남성보다 더 용감한 노동운동가
(316-317)플로베르와 상드:
플로베르의 작품 <살람보>에 대해 상드가 우호적인 평을 한 것이 계기.
플로베르는 돈과 성공에 열광하는 루앙 사람들을 경멸하며 한적한 시골 크루아세라는 곳에서 40년간 은둔생활을 함/이곳을 종종 방문한 상드는 새벽까지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함께 산책했다./크루아세에는 이밖에 에밀 졸라, 콩쿠르 형제, 알퐁스 도데, 모파상, 투르게네프, 미국의 헨리 제임스 등이 단골손님이었다.
(319)마지막 연인은 젊은 판화가 알렉상드르 망소:연인이자 비서/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년 동안 그녀 곁을 지킴/상드는 손자들을 위해 동화책을 쓰는 인자한 할머니가 됨
(320)"산다는 것은 멋지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괴로움, 남편, 권태,부채,가족, 그리고 가슴이 미어지는 고뇌와 끈질긴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은 도취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며 행복입니다. 천국입니다. 아! 나는 맹세코 예술가의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나의 좌우명은 자유입니다."-어느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식)(323)리스트:헝가리 사람/바그너와 절친이자 동지였고 후에 바그너의 장인이 된다./낭만주의 시대의 아이콘인 리스트는 삶 자체가 거대한 드라마/슈만과 쇼팽과 음악 동지/
스승 체르니는 리스트의 재능을 무료로 키워준 사람/ 그 보답으로 리스트 또한 제자들에게 무료로 레슨을 함/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12세 때 연주하여 베토벤의 극찬을 들음/그의 연주여행 거리는 초인적이었다./속세의 모든 걸 누린 뒤 수도자가 되었다.
**리스트의 작품:<헝가리 광시곡>
(간식2)오노레 드 발자크:7전8기의 입지전적 인물/바닥으로 떨어진 영혼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놓았다/발자크문학의 원동력은 빚이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쉼없이 글을 써야 했다.
간식3(327)짝사랑의 대가들:투르게네프, 브람스, 안델센
**투르게네프와 폴린 비아르도--폴린 비아르도는 당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가수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슈만은 '지금까지 만나본 여성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 했고 상상스는 '삼손과 데릴라'를, 슈만은 서정가곡집 '리더크라이스'를 헌정했다./투르게네프는 1843년 처음 만났을 때부터 1871년까지 그녀(남편은 작가이자 연출가 루이 비아르도)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으며 결국 프랑스의 부지발에서 폴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는 자전적 소설이며 <첫사랑>도 이때의 작품이다.
**브람스와 클라라
**안델센과 성악가 예니 린트--안델센은 가난하고 못생기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불행한 남자로서 예니 린트를 서글프게 짝사랑했다./인어공주, 나이팅게일은 예니를 위해 쓴 작품이었다
7.베티나 폰 아르님:(1785~1859)
베를린의 투사, 독일 낭만주의의 명사/조실부모함/소설가 외할머니 품에서 10대를 보냄/반은 마녀이고 반은 천사이며 반은 예언자이며 반은 거짓말쟁이인--/괴테의 연인이면서 동시에 베토벤의 연인,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를 꽃피운 작가 아힘 폰 아르님의 아내/작가로, 조각가로,작곡가로,성악가로, 출판가로, 훗날에는 사회개혁가로 활약함/1812년에 그림형제는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그림동화집)를 출판, 베티나에게 헌정했다.
(349)괴테와의 인연:원래 괴테가 사랑한 건 베티나의 어머니 막시밀리아네/'젊은베르테르의 슬픔'에 영향을 미침/베티나에 대한 괴테의 생각은 한 마디로 '이 고통스런 방해자'/베티나는 '위대한 타인을 통해 불멸을 추구하는 여인'이었을까?
(357)베토벤, 불멸의 여인:줄리에타 귀차르디, 베티나, 안토니에
베토벤은 베티나와 자신의 관계를 '옴팔레 여왕 앞의 헤라클레스' 같다고 표현했다. 적극적이며 총명한 베티나와의 결혼을 꿈꾸었다고 짐작할 만한 정황도 있다.
밀란 쿤데라처럼 베티나를 의혹에 가득찬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베토벤을 끌여들여 괴테에게 질투라는 불화살을 날린 것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베티나와 베토벤이 주고받은 편지진본은 한 통에 불과하고, 교제기간은 몇 개월에 불과했는데도 '불멸의 연인' 반열에 올라있다.
(360)베티나의 지적인 내면과 거침없는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바로 그 괴팍함이 베티나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있다고 작가 카롤리네 슐레겔 셰링은 말했다.
베티나는 산업화가 몰고 온 도시빈민 문제에 관심이 깊었다. 빈민청에서 일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원서를 썼다. 이후 베티나는 망명작가와 소외된 사람을 도우며 살았다. 자유와 평등의 투사가 된 것이다.
(371)5마르크 지폐에 새겨진 베티나:자유의 정신을 잘 실천한 예술가로서의 베티나를 기념한 화폐.
19세기를 산 여인들의 살롱문화와 성적으로 개방된 생활을 만끽(?)한 여인들 이야기라는 시각에서는 '유럽판 선데이 서울'이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그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좋은 교육환경에서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남성들 못지않게 높은 수준을 보였다. 그러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세계를 지배하는 남자들은 여성의 재능을 자기들과 견주는 걸 원치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모델이거나 아내거나 후원자였다. 오죽하면 이름난 남자들 가까이서 狐假虎威하려 했겠는가? 그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나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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