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삼성출판사/1988.9초판발행/62쪽(135~193)/읽은 때 2021.5.11~5.13
<교황청의 지하도>는 좀 허황되고, <좁은문>은 제목에서 오는 느낌대로 좀 답답하고, 이 <전원교향곡>은 술술 잘 읽힌다.
(목사부인 아멜리는 장하다. 다섯 아이를 기르면서도 장님 소녀 제르뜨뤼드를 거두기로 했다니~. 요새 툭하면 아동학대건이 뉴스로 떠오르는 마당에 더욱 더--)
(140)그녀가 늘어놓는 말의 처음 몇 마디를 듣자,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이 내 마음 속으로부터 입술로 올라왔으나, 나는 일부러 그것을 꾹 참았다. 어떤 경우에든 자기의 행동을 성서의 권위로 옹호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42)아이들:샤를로뜨는 오늘 손 위 아이들의 누구보다도 마음 착하게 행동했다고 나는 분명히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아이든 모두 저만한 나이 또래에는 반드시 그런 식으로 꼭 한 번은 나를 속였었다. 모두들 마음씨가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뜻밖에 말만 앞세우는 아첨장이가 되기도 하였다.
(143)하느님께 책임을 돌린다는 것과 남에게 짐을 지우게 한다는 것은 딴 문제이다. 얼마 후, 나는 아멜리의 팔에 무거운 짐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이 너무나 무거운 짐이어서 처음에는 나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을 정도였다.
(145)목사친구인 의사 마르땡의 말:이런 종류의 불구자(농아, 맹아 등)는 모두 행복했었네. 의사 표시의 능력을 얻게 되자 그들은 저마다 그것을 저희들의 '행복'을 나타내는 데 사용했어. 물론 신문기자들은 신바람이 나서, 오관을 향락하고 있으면서도 불만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낯가죽이 두꺼운 친구들에 대한 교훈으로 삼았지.
(146)의사 마르땡:
인간의 영혼이란 도처에서 세계를 어둡게 하고, 타락시키고, 더럽히고, 파괴하고 있는 무질서와 죄악보다는, 미와 안락과 조화를 즐겨 상상하고 싶어하는 법이지만, 우리들의 오관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악의 존재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 악을 나눠 갖게 하는 능력을 부여하기도 한다는 말일세. 악을 무시할 수 있다면 인간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147)길 잃은 양의 비유:
그리스도교에 깊이 귀의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양떼 중의 어느 한 마리라도 따로 떼어놓으면 이 목자의 눈에는 그 양이 나머지 양 전체보다 소중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147)제르뜨뤼드의 최초의 미소는 그때까지의 내 노고를 씻은 듯이 잊게 하고, 내가 겪어온 어려운 일을 백 배의 기쁨으로 갚아주었다. 그렇다. 나는 솔직히 말하련다. 오랫동안 애쓴 끝에 무엇을 가르쳐주려하고 있었는지를 불현듯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생각된 그 아침의, 이 塑像같은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한 미소는, 내 친자식의 미소보다도 내 가슴을 깨끗한 기쁨으로 가득차게 하였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활기를 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새벽빛에 앞서 눈에 덮인 산봉우리의 모습을 밤의 어둠 속에서 떠는 듯이 두드러지게 비추는 저 알프스의 새벽의 연한 복숭아빛 광선같이 불쑥 나타나는 광명이었다.
이때 그녀를 찾아온 것은 지성이라기보다 사랑에 가까운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깊은 감사의 마음이 나를 뿌리채 들어올렸다. 그래서 나는 마치 하느님에게라도 하는 듯한 기분으로 이 아름다운 이마에 키스를 했다.
(아름다운 문장이 많아 필사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149)"땅 위는 새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아름답나요?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 얘길 더 하질 않아요?"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는 너만큼 잘 들리진 않는단다, 제르뜨뤼드"
(황창현 신부님 말씀이 생각난다.
맹인 셋이 <평창 피정의 집>을 방문해서 평창강을 바라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이곳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군요."
"보이지도 않는데 아름다운 줄 어떻게 알아?"
"저희는 물흐르는 소리,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 코끝에서 묻어나는 솔향기만 맡아도 다 알 수 있어요")
(153)비교하는 것에 너무 열중했기 때문에 나는 제르뜨뤼드가 뇌샤뗄의 음악회에서 얻은 그 비상한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를 못했다. 그날의 연주곡목은 바로 '전원교향악'이었다.
'바로' 라는 말을 내가 썼지만, 그 이유는 이 작품만큼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한 작품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155)아내의 바가지?:제르뜨뤼드를 데리고 음악회에 다녀온 목사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집안 식구들에게도 해 준 일이 없는 것을 그애를 위해서라면 하시지 않아요"
(나라도 부아가 나서 그렇게 말했겠다. 목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제르뜨뤼드에게 빠진 것이다)
(157)그녀는 늘 하던 버릇대로 뚜렷한 잘못에 대해 비난을 하기보다 가상적인 잘못에 대한 비난이 더 심했다. 아, 세상사람들이 현실의 괴로움에만 그치고 마음 속의 악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우리 인간들의 고뇌도 얼마나 견디기 쉬워질 것인가--
(159)자크와 제르뜨뤼드:이들이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게 된 목사의 가슴엔 커다란 슬픔이 차올랐다.
(161)"저는 제르뜨뤼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녀를 존경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위하여 지지자가 되고 친구가 되고, 남편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그녀와 결혼할 결심이 생기기까지는 나에게 그것을 고백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였다.
(173)나는 우리들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형성하고 있는 개념의 대부분은 그리스도 자신이 한 말에서 온 것이 아니고, 성바울의 주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나는 복음서를 펼쳐 아무리 찾아보아도, 계율의 말도, 위협의 말도, 금지의 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이것은 모두 성 바울이 한 일이다.
(174~175)사람은 누구나 모두 자기에게 가능한 환희를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지고 있다. 각자는 모두 이 환희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제르뜨뤼드의 단 한 번의 미소가, 나의 종교교육이 그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다.
(178)목사의 하루: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고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순회와 싸움의 하루를 마치고, 밤이 되어서야 때로는 피로에 지친 몸으로, 마음 속으로부터는 흡족한 휴식과 애정과 온정의 욕구를 간절히 느끼면서 돌아오는 내가 나의 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마음의 시달림이며 힐난이며 갈등임에 불과하다. 이러할 바에야 차라리 바깥의 한기와 비바람이 얼마나 더 고마운지 모른다.
(누구나 스위트 홈을 꿈꾸나, 모든 이가 스위트 홈에 살지는 않는다. 때로는 커피숍, 햄버거집, 술집이 집에서 누리지 못하는 작은 행복을 선사하기도 한다)
(186)제르뜨뤼드의 눈수술:
제르뜨뤼드에게는 시력을 주려 하오나, 저로서는 저 자신의 시력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옵니다.
(190)제르뜨뤼드의 고백1:저는 목사님의 마음과 생활, 나아가서는 제가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까지 너무나 많은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어요. 목사님 곁에 돌아왔을 때, 맨 먼저 제가 느낀 것이 그것이었어요. 제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사실은 제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리였어요. 그것은 그 자리를 빼앗겨 슬픔에 젖어 있는 분의 자리였어요. 그걸 알고도 목사님의 사랑을 받아왔으니 제가 나빴어요. 하지만 목사님은 조금도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저를 조용히 눈 감게만 해주세요. 그리고 그분에게 기쁨을 돌려 드리세요.
(191)제르뜨뤼드의 고백2:
목사님이 저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주셨을 때, 저의 눈앞엔 제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졌어요. 정말 저는 그때까지 햇빛이 그토록 밝고, 공기가 그토록 빛나고, 하늘이 그토록 넓으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어요. 그러나 한편 인간의 머리가 그토록 고민에 차 있으리라는 것 역시 상상조차 못했었어요. 제가 퇴원을 하여 목사님 댁에 들어섰을 때 맨처음 제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목사님은 아시겠어요? 맨처음 제 눈에 보인 것은 우리들이 저지른 과오, 우리들이 저지른 죄였어요.
병원에 있을 때 전 읽었어요. 성경속의 말씀 가운데 아직 제가 몰랐던 부분, 목사님이 한번도 저에게 읽어주시지 않았던 부분을 말예요.
'내가 전에는 율법없이 살았었는데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자끄는 개종하여 종문에 들어가고 제르뜨뤼드는 목사를 원망하며 죽는다. 아들과 연인을 동시에 잃은 '위선자 목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목사의 처지에 놓이면 어찌 제르뜨뤼드같은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193)자끄는 그제사 그와 제르뜨뤼드가 함께 개종한 사실을 나에게 통고하였다. 이리하여 이들 둘은 때를 같이하여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승에서 나때문에 영원히 한 몸이 될 수 없었으니 나에게서 도망쳐 하느님 앞에서나마 한몸이 되기를 서로 기약한 눈치같기도 하였다.
자끄가 돌아간 뒤 나는 아멜리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의 죄를 씻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기를 간청했다. 나는 인간의 도움이 아쉬웠던 것이다. 그녀는 단지"주여! 저희들의 아버지시여---"하고만 되뇌일 뿐이었으나 그 귀절과 귀절 사이엔 두 사람의 간절한 애원을 담은 긴 침묵이 깔렸다.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 방울의 눈물도 없이 사막처럼 메말라버렸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어찌 보면 통속소설류에 들지도 모르지만 가장 드라마틱하고 재미도 있고 슬프고 안타깝다.
마땅히 벌 받아야 할 사람은 목사건만 아내 앞에 무릎 꿇고 하느님을 찾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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