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의 화려한 황제
시공사/테레스 비타르/175쪽/1998.1초판ㆍ2012.2초판 23쇄/읽은 때 2021.6.20~6.25
**테레스 비타르:루브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슬람예술 분야 전문가
**술레이만(1494~1566) 치세기간:1520~1566
600년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다룬 터키 드라마 <위대한 세기>는 지금도 여러 채널에서 계속 방영되고 있다.
화려한 의상, 배우들의 빼어난 외모, 궁중의 품위있는 언어, 시로 읊는 사랑의 말,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인들의 갈등과 스릴 만점의 사건들-- 시청자를 끌 만한 요소가 두루 갖추어져 종편이 재미를 보고 있다.
나도 어느 날 무심히 채널을 돌리다 <위대한세기>를 발견하고 이어지는 호기심에 터키역사책을 계속 읽고 있다.
제1장 제국의 기원에서 콘스탄티노플 점령까지
(당시 세밀화를 살펴보면 씨름, 음악에 맞추어 공중곡예하기, 선상에서 회전그네 타기, 배와 배 사이를 공중에서 마차로 건너기 등 스릴을 즐겼던 것 같다.)
(13)아나톨리아지방의 접경지대에 살던 오스만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놀라운 서사시를 쓰기 시작한 시기는 14세기 초였다. 당시 비잔틴과 이슬람 세계의 경계선상에 자리잡고 있던 오스만족은 투르크멘족의 보잘것없는 수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뒤를 이을 제국을 건설했다. 6세기(14세기~20세기 초)의 통치기간 동안 오스만제국은 세 대륙에 걸쳐 지배력을 확장시켜 나갔고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4)이슬람교도인 이들 투르크족은 선지자 마호메트의 전통을 지키는 정통 회교도였다./알렉시스 콤네노스가 권력을 장악한 1081년에 소아시아는 거의 투르크족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16)1290년 왕위를 계승한 에르토그롤의 아들 오스만이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17)1323년 점령된 도시 부르사는 오스만제국 최초의 수도가 되었다.
(19)그들은 유럽에 진출하여 약 6세기 가량 머물게 된다.(1354~)
오르한의 아들 무라드 1세가 권좌에 올라 1363년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에 중앙정부를 세웠다.
이 도시는 셀주크왕조의 거대도시 공동체들처럼 곧 찬란한 지적, 예술적 중심지가 되었다.
(20)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 전투:
십자군이 투르크족 군대에게 참패하여 서구인에게 두려움을 안겨줌
그러나 바예지드 1세는 몽고족 티무르 랭(타메를란)에게 패한 후 비참한 종말을 맞고 오스만제국은 분열 직전의 위기를 맞는다.
제2장 제국의 번영기
(25)오스만족에게 단연코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도였다. 1453년에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마침내 비잔틴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16세기에 셀림1세와 화려한 황제 술레이만은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와 페르시아만에 이르렀고, 보스니아에서 알제리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도 그들의 영토에 속했으며 흑해는 내해가 되었다.
(30)셀림1세:술레이만의 아버지/셀림은 탁월한 전투 지휘관이자 공정한 행정가였고 흠잡을 데 없는 정통 회교도였으며 쾌락과 사치에 조금도 경도되지 않았다. 안경낀 독서광이었던 그는 페르시아 어로 시를 지었고 폭넓은 교양을 지닌 사람이었다./예니체리 군대의 지지를 받고 셀림은 1512년 6월 왕위에 오름/ 즉위 1년 후 술레이만을 제외하고 왕위계승 후보자들을 모두 제거했다./이집트의 맘루크왕조에 종지부를 찍게한 후 1520년 가을 셀림1세는 급환으로 사망했다/1512년 붕괴 위기에 놓인 국가를 인수받은 셀림1세는 8년만에 오스만제국을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로 뻗어가는 대국으로 만들어 아들 술레이만의 손에 넘겨주었다.
(34)술레이만은 제국에서 가장 오랜 통치(1520~1566)를 시작했다
술레이만은 장신에다 마른 편이었다. 메부리코에 각진 턱, 위압적인 검고 커다란 눈은 엄격한 인상을 주었다./그는 공정하고 현명하며 도덕적으로 고매하고 매우 종교적인 인물로 그려졌다/또한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고 자신이 한 약속을 충실히지키는 사려깊은 인물이기도 했는데 말년에는 금욕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렘왕비와 각별히 총애했던 재상 이브라힘에게만은 지나치게 유약했다는 비판을 받았다./특히 국가의 안녕을 위해 두 아들을 희생시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아내 록셀란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지만 우아했다./그녀는 쾌활한 성격 때문에 명랑한 여인 즉 후렘이란 별명을 얻었다.
(39)로도스섬:1309년 성요한 기사단이 로도스섬을 난공불락의 기지로 만들어 놓았으나, 오스만제국의 군대가 5개월 전투 끝에 1522년 12월 섬을 함락시켜, 지중해는 오스만제국의 호수가 되었다.
(40)술레이만 통치기의 황금기는 이브라힘 파샤가 재상직에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술레이만을 섬기는 시동으로 들어온 그리스 출신의 이브라힘은 당당한 풍채와 지성, 빠른 두뇌 회전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그는 곧 왕의 그림자와 같은 동반자가 되었다./1523년 술레이만은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이듬해에 누이 하디스와 결혼시켰다.
(41)모하크스 평원의 전투:헝가리군대와 루트비히 2세는 오스만 군대의 대포에 의해 몰살되었고 술레이만과 재상의 입지는 한층 높아졌다.
(42)이라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오스만제국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온 전쟁은 이브라힘의 불운을 불러와, 1536년 3월 14일 밤과 15일 사이에 그는 은밀하게 암살되었다.
(44)술레이만의 통치 말년은 가정의 비극으로 얼룩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록셀란 왕비를 잃었고 세 아들 중 둘이 죽었다./무스타파는 1553년에, 바예지드는 1561년에 국가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처형되었다./유일한 아들인 셀림은 무능한 술주정꾼이었다/건강이 악화되어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왕은 오스트리아가 조공을 거부하자 마지막 전투(13번째)에 나선다/지게트바르를 공략하던 중 그는 전사했다/이틀 후 그 도시는 함락되었다/술레이만 사후 오스만 제국은 재상 소쿨루 메흐메드 파샤(1564년에 임명되어 14년간봉직) 덕분에 번영을 유지했다.
(46)레판토 전투:오스만 군대의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연합군에 대패, 전멸당한다./무적의 오스만군에 대한 신화가 깨졌다/1574년 술탄이 사망하고 1579년 재상 소쿨루 파샤는 한 광신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16세기 말 이미 제국은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제3장 오스만 제국
(49)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이룩한 놀라운 팽창과 모든 영역에 걸친 번영은 중앙집권화된 권력,국가의 필요에 부응하는 빈틈없는 행정체계, 훌륭한 장비를 갖춘 강력한 군대 등 제국의 견고한 내부구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4세기 전반에 갖춰지기 시작한 이러한 구조는 대부분 무라드 1세와 정복자 메흐메드 2세, 화려한 술레이만, 이 세 명의 대술탄이 이룬 업적이었다.
(51)16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 발칸반도, 근동, 북아프리카 지역을 포함하여 보스니아에서 알제리까지 카스피해에서 아라비아-페르시아만과 예멘까지 뻗어있던, 국가와 종족의 모자이크라 할 수 있다. 제국의 국민은 약 2000만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58)예니체리 부대:오스만군의 선봉부대/황제에게 완전히 종속된 직업군인/상징으로 청동냄비(하잔)를 갖고 다녔다/오스만 제국의 가장 중요한 군인집단이었던 이들은 1527년에는 그 수가 2만명에 이르렀다./예니체리의 대장인 아가는 위엄과 권위를 고루 갖춘 사람이어서 귀족처녀와 결혼하는 일이 아주 흔했다.
(61)해군 대제독 카이레딘 파샤(바르베로사):지중해의 해적이자 알제의 영주/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인/1533년 술레이만은 오스만 함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그를 소환, 제독으로 임명함/혁혁한 공을 세우고 1546년에 사망함
제4장 이스탄불, 제국의 수도
(66)이스탄불은 정복된 지 25년 후에는 인구가 7만 명에 이르렀고 술레이만 통치 초기인 1520년경에는 40만 명, 16세기 말에는 약 70만 명이 살게 되었다./이스탄불의 원래 이름은 이슬람볼(이슬람교가 풍부하다)로 메흐메드 2세가 지었다.
(73)하렘은 대단히 많은 여자 노예를 수용할 수 있었는데, 1603년에는 그 수가 266명이나 되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처녀노예들만이 선발과정을 거쳐 들어갈 수 있었다.
제5장 예술적 도약
(89)16세기 오스만제국의 예술은 절정에 도달했다. 즉 오스만 고유의 요소에다가 외부에서 받은 영향을 종합하여 오스만 예술의 생명력, 독창성, 황실풍이라는 특성을 확고히 했다. 특히 건축 영역에서의 창조물들은 영감의 원천이 된 권력을 찬미했고, 황실작업장에서 주요 장식적 요소가 탄생했다.
(94)술레이만 치하의 건축가 시난은 천부적인 창조력과 천재성으로 건축예술을 지배했다.
시난은 오스만제국의 전형적인 회교사원의 건축규칙을 정했다. 그가 지은 건물들은 집중형 설계에 기초하여 피라미드 형태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시난은 자신이 추구하던 완벽한 이상에 단숨에 도달했던 것은 아니다. 생을 마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흐자데는 견습생이었을 때의 작품이고, 술레이마니예는 내 최초의 작품이며, 셀리미예는 내 걸작품이다."
1574년 스스로 걸작품이라고 인정한 이 마지막 회교사원을 완성했을 때 시난의 나이는 80세였다.
(98)오스만 서예사:코란을 계시하는 매개물인 성스러운 언어인 아랍문자를 취급한다는 이유로 이슬람세계에서는 서예가가 다른 예술가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다.
아흐메드 카라히사리는 탁월한 서예가로 술레이만의 총애를 받았다.
(106)양탄자와 화려한 직물:오스만 예술의 찬란한 결정체
(108)이즈니크 도자기:코발트 불루--터키 옥색--담록색--연한 자색--회색--보라색등의 은은한 파스텔조색상 사용-검은색 테가 이즈니크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다.
제6장 제국의 쇠퇴와 멸망
(112)패망의 조짐들:
*국가의 안녕보다는 일신의 쾌락에 더욱 신경을 씀
*실권이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데 술탄에게 넘어감
*친족에 대한 특혜, 매관 제도
*예니체리들이 갈등의 장본인(술탄을 폐위시키고 암살함)
(113)빈 포위, 참패함(1683.7):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폴란드가 유럽에서 투르크인들을 내쫓기 위한 동맹을 맺는 계기 제공
(117)오리엔트 문제:전리품을 분배하고 중동에서 자기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유럽열강들 사이의 경쟁과 오스만 제국의 영토 축소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117)마흐무드2세(1808~1839):
1826년 예니체리 부대 해체/일련의 개혁 단행/황제 칙서--"오스만 제국의 모든 국민은 종교와 민족의 구별없이 평등하며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개인은 재산에 비례하여 세금을 직접 국가에 납부해야 하며 군복무는 추첨을 통하여 결정된다"/오스만 제국의 언어로 된 신문이 처음으로 발행됨
(120)지옥이 된 세바스토폴:우크라이나 크림 주에 있는 항구 도시/일명 크림전쟁/1853년~1856년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와 터키(유럽 연합군)의 전쟁(1855년, 1만 명의 연합군과 1만3천 명의 러시아 병사가 전사했다)/전쟁터에 괴혈병, 티푸스, 콜레라가 만연하여 문자 그대로 지옥/이때 병자들을 간호하기 위해 영국의 나이팅게일이 전쟁터로 떠남
**러시아영화 <세바스토폴 상륙작전>
(123)청년 투르크 혁명:1908년에 지식층과 셀라니크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자유로운 제국 내에서 모든 민족의 연합을 건설하고 유럽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제국의 주권과 경제적 독립을 되찾고자 함/1914년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오스만 제국은 말라트, 엔베르 파샤, 제말이 이끄는 삼두정치로 운영되고 있었다.
(125)오스만 정부의 최후:파리에 모인 거대열강의 대표들은 오스만 정부에게 아르메니아와 그리스 사이에 낀 아나톨리아의 조그만 국가만을 남겨 주었다.(세브르 조약)
(127)무스타파 케말:열강의 일방적인 결정에 불복, 동조하는 세력을 조직, 아나톨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싸움을 지휘, 정부에 대해서도 반란을 일으키도록 전국민을 선동함/마침내 그리스를 바다 밖으로 내몰고 아나톨리아의 국경을 회복함(1923 로잔조약)/술탄제가 폐지되고 제국도 완전히 사라짐/잿더미 속에서 자유롭고 완전히 새로운 국가, 터키공화국 탄생(1923년 10월 29일)
기록과 증언
156)이슬람교:
*공동기도일--매주 금요일
*이슬람구역 공동체 수장--이맘
(기도를 인도하고, 코란의 구절에 대한 주석을 함)
*코란 독송자--하피즈
*선교자--카티브
*무에진--첨탑꼭대기에서 매일 여러 차례 기도 시간을 알리는 사람
(이들 종사자들은 전문적인 사제가 아니라 일상 직업을 갖고 있으며 종교적 기금에서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다./회교사원의 수도자는 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