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문학과 지성사/1982년5월 초판/2009년 12월 3판1쇄/280쪽/읽은 때 2022년4월20일~5월1일
(서두부터 술술 읽힌다. 그런데 연극을 지도하시는 담임선생님이 아이들한테 던지는 한 마디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
(13)"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어버리면 세상에 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남을 웃기거나 울리고 싶은 생각을 가졌다면 더군다나 그래. 자기자신은 결코 웃거나 울어버려서는 안된단 말이야. 그건 못난 짓이야. 꼴불견이지"
(약간의 무게가 느껴지면서 재밌게 읽힐 것 같은 예감!)
(51)습기찬 미명을 몰고 새벽이 한길의 그 끝쪽에서부터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52)빈 깡통과 세면기와 요강 속으로 뚝뚝 듣는 빗방울 소리가 녹슨 실로폰 음향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53)삼라만상을 후줄근히 적신 비는 마침내 우리들의 영혼까지도 흠뻑 적셔놓고 말아, 우리는 허기가 몰아오는 가벼운 현기증과 명징한 의식으로 땅 위에 가득히 차오르는 빗소리를 즐기는 것이었다.
(피난살이 하꼬방 정경을 이보다 더 상세히 묘사해 낼 수 있을까, 작가는 묘사의 달인인가 보다.)
(65)여름내내 악취를 풍기던 수챗구멍에서는 음색 고운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달빛을 맑게 걸러냈다. 거두어들일 것 없는 장난감 도시의 주민들에게는 마음이 물처럼 서러운 계절이었다.
(73)"어둡고 혼탁한 때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랄 것을 나는 믿는다. 너희들 중 한 사람을 잃느니 보다 매일처럼 매질을 하면서라도 지키고 싶다. 그러나 너희들은 훗날 이때를 회상하면서 우리 모두를 지킨 것은 오직 매였다고는 결코 말하지 마라. 너희들 중에 비록 단 한 사람일지라도 매를 맞지 않은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기 바란다--"
(90)가을날 햇살이 물처럼 말갛게 흘러내리는 공간 속을 무리지어 너울너울 날아다니고 있는 잠자리떼를 단 한 번이라도 눈여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몸짓들이 얼마나 섬세한 물결을 우리의 마음 속에 일렁이게 하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리라.
(글속의 '나'가 겪어내는 '장난감 도시 이야기'는 내 어린 날을 반추하게 한다. 중구 묵정동 적산가옥의 침대방에서 태어난 나는, 아버지가 제 2군인병으로 끌려나가고(?)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의 일가친척이 사는 수원으로 피난을 갔다.
어머니의 자존심 때문이었던가 친척들이 인심 사나워서였던가,우리는 국민학교 강당에 마련한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았다. 이웃에는 꼽추남편과 장님아내인 부부가 걸인 행각을 벌이고 사는 모습도 보았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강냉이를 팔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던 나는 어머니가 장사하는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번번히 꾸지람을 듣고 쫓겨나곤 했다. 오죽하면 나를 남의 집 수양딸(?)로 보낼 생각을 했을까? 너무 작고 말라서 쓸모없다고 판단한 주인 덕분에 반품(?)되긴 했지만--
꿀꿀이죽을 타기 위해 미군부대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이 글은 당시 피난지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 공감 만땅이다)
(129)코가 맹해졌지만, 그리고 횡경막이 부러질 듯 가슴에 결렸지만 그러나 나는 울 수가 없었다. 운다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몸 안에 꽉 차 있는 무언가를 뜨겁게 뱉어놓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실로 내가 뱉어놓을 아무것도 내 작은 몸뚱이 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137)우리는 囚人이었다. 양심을 팔아먹은 아버지와 자존심을 거덜낸 그 아들은 똑같은 수인이었다.
(138)거지행각:
밤에는 설사 대문을 열어둘지라도 식사시간만은 꼭꼭 문단속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바로 피폐한 1950년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양식이었다. 다들 거덜난 살림이었다. 도둑이 들어도 집어갈 것이 없으므로 문단속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밥상 앞에 앉아 한 숟갈의 적선을 거절할 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그 모질지 못한 마음에 빗장을 걸어 잠가야했던 사람들을 나는 원망하지 않았다.
(141)개한테 물린 후 개주인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음:
풀빵을 사먹고 지전 한 장을 치른 다음에 나는 더 많은 거스름돈을 받아들었다. 그것을 호주머니 깊숙이 간직했다. 길을 걸었다. 휘파람을 날리고 싶은 그런 기분으로 나는 대중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호주머니 속에 단단히 손을 찔러넣은 채 두 마리의 어미 참새와 여러 마리의 새끼들이 둥우리 속에서 즐겁게 재잘대는 소리를 나는 손끝으로 항시 들을 수 있었다.
(145)어머니가 장롱을 열었다. 그러고는 몇 점의 옷들을 골라냈다. 나는 그것들이 죄다 누나의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누나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내게 보이던 눈빛 한 점, 이따금씩의 미소 한 가닥, 그리고 여린 숨소리 한 음에 이르기까지 누나에 대해 내가 연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올의 틈새마다 촘촘히 박혀 있는 그런 옷들이었다.
(167)아이들의 밤사냥:
저녁마다 우리는 마을 옆 철길에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거지처럼 시시껄렁한 하루해가 공원의 붉은 구릉 너머로 떨어지고 나면 어둠이 장난감 같은 우리 판자촌을 뒤덮으며 서서히 차올랐다.
(그들은 밤거리를 걷는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폭력을 행사해서 제각기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273)작가 이동하는 자신의 소설관을 밝힌 산문에서 "나에게 있어 나의 소설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앞서, 그것은 눈물이다. 또, 추위다. 그리고, 외로운 나의 초상이다. 나에게 나의 소설은 무엇이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못질하기여야 한다. 보다 크고 완전한 것에다, 내 작고 불안한 존재를 단단히 못질하고자 하는 노력이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76)이동하의 자전적 소설인 '장난감 도시'는 난세의 어둠과 결핍과 불안을 뚫고 어떻게 한 작가가 탄생할 수 있었던가를 웅숭깊게 보여주는 작품이다.--우찬제
(280)'장난감 도시'는 첫 발표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이제 은연 중 나의 대표작으로 인식되고 있다.---글쓰기가 힘겨울 때 또는, 문득 길을 잃어버린 듯한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나는 이 소설을 새삼 뒤적거리곤 했던 것이다. 좀 민망스러운 고백이 되겠지만 매번 눈물과 더불어 더없는 마음의 정화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50년대의 피난민촌과 그 마을사람들인 작중 인물들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언어의 집 속에서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건재하여 더 많은 세상 사람들과 만나기를 나는 또 소망해 본다---이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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