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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맑은 바람 2022. 7. 16. 18:47

초판1쇄2015.1.30/초판4쇄 2016.2.15/글 노희경ㆍ그림 권우희/북로그컴퍼니/230쪽/읽은 때 2022.7.13~7.16
노희경:(1966~ )서울예대문창과
(그의 최신작 '우리들의 우울한 블루스'는 무척 재밌고 신선했다. 제주도 방언과 장애자를 등장시켜 감동의 폭을넓혔다.

그래서 노희경에게 꽂혔다.)
(13)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15)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히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48)나는 작가에겐 아픈 기억이 많을수록 좋단 생각이다. 아니,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게나 아픈 기억은 필요하다. 내가 아파야 남의 아픔을 알 수 있고, 패배해야 패배자의 마음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78)바그다드 카페
야스민은 누군가를 기분좋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을 전쟁같이' 사는 브렌다에겐 한없이 너그럽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즐겁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이 즐거운 모습을 보기 위해 마술을 익히고, 쇼를 하고, 모델이 된 야스민, 남을 웃기려다 끝내 자신마저 즐거워져 버린 야스민, 나는 그녀가 너무 예뻐서 그 밤 울어버렸다.
방영시간을 맞추기 위해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길 수십 수백 날.내 작품 때문에 지금까진 아무도 행복하지 않지만, 나는 야스민같은 노력을 멈추진 않겠다.야스민이 떠나고 그 잘 날던 부메랑도 추락하고 사람들 모두 다시 사는 게 시들해졌다. 과한 바람일까.내 드라마가 없는 날, 바그다드 카페의 사람들이 야스민을 기다리듯,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게 할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주제곡을 한 번만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바그다드 카페', 뭘 얘기하고 싶은 영화였지? 노희경을 통해 영화의 장면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한번 다시 봐야겠다.)
(80-81)오해를 주고 오해를 푸는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 갖는 오만 가지 생기와 신비로움!
말로 글을 쓰는 드라마 작가란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말은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오늘도 차기 작품을 준비하며 내가 고민하는 것은 말보다 마음이다. 그런데 참 묘한 건 내 맘이든 그의 맘이든 들여다보려 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이 제법 아름답단 거다. 그래서 나는 말을 탐색하고 마음을 탐색하는 드라마 작가로 사는 게 더없이, 많이 행복하다.
(86-87)노희경이 글쓰는 수칙 몇 가지
1.성실한 노동자가 되어라. 8시간 근무
2.인과응보를 믿어라. 쓰면 완성할 확률이 높아지고, 고민만 하면 머리만 아프다.
3.드라마는 인간이다. 인간에 대한 탐구가 드라마에 대한 탐구다.
4.디테일하게 보라. 섬세하게 세상을 보면 섬세한 드라마가 나온다.
5.아픈 기억이 많을수록 좋다. 작가는 상처 받지 않는다. 모두가 글감이다.(때론 내 글 때문에 이웃(가족)이 상처를 받지.)
6.생각이 늙는 걸 경계하라.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편견인 것을 직시하고, 늘 남의 말에 귀기울일 것.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하는 순간 늙고 있음을 알아챌 것
7.조율을 잊지 마라. 드라마는 더불어 함께하는 직업이다.조율하지 못할 거면 드라마 작가를 포기하라. 드라마 작가는 드라마의 여러 작업 파트 중 다만 글을 쓰는 사람일뿐. 우두머리가 아니다. 작가적 중심과 독선을 구분하는 게 관건이다.
(88)윤여정은 눈빛 하나로 삶을 보듬는 사람(2016년 글)
자타가 인정하는 독설가/
"드라마 참 못 썼다. 어쩜 그리 못 썼냐! 죽어라 못 쓰더만"
"선생님은 언제나 잘하냐,선생님도 못할 때 있다!"
다른사람 같으면 스무 살 터울이 지는 관계에서 이 정도 감정적인 말이 오가면 당연한 수순처럼 결별을 할 테지만, 서로를 잃을 미음이 전혀 없는 그녀와 나는 지금껏 가끔은 안부를 묻고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다.물론 여전히 입에 칼날을 물고 서로를 찌를 태세로, 그러나 서로가 뱉은 칼날에 누구도 다치진 않는다. 아니, 되레 칼날을 물고 말하길 즐겨 한다.마치 독설의 강도가 우리의 우정을 가늠하는 척도나 되는 양 말이다. 그녀의 독설에는 고단하고 심심한 세상을 무마하고 위안하는 힘이 있다.
(90)나는 배우 윤여정 선생님을 '무척' 사랑한다. 배우 윤여정의 어디가 그리 좋으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너무 많다.
(92)젊은 나이에 남자도 남편도 없는 혼자 몸으로 두 아이를 키워 내면서, 정말이지 예쁘지도 않은 얼굴과 좋지도 않은 목소리로, 거기다가 아첨할 줄도 모르는 성격으로 그녀가 오늘의 자리에 오기까지 그녀의 숭고한 노력과 극(그녀에게는 삶일것)에 대한 애정을 어찌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93)이즈음의 드라마는 모두 어린애들 사랑이야기 일색이다. 때문에 그녀처럼 눈빛 하나로, 대사 한마디로, 삶을 위안하고 농락했다가 다시 보듬는 연기를 하는 진짜 배우들의 진정한 연기를 볼 장이 없어지고 있다.
제발 윤여정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더 늙기 전에 진정한 인생을 논하는 드라마 세상이 왔으면 한다. 그녀가 젊은 주인공들의 사랑이나 반대하고 밥상이나 차리지 말고, 살아보니 저 자신이 사랑에 목매고 싶어지더라 하며 울며 부는 연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반드시 늙어가는 우리 모두의 인생을 그녀처럼 늙은 배우가 아니면 어찌 '반듯이' 표현해 낼 수 있겠는가. 간사한 시청자여,부디 늙은 배우를 홀대하지 말지어다. 그대들도 늙는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가 영화를 찍었다 한다. 이 기회에 그녀가 드라마를 등지고 영화로 가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된다. 부디 부탁하건대 영화제작자, 감독들이여, 그녀의 진가를 알지 마라. 그녀를 드라마 난장에 그대로 두어라.
이 글을 읽고 그녀가 어찌 말할지 짐작이 간다.
"아주 사람 밥줄을 끊으려 작정을 했구먼"
귀여운 노친네!
(96)참으로 뜨거운 말씀:
없는 살림에 남들한테 퍼주기 좋아하던 어머니 말씀--
"뭐든해서 한번 먹었음 됐지,뭘 두고두고 먹냐? 니가 한번 먹음 나머진 남들도 좀 줘야지!
**세상이 각박하다고 말하지 말고 내가 각박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노희경
(그녀는 가난과 아버지의 非行을 낱낱이 폭로한다.내가 유명하지 않기 망정이지, 노작가식으로 내 성장기와 젊은날을 드러내 놓았더면 내 육친들에게 곤욕을 치렀으리. 작가는 그렇게 속시원히 쏟아내고 역시 대작가답게 부모의 유산을 열거한다. 골자는 "자식에게 최고의 유산은 부모의 음지에서의 선행"이다. 두 분 다 그걸 실행하신 분들이었다.)
(132)배우 나문희에게 길을 물어가다(스물아홉에 쉰중반의 선생님이 들려준 말)
*너무 잘난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놀지 마라
*책 많이 읽어라
*버스나 전절 타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라
*재래시장에 많이 가 봐라, 그곳에서 야채 파는 아줌마들을, 할머니들 손을, 주름을 그게 예쁜 거야.
*골프 치지 마라
*대중목욕탕에 가 봐라.
*굳이 자주 보지 말자, 그냥 열심히 살자
*대본 제 때 주는 작가가 되라
(137)선생님 말씀대로 저는 깍쟁이고 제 표현대로 선생님도 깍쟁입니다. 극본에 촬영에 녹아나는 일정을 아니까, 전화 한 통화도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서로 심하게 깍쟁이처럼 배려하죠. 근데 묘합니다. 깍쟁이같은 우리 관계가 저는 갈수록 너무 좋습니다. 아껴 보는 관계, 그래서, 선생님이 텔레비젼에 나오면 제 극본이 아니어도 저는 신이 납니다.
(138)이즈음은 선생님의 전성기입니다. 사방팔방 온갖 작품에서 선생님만 찾습니다. 배우는 늙지 않는다. 다만 완숙해진다는 말을 만천하에 입증하시며 선생님은 뛰어다니십니다./누가 나문희를 한마디로 답하라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욕심많은 배우라 말할 겁니다.그리고, 또 누가 인간 나문희를 한마디로 답하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화면에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던 인간이라고요.
(140)한지민, 그대가 있어 살맛이 난다.
유년시절을 보낸 사실상의 고향 마포구 도화1동 산 2번지 근처 산촌동 너른 공터에는 개구리도,메뚜기도, 강아지풀도 있고 민물조개가 자라는 한강도 있어, 자연이 베푸는 혜택을 누렸고 가난 속에도 아이들을 귀찮아하지 않는 이웃의 배려로 텔레비젼 속 문화를 섭취했다. 구미호이야기, 원더우먼,육백만불의 사나이--
무엇보다도 감사한 건 가난을 피해 도망가지 않았던 이쁘디이쁜 엄마들이었다.
(142)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필리핀의 알라원 사람들을 몇박 며칠 동안 방문했다.그곳은 유년의 산촌동을 떠오르게 했다.동행했던 한지민의 선행은 작가의 마음을 울렸다
(143)해발 2천미터가 넘는 18킬로미터를 걸어야만 하는 죽어라 힘든 산행, 그것도 한뼘밖에 되지 않는 좁은 산길을 원주민처럼 날쌔게 가서, 국 하나에 김하나를 반찬삼아 날아가는 알랑미를 먹으며 맛있다고 소리칠 때도 이쁘더니, 난장같은 학교 마룻바닥에서 불편함을 말하기보단 달디달게 잠자는 것도 참 이쁘더니, 거머리에 물려서도 뭐가 재밌는지 툴툴대지 않고 깔깔만 대더니, 다녀와선 또다시 도네이션 북을 만드는 이쁜 일을 벌인다.
---지민이가 있어서, 나도 지금껏 제3세계 하루 1달러 미만의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좋은 친구는 좋은 스승 못지않다. 나의 어린 스승 한지민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146-147-148)노희경이 표민수에게
1996년 나문희 선생님의 소개로 우리 둘이 처음 만났던 그때, 내 나이 꼭 서른이었죠. 그러고 보니, 당신은 내게 서른에 보내진 선물인 셈이군요.
--그날, 술도 잘 못하는 우리들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려 여섯 시간 동안 말입니다. 그때 나눈 이야기들을 그대로 에이즈 환자의 사랑과 상처를 그린 '아직은 사랑할 시간' 이라는 단막극이 되었지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앉은자리에서 대본하나를 다 써낸 겁니다.
---생각해 보면, '참 잘 끼운 첫 단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날부터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까'보다 ''인간은 뭐고 사랑은 뭘까' 그런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눠온 것 말이예요.
---당신은 내게 '등대'같은 친구입니다. 내가 뭘 발견해 내고 그걸 본 내 눈이 옳았는지를 물으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 판결해 줌으로써, 내가 걷는 길을 환하게 밝혀줬잖아요.
기왕에 낯 간지러운 말을 시작한 김에, 당신을 참 아름다운 연출자로 생각한다 고백까지 해 둡니다.우리의 정신이나 육체를 대변하는게 연기자와 스태프라는 걸 너무 잘 아는 당신은 절대로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지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모두의 역할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늘 보기 좋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할 때의 기쁨만한 것이 세상 어디에 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154-155)'슬픈유혹'을 끝내놓고
2년 간의 기획, 두 달의 집필 기간, 일곱 번의 대본 수정, 50번이 넘는 퇴고, 나는 지금껏 이렇게 힘들게 대본 작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이 글을 쓰기 위해 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내 모자란 머리 탓이었을까. 아니면 닫힌 마음 때문이었을까./이 작품을 만드는 내내 감독과 나는 정말 진지했다. 우리는 대본을 쓰는 시간보다, 촬영을 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 작품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우리가 이 사회의 굳은 편견을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경건해하고 있나.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선 드라마가 세상을 조금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글을 쓰신다고 했다. 나 역시 그것이 드라마를쓰는 이유다.
(199-200) 임종순간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가족 모두를 '사랑한다'였고,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행복했다, 여한없다'였다.
'인생은 사랑하면 되고,행복하면, 더는 다른 목적 없이 끝나도 좋은 것.
(224)나는 우리나라 시청자들만큼 불쌍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없단 생각을 종종 갖는다.작가들과 방송국은그들을 멸시한다.그들은 시청자를 이렇게 평가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1,2학년 수준, 코미디를 좋아하며 같은 얘기를 또 들려주어도 모르는 멍텅구리.깊이는 절대로 강요하지말 것, 3분 정도는 웃겨주고, 3분 정도는 대충 감동 비슷한 걸 만들어 줄 것.꿈을 좇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신데렐라,캔디,콩쥐 캐릭터는필수."
나는 내 형제가, 내 친구가, 나 자신조차 이런 대접을 받는 걸 참을 수없다.
(225)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다.그렇다면 아직우리나라의 방송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없다.어제도 오늘도 나는 강요받았었다.남들처럼 재미있게.죄송하지만 사양한다. 나는 드라마의 다양함을 추구하는 작가이고 싶다. 그래서 획일화된 드라마의 구조를 조금만 흔들 수 있다면 내 도리는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원고에서도 나는 욕을 먹을 것이다.시청률 제로에 도전하는 작가? 밥줄이 끊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이 6년 전에 나왔건만 그새 천지가 개벽하고 노희경은 드라마의 구조를 흔드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지금은 명실공히 그녀를 제일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로 인정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