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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맑은 바람 2022. 7. 21. 20:19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다"
김여환 지음/포레스트북스/223쪽/초판1쇄 2021.12/읽은 때2022.7.19~7.21
김여환:(1957~  ) 호스피스 의사.경북의대 외래교수 역임/가정의학과 전문의/스포츠 지도자/국립암 호스피스 사연 공모전 우수상 수상(2011)

(18)환자들의 사연을 보고 들으며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의 인생이 돈과 사랑으로 촘촘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는 것, 삶의 끝자락에서는 이제껏 감춰온 진실이 낱낱이 까발려진다는 것이다.
환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꺼내보이는 진솔한 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깃거리로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뜻한 이야기는 따뜻한 대로, 안타까운 이야기는 안타까운 대로 소중하다. 그들이 꺼내놓은 이야기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삶의 지표를 선사한다. 죽음을 지켜보면서 삶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20)호스피스 의사로 있으면서 천 명이 넘는 환자들을 떠나보내며 나는 나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불행의 근원은 내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인생목표였던 경제적 풍요, 지적 우월, 공부 잘하는 자식, 자상한 남편과 부모는 내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데 급급했던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과 죽어감을 지켜보며,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고군분투하던 삶에서 벗어났다. 삶은 신생아실뿐만 아니라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22)호스피스 봉사는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자 자원봉사 중에서 가장 고생스러운 일이다.
(28)환자들의 마지막 얼굴은 편안하다 못해 환하기까지 하다. 그 얼굴들은 우리에게 죽음 자체는 힘들지 않으니 두려워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미향씨는 우리를 위로하는 그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것이다.
(31)통증없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49)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행복했는지가 아닐까?  모든 죽음은 슬프다. 비록 슬픔 속에서 떠나더라도 우리는 죽음 직전까지 행복해야 한다.
(55)생명이란, 별이 쇠약해질 때처럼 갑자기 빛을 잃는 일도 있고, 또 서서히 빛이 꺼져가는 일도 있다.
(56)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그렇게 행복하지 못할 것 같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의연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생명의 건전지가 다할 때까지 그저 '사는 것'이다.
해탈하는 것은 의연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태연히 누군가를 도와줌으로서, 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마지막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다운 죽음을 가능케하는 핵심이다.
(92)포천 모현 호스피스:
--그토록 평화로운 병원의 모습을 본 건 태어나서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신선하고 즐거운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훗날 나는 깨달았다. 좋은 호스피스의 필수 조건은 외양이 아니라는 것을. 그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사나 성직자가 아니라 호스피스 대상자인 환자라는 것을. 환자와 보호자가 원하는 일을 하고 지역사회와 잘 어울리는 호스피스가 참다운 호스피스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서였다.
(94)우리나라에서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5년 강릉시 홍제동 '갈바리 의원'이었다. 그리고 1987년 서울 답십리에 설립된 모현가정호스피스가 우리나라 최초의 호스피스다.
'어미 언덕'이란 뜻의 '母峴'은 갈바리 언덕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던 성모님의 마음을 한문으로 표현한 것으로, 수도회의 설립정신과 사도직에 대한 설명을 들은 어느 스님이 작명해 주신 것이라고 한다. 포천에 있는 지금의 모현의료센터가 설립된 것은 2005년의 일이다.

(모현 호스피스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2008년, 폐암으로 국립의료원에 한 달 가량 입원했던 엄마의 상태가 나빠지자, 연명치료여부를 묻는 의사에게 거부 의사를 밝혔더니 그럼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게 없다며 퇴원을 종용했다. 이때 모현 호스피스를 알게 되어 포천으로 모실까 하다가 집으로 모셨다. 매일 수녀님 한 분과 의사 한 분이 집으로 내방하시어 영양주사도 놔드리고, 수녀님은 자식들도 하기 어려운 일을 손수 나서서 하셨다. 곡기를 끊으시니 영양주사를 맞으셔도 점점 쇠진하시어 엄마는 일주일 만에 눈을 감으셨다. 그때 마침 수녀님과 의사선생님도 함께 계셔서 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모현 호스피스'의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그런데 너무 안타깝게도 2020년 가정방문 호스피스와 함께 호스피스 병원이 폐원되었다고 한다.)
(94-95)늦깎이 의사가 되어 궂이 호스피스 의사가 된 김여환의 사연:
전직 목사가 담낭암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암성 통증의 97%를 현대의학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주위의 반대와 만류를 무릅쓰고--나는 점점 호스피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라고느꼈다.
(97-98)카리타스 수녀님은 직접 내린 향기좋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스피스는 하느님이 뿌려놓은 마약이야.하다보면 멈출 수가 없거든.김여환선생님도, 나도 벌써 중독된 거야.
--호스피스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묵어가는 여관이다.--모현 호스피스의 '죽이는 수녀들'과 대구의료원의 '죽이는 의사'인 나의 공통점은 죽음을 밝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죽음을 없애지 못할 바에는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게 좋지 않을까--이길 수 없는 죽음과의 싸움을 멈추면 비로소 죽음도 보이고 삶도 보인다.
(114)행복하게 죽는 방법은 없어도 서로의 도움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많다.죽음은 긴 인류 역사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주제지만 이곳에서 환자와 의료진은 '죽음'을 통해 하나가 된다.--죽음은 혼자 가는 길이지만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이 낯설고 외로운 길 어딘가에서 내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함께하면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다.
(119)호스피스가 하는 일도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다.사는 것이 서툴러 노숙자가 된 사람, 돌봐줄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 너무 일찍 찾아온 병마 때문에 생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사람--그가 누구든 어떤 삶을 살았든, 인생의 마지막은 석양처럼 눈부셔야 한다.우리가 서로의 어둠에 물감이 될 때 인생의 마지막은 황금빛 석양처럼 빛난다. 그때 컬러플 호스피스가 완성될 것이다.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
(156)플라톤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와인이라고 했다.하지만 나는 호스피스 의사가 된 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은 모르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03년 독일의 세터너가 꿈의 신인 '몰페우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약을 사람들은 마약이라고만 알고 있고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핀에 대해 알아야 한다.그래야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끔직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 준다.
(157-160)장기를 파먹는 핏덩어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통증의 정도에 맞게 적당양의 모르핀을 사용하면 아기를 낳는 산통보다 더한 암성통증에서 15분 안에 자유로워진다. 호스피스 의사인 내게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한 모르핀은, 그러나 다이아온드처럼 비싸지도 않다. 한 앰플에 200원도 하지 않는 저렴한 약이다. 물론 모르핀은 알려진 대로 마약이고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뿐이다.--모르핀은 해독제까지 있기 때문에 용법만 잘 지키면 어떤 약보다 안전하다.
암성통증과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잘못된 상식 때문에 의미없는 통증을 껴안고 지내는 환자들이 가진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마약성 진통제를 자꾸 쓰면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린 말이지만 많은사람이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은 모르핀이라는 선물에 희망을 잔뜩 넣어주었다. 대부분의 약은 쓸수록 부작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용량을 제한하는데 모르핀은 아무리 써도 통증에 대한 약효가 줄지 않는다.전문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르핀은 통증에 대한 내성이 없다'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환자와 보호자들만이 아니다. 의료진도 마찬가지다.
--나는 호스피스 의사로서 당부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 모르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나는 신이 우리가 아프지 않게 죽어가기를, 그리하여 죽음의 맨얼굴을 응시하기를 바랐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죽음의 맨얼굴은 평화롭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고통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
(나는 말기암을 앓다가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기억한다.캐나다 딸네 집에 살러 가셨던 시어머니는 위암말기로 큰딸의 부축을 받으며 큰아들집에 오셨다. 임종이 가까위질수록 통증이 점점 잦아지고 그때마다 딸은 캐나다에서 가져온 모르핀액을 입안에 떨어트려 주었다. 동증없이(?)하루하루 견디면서 어머니는 꿈에 하느님도 보았다.아들메느리 손을 잡고 하느님 잘 믿고 천국에서 꼭 만나자고도 하셨다)
(172-173)말기암 환자를 웃게 하려면 호스피스 의료진은 무얼 해야 할까? 먼저 암성통증을 없애야 한다. 말기암 환자가 아니더라도 아프면 웃을 수 없다. 통증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모두 없애버리고 단지고통에만 집중하게 한다. 암성통증이 사라지면 나는 환자를 울린다.살아오는 동안 억울했던 것과 힘들었던 것에 대해, 두렵고 외로운 죽음에 관해 말하게 한다.위로하고 위로받고 울음을 터뜨린다. 참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은 그 다음이다.진짜 웃음은 '울어버린 사람', 울어서 감정의 찌꺼기를 '버린'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병동의 벽면을 장식한 행복한 사진 속 환자들의 웃음 뒤에는 웃음보다 더 많은 눈물이 담겨 있다. 통증을 조절하고 눈물을 쏟아버렸다면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어루만짐이다. 외로움과 절망감은 마음의 암세포지만 단 한 번의 어루만짐으로 완치가 가능한 병이기도 하다.
(174)신체 접촉의 중요성:
신체 접촉은 마음에 접촉하는 것이기도 해서, 몸을 만짐으로써 마음까지 만져줄 수 있다.피부와 피부가 맞닿는다는 것은 영양을 섭취하거나 진통제를 주사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심오하다.
--삶은 힘들고 암과 함께 가는 삶은 더 힘들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마디, 따뜻한 스킨십은 환자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준다.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외로움을 먼저 치유해야 할 것이다.호스피스 활동은 우리가 자신의 외로움을 견디고 타인의 외로움을 껴안는 방법이다. 우리가 내적 자아를 만날 때, 그리하여 스스로를 더 사랑할 때,우리는 우리의 외로움과 타인의 외로움까지 보듬어 안게 된다.
(187)어쩌면 없을지 모르는 내일--
이제 나는 집안을 덜 쓸고 덜 닦고 대신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영화를 보러 나간다.--가족과 함께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일을 줄인다.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을 포기하면 뜨거운 오늘이 있다.--오늘을 즐기는 사람이라야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즐길 수 있다.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
(196)임종의 단계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므로 보호자분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임종의 단계에서 임종까지의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초초해하지 마시고 그 순간을 기다려주십시오. 산소 포화도나 혈압 등의 모니터를 보는 것보다 환자의 손을 잡아드리고,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얼굴을 보시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리고 환자의 기능 중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입니다. 이제 곧 떠나시는 분 앞에서 좋은 말씀만 남기셨으면 합니다.--'임종실 생활안내문' 중에서
(208)9988234만이 좋은 죽음인가?
최선을 다해, 남에게 기쁨을 주며 살았던 사람은 갑작스런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좋은 죽음은 좋은 삶에서 비롯된다.
(216)사람마다 태어남은 모두 다르다. 순조롭게 자연분만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제왕절개술로 세상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죽어감도 마찬가지다.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 알 수 없지만 나의 환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을 잘 정리했다.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쌓는 웰다잉은 남는 사람들의 역할이 더 큰 것 같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잘 쌓으면 그 인생은 좋은 것이 된다. 호스피스는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상자다.진정한 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마지막 상자를 준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상자를 쌓아주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에 읽은 '死後生', '나는 천국을 보았다', '인간은 분명 환생한다' 그리고 이 책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본 정현채 교수의 죽음학 강의---이런 부류의 책들과 이렇게 급속도로 가까워질 줄은 나도 몰랐다. 다만 사경을 헤매는 친구의 손을 잡아줄 수 없음에 이런 책들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중환자실로 실려가더니 한 달여 후 임종이 며칠 안 남은 것처럼 가족이 소식을 전했다.그러더니 얼마 후 일반 병실로 옮겼다가 다시 요양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면회날짜를 조정하는 중에 코로나가 확산되어 면회가 취소되고  이번엔 환자를 집으로 데려가야 할지 어떨지를 고민하고 있단다.
참으로 앞이 안 보이고 답이 안 나오는 지점에 그녀가 있다.
'나 건강해지면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거야' 절규하듯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데 지금 그녀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