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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베르쿠테<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맑은 바람 2022. 12. 15. 22:32

장 베르쿠테 지음/옮긴이 송숙자/시공디스커버리 총서 002/시공사/1995년 2월 초판 1쇄/2010년11월30일 초판 35쇄/215쪽/읽은때 2022.12.8~12.15

장 베르쿠테:프랑스인/ 이집트 유적 관리소 책임자/유실 위험에 처한 유적지 300여 곳을 국제적인 협력으로 지켜냈다./카이로대학 교수.파피루스 고문서 연구소와 대학부설 연구소 소장 역임/1984년 프랑스 한림원과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됨

(시공사 책은 무척 호감이 간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에, 부피도 손가방에 넣기 딱 좋고(그래서 여행가방에 잘 넣고 다닌다)화보도 많고 선명하여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다만 글씨가 작은 게 흠이긴 하지만 아직은 읽을 만하니 그 또한 다행이다. 그동안 이집트 관련 서적을 모두 5권 읽었다. 이 책은 여행가방에 넣어갈 예정이었으나 구미가 당겨, 건강관련 서적을 잠시 덮어두고 읽기 시작했다.)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제1장 사라진 이집트, 파라오 시대
제2장 고대의 여행자
(20)페르시아 침공:페르시아 왕 캄비세스 때/BC 6세기/신왕국 후반기/
*헤로도토스는 BC 450년 무렵 이집트에 도착했다.

제3장 나일강을 따라 몰려오는 십자군, 수도사, 관광객
(30)17세기에 이르러서야 이집트에 대한 진지한 탐사가 시작되었다.그리고 1798년 나폴레옹의 탐사대가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야 이집트 문명이 재발견되었다고 할 수있다.
(33)반출(약탈)의 대선배:
프랑스 총영사 브노이 드 마예/많은 이집트 고대 유물을 루이 14세에게 보냈다./저서 '고대와 현대 이집트의 지리,유적,풍습.관습,종교,통치기구와 경제조직,동물,나무,농산물에 관한 진기한 관찰을 포함한 이집트에 대한 기록'이 있다/이집트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이 기록된 최초의 작품
(34)카이로 예수회 선교단 단장이었던 클로드 시카르 신부는 이집트전역을 여행하면서 최초로 이집트지도를 완성했다./시카르는 1726년 '고대이집트와 현대이집트의 지리학적 비교'라는 책을 낸 후 얼마되지 않아 페스트로 사망했다/마예와 시카르가 제공한 정확한 정보 덕분에 사람들은 편안하게 이집트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36)나폴레옹을 수행했던 사바리와 볼네이
1798년 이집트 탐험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사바리의 '이집트에 관한 서한'의 매력적인 문장에 매혹되었다./1787년 발간된 볼네이의 '시리아와 이집트 여행'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면서 가지고 간 유일한 책이었다./1820년 파리에서 사망
(39)도미니크 비방 드농 남작:
기이하고 매력적인 인물/루이15세 때 시종관/루이16세 때 세인트 페테르부르그와 나폴리 프랑스 대사관에서 서기관을 지냄/50세에 이집트 탐험대 참가/귀국하여 루브르 박물관의 전신인 나폴레옹 박물관 건립/'고대로부터 19세기초까지의 미술의 역사'저술, 이집트학 탄생에 크게 기여/뛰어난 화가이기도 한 드농의 '이집트 나일강 상류와 하류 여행기'는 40판까지 발행되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둠/78세에 세상을 떠남
(41)기제의 피라미드에 사용한 돌들:
260만 개, 무게가 700만 톤, 적재량1000톤,기차로 7000대 분, 10톤짜리 화물 트럭으로는 70만 대분

제4장 탐험가와 도굴꾼
(59)아랍어로 쓰인 도굴 안내서 <감춰진 진주와 고귀한 신비에 관한 책, 발견된 보물과 숨겨진 보물의 위치에 대한 안내서>에 대해 카이로 박물관의 이집트인 관리인은 이렇게 단언했다.
"이 책은 전쟁이나 세월의 흐름보다 더 강력히 고대의 유물을 파괴해 버렸다"
(60)모하메드 알리:
1769년 마케도니아에서 출생/오스만 투르크 황제가 임명한 이집트 총독/독자적으로 이집트 통치, 이집트 현대화에 힘씀/그 과정에서 이집트 유물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데 힘을 보탬/외국 영사들이 앞장서서 도굴에 가담, 유적을 대량으로 빼돌림
(62)드로베티
이집트에 원정 간 프랑스군 대령/두 차례 총영사직에 머물면서 이집트 총독의 비호 아래 고대 유물 거래 사업에 뛰어듦/토리노, 파리, 런던, 베를린 박물관의 이집트 유물 상당수가 드로베티의 수집품/사르데냐의 왕은 드로베티의 수집품을사들여 토리노 박물관을 유럽에서 가장 수준 높은 이집트 유물관으로 만들었다./람세스 2세의 거대한 화강암 좌상도 있다.(1818년 리포가 발굴)/
(63)조각가 장자크 리포
드로베티의 하수인/40년간 이집트에 머물면서 4000여 장의 이집트 그림을 그림/
(65)헨리 솔트, 또 하나의 점잖은 도둑
이집트 주재 영국 총영사/대영박물관에 유물을 팔았다/솔트의 수집품 4014점이 루불박물관에 소장되었다/그중 람세스 3세의 석관,거대한 화강암 스핑크스 2개, 필레 신전의 화강암 성궤 등은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
(69)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벨조니:
솔트의 하수인/1778년 파두아(이탈리아)에서 출생/16세에 곡예사가 되어 영국에 머묾/훌륭한 화가이기도 함/2m가 넘는 長身/'이집트와 누비아 여행'을 씀

제5장 학자의 시대
(90)샹폴리옹(1790~ )
피젝에서 출생/13세에 라틴어, 그리스어,히브리어,아랍어,시리아어,아람어,칼데아어를 공부했다./주변의 이집트 대한 관심의 영향으로,상폴리옹은 상형문자 해독의 야심을 키움/후에 파리에서 페르시아어, 콥트어를 배움/박사학위를 받은 후 19세에 고대 역사학과 조교수가 되었다./첫번째 저서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의 지리, 종교,언어,문헌과 역사에 관한 연구' 집필

(1814)/위대한 저술 '이집트와 누비아의 유적'출간(1845)

로제타스톤을 연구하여 상형문자의 비밀을 밝혀낸 프랑스의 샹폴리옹

(95)렙시우스와 윌킨슨: 이집트 학을 탄생시킨 사람들
*카를 렙시우스
독일 작센 출신/상폴리옹의 유고를 통해 상형문자 해독 방법 터득/
프러시아왕이 파견한 이집트 발굴단 지휘(1842~1845)/귀환 후 베를린대학 교수/'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유적' 12권 발간/상폴리옹의 '이집트와 누비아의 유적'과 함께 이집트학 전공자의 필독서
*윌킨슨
영국에서 이집트학 창시자로 알려짐/(1821~1833)이집트 테베에서 유적 발굴/'고대 이집트인의 예절과 풍속' 저술

끌려가는 아프리카 포로들
세티1세와 그의 길들여진 표범

(97)프리스 다벤(1807~? )
영국?/1829년 모하메드 알리의 토목 및 수로 측량 기사/이집트 참모학교 지형학 교수/다미에타 보병학교에서 요새학 강의/1838년 룩소르 정착/'고대에서 로마 점령 시기까지 유적들을 통해 본 이집트 미술사' 발간

제6장 이집트를 구하려는 고고학자
(101)마리에트( ~1881)
프랑스인/이집트 유적발굴 본부 창설/그동안의 조직적 약탈이 막을 내림/카이로 박물관의 설립자/볼로뉴 대학교수/"이집트의 오리는 매우 위험합니다.오리 부리에 물리면 평생을 이집트 연구에 바칠 수밖에 없는 열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이집트 연구를 위해 교수직을 버리고 친구들의 주선으로 루블 박물관에 취직한다./"당시 저는 곧바로 이집트로 갈 기회를 잡지 못하면 죽거나 미쳐 버릴 것 같았습니다"/세라페움 발견**세라피움:이집트 인들이 신으로 모셨던 황소 세라피스를 모신 신전/ 그는 이제 넓은 대지에서 유적을 찾아다니는 즐거움과 발견 후에 느끼는 황홀함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마리에트는 멤피스의 세라페움과 아피스 황소의 지하 묘지로 통하는 대로에서 발굴한 6000여 점의 유물을 44개의 상자에담아서 루브르 박물관으로 보냈다고 한다. 가져갈 만큼 가져갔으니 이제 모두들 손 떼라 한 건가?)
(109)가스통 마스페로
마리에트의 뒤를 이어 불라크 박물관 관장이 됨/기제의 피라미드, 룩소르 신전 발굴에 참여

제7장 이집트 재발견
(116)투탕카멘, 베일을 벗다
하워드 카터(~1939)
영국의 화가/1892년 '이집트탐험기금'의 위촉을 받고 이집트에 옴/데이르엘바하리에 있는 멘투호테프 신전의 부조와 비문 복제/1899년 고대유물 관리감독관에 임명됨/전헝적인 영국 귀족 캐너번 경을 소개받아 함께 일함/1922년 11월 4일, 투탕카엔의 묘를 발견함
(126)피에르 몽테
프랑스 고고학자/델타지역 타니스에서 주거지역을 발굴하다 우물 입구를 발견/파라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대단한 조상을 가졌으나 그들이 물려준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후손들은 이 나라 저 나라(열강들)에 알짜배기는 다 노략질 당하고 이를 보다 못한 뜻있는 사람들(?)의 발의에 의해 반출이 금지되고, 이집트박물관도 세웠다.자기 것을 지킬 능력이 없는 자는 이토록 유린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이집트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기록과 증언**
(132)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이라는 도박에 어떤 위험이 뒤따를 것인가 신중히 생각했다. '푸셰 회고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당시 이집트 원정에는 모종의 함정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제 5 집정관 정부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장군이 멀리 떠난다는 사실에 만족했던 것이 분명했다.어쨌든 서둘러 모든 준비를 마친 나폴레옹은 1798년 5월 4일 파리를 출발하여 툴롱으로 떠났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원정대가 승선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승선자 중에는 수학자 20명, 천문학자 3명, 토목기사 17명, 자연과학자와 광산기사 13명, 건축가 4명, 화가 8명,인문학자 10명, 라틴어, 그리스어, 아랍어 활자를 챙겨온 인쇄기술자 22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이들 중에는 대단히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도 있었다.기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몽주, 화학자 베르톨레, 과학자 조프루아 생틸레르, 고고학자 조마르, 동방학자 비방 드농, 크레용 그림으로 유명한 콩테, 시인 파르스발 그랑메종, 화가 한 사람, 피아니스트 한 사람 등/이집트로 향하던 나폴레옹은 말타섬을 점령하여 중간 기착지로 삼고 이곳에서 병사들에게 원정 목적지를 공식 발표했다.
(나폴레옹의 활동 중 가장 멋진 일이 이집트 원정 아닐까. 각 분야의 인재들을 동반한 채, 지중해의 넬슨 제독을 따돌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공격을 감행, 두 달만에 이집트 총독과 그의 군대를 항복시킨 일--이보다 멋진 드라마가 어딨을까?)
(문득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 관련 영화가 있나 넷플릭스를 검색해 보다가 브런치작가를 만나 '이집트 원정'에 관한 재밌는 글을 읽었다.내가 두 번이나 낙방한 '브런치 작가'--뭐가 달라도 달러~)
(150)수에즈 운하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직행 항로/1869년에 이르러서야, 이집트 파라오의 꿈을 실현시킨 프랑스의 페르디낭 드 레셉스/개통식은 동서양의 화려한 종교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참석국들은 인류의 축제에 참가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지만 그중에서도 레셉스의 조국 프랑스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타임즈는 4억여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운하 공사에 도움되었지만 그들도 옛 제국이 비록 모래에 덮이게 되었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행한 일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운하개통의 위대함을 인정했다.
(152)이집트에 관한 책
**볼네이가 쓴 '시리아와 이집트 여행' 은 학술적인 면을 제외한 모든면에서 진정한 걸작이다.
**최초의 사진집
1852년 막심 뒤 캉이 찍은 이집트의 유적과 경치
**플로베르 동방 여행 (막심 뒤 캉이 곁에서 지켜본 플로베르)
강물이 뱃전에 찰랑거리고 별 사이로 남십자성이 반짝이는 저녁이면 우리는 종종 조각배 위에 앉아서 그가 진정으로 아끼는 책이나 그가몰두하고 있는 새로운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그는 '살람보'에 이 여행의 인상을 정확하게 살려냈다. 플로베르는 이처럼 늘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았으나 모든 것을 심상 속에 담곤 했다.
**미국인 마크 트웨인의 '순진한 사람들의 여행' 중에서 피라미드 등정기:
1867년 6월 8일,관광 사상 최초로 구성된 대규모 단체여행단의 일원으로 '퀘이커 시티'라는 배로 이집트를 방문했다./퀘이커 시티를 타고온 관광객은 마치 줄지어 기어가는 벌레처럼 현기증 날 만큼 아슬아슬하게 경사진 면을 따라 피라미드를 올랐다.정상에서는 자그맣고 까만 점처럼 보이는 한 무리의 관광객이 우표처럼 보이는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다른 관광객이 그러는 것처럼 정상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건장한 이집트인과 아랍인에게 둘러싸여 옥신각신 흥정을 벌였다.---아랍인 한 사람이 우리의 팔을 잡아당겨 한 계단한 계단씩 끌어올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재빨리 가슴까지 발을 올리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다. 피라미드의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기도 한 격렬한 오락이었다. 나는 짐승같은 사나이들에게 관절이 어긋날 것 같다며 사정했다. 나는 잠시동안만이라도 아니 한 순간만이라도 쉬게 해 달라고 그들에게 호소하고 또 애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막지하게 내 팔을 잡아끌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그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이 회교도들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언젠가는분명 지옥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이 생각이 나를 위로해 주었고 그 때문에 마음이 유쾌해졌다. 기어코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자 나는 몸이 후들거리고 탈진 상태가 되어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행복감이 마구 밀려왔다. '아아!' 마음 깊은 곳에서 만족감과 평온함이 느껴졌다.
(상상하면 웃음이 나는 재미난 광경이다)

1900년경 사진, 피라미드 오르기, 계단높이가 65~90cm라서 혼자 서는 난감!

(196-199)대피라미드에는 아직도 더 발굴할 유물이 남아 있는가?
(건축가 질 도르미옹과 장 파트리스 구아뎅의 가설)
그렇다는 결론과 함께 그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1986년 8월,조사를 계속했다.
1987년 2월, 사쿠지 요시무라 교수가 이끄는 일본탐사단이 굴을 다시 탐사함/그들은 정밀 중력측정법을 이용하여 대피라미드 암벽의 밀도차를 탐지했는데 이 방법은 다른 여러 곳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다./소득 無

(207)고대 유물과 유적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갔던 고고학자들이 프랑스로 들여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하게 된 유물은 수없이 많다. 관람객은 아무런 지식 없이 루브르박물관을 찾아오더라도 차근차근 유물을 바라보면서 파라오가 통치했던 고대 이집트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찬란한 문명의 모든 것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장 베르쿠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