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학교에서 시 읽기 1
류시화 /더숲/245쪽/1판1쇄2018.1/1판9쇄 2018.10/읽은 때 2023.2.2~2.4
대단한 책 한 권이 나왔다.
자그마치 56편이나 되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시들을 모아 그 저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띄워
허락을 받아내고 또 번역작업을 해서 책을 엮었으니, 역시 시인 류시화다!
그런 시인들만 골랐을 리 없겠지만, 대부분의 시들이 작가의 피눈물과 절절한 고독으로 짜여진 시들이다.
그러니 읽는이의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마음에 와 닿은 시 16편을 발췌해 보았다.)
(24)그렇게 못할 수도 --제인 케니언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없이 잘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어느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저자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기1년 전 쓴 시/"아내의 죽음은 내게 일어난 최악의 일이었고, 아내를 보살핀 것은 내가 한 최고의 일이었다"--남편 도널드 홀)
(27)"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지금 그들을 보러 가라"--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34)시는 소리내어 읽어야 좋다. 그때 시의 의미만이 아니라 시가 가진 울림과 언어의 향기가 전해진다. 시는 메시지 전달이 전부가 아니다. 시를 감상하는 좋은 방법은 그 시를 숨쉬는 일이다.
(40)그 겨울의 일요일들--로버트 헤이든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검푸른 추위 속에서 옷을 입고
한 주 내내 모진 추위 속에서 일하느라 쑤시고
갈라진 손으로 불을 피웠다.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데도
잠이 깬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따뜻해지면 아버지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 집에 잠복한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일어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냉담한 말을 던지곤 했다.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내가 무엇을 알았던가
사랑의 엄숙하고 외로운 직무에 대해
(왜 모든 아버지는 자식의 참회가 시작될 즈음에는 세상에 안 계시거나 너무 늙어 있을까?/로버트 헤이든은 갓난아기 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이웃가정에 맡겨졌다. 양아버지는 엄격한 침례교인으로 막노동자였으나 양아들을 잘 키웠다. 지독한 근시 때문에 헤이든은 아이들과 놀지 못하는 대신 독서에 파묻혔고, 이때부터 문학적 재능이 싹텄다.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닌 후 모교에서 시를 강의했으며 다양한 시적 기교와 보편적인 호소력을 인정받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계관 시인에 선정되었다.
**계관시인:현재 영국에서 뛰어난시인에게 주는 칭호./연금형식의 돈을 받는다
(48)원 *原題 한 수 위Outwitted--에드윈 마크햄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지금 우리는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서 자신의 주장과 다르거나 자기 편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동그라미 밖으로 밀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제로는 다같이 연결된 '우리'인데도.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다. 계속 밀어내면 원은 점점 작아진다.더 많이 초대하고 끌어들일수록 원은 넓어진다.)
(52)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마샤 메데이로스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결코 일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옷색깔을 바꾸지 않는 사람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열정을 피하는 사람
흑백의 구분을 좋아하는 사람
눈을 반짝이게 하고
하품을 미소로 바꾸고
실수와 슬픔 앞에서도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보다
분명히 구분하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일과 사랑에 행복하지 않을 때
상황을 역전시키지 않는 사람
꿀을 따르기 위해 확실성을 불확실성과 바꾸지 않는 사람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합리적인 조언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지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그곳을 에고로 채운 사람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나쁜 운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아는 것에 대해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
우리, 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기억하면서.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만 자유롭다. 그 자유에 도달하는 길이 있다. 뛰어드는 것이다."--D.H. 로렌스의 말
(68)한 가지 기술--엘리자베스 비숍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많은 것들이 본래부터 상실될 의도로 채워진 듯하니
그것들을 잃는다고 재앙은 아니다
날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라. 문열쇠를 잃은 후의 당혹감,
무의미하게 허비한 시간들을 받아들이라.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더 많이, 더 빨리 잃는 연습을 하라.
장소들, 이름들, 여행하려 했던 곳들을
그것들을 잃는다고 재앙이 오지는 않는다
나는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렸다.그리고 보라! 내가 좋아했던
세 집 중 마지막 집, 아니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집도 잃었다.
상실의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지 않다.
두 도시도 잃었다, 멋진 도시들을. 그리고 내가 소유했던
더 광대한 영토. 두 강과 하나의 대륙을 잃었다.
그것들이 그립긴 하지만 그렇다고 재앙은 아니었다.
당신을 잃는 것조차(그 농담섞인 목소리와 내가 좋아하는 몸짓을), 나는 솔직히 말해야 하리라,
분명 상실의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그것이 당장은 재앙처럼('그렇게'쓰라!)보일지라도.
(상실의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모든 기술에 능통하다 해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는 잃어버려질 운명이기 때문이다. 상실이 슬픔인 것은 그 이전의 시간들이 기쁨이었기 때문이리라.
시인이며 소설가인 비숍(1911~1979)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었다.성공한 건축가였던 아버지는 그녀가 한 살도 되기 전에 죽고, 병약한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다섯 살의 비숍을 남겨둔 채 정신병원에 영구 격리되었다. 대학시절 만난 연인은 비숍이 청혼을 거절하자 자살했다. 이후 천식과 알코올 중독, 우울증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동성연인인 탐미주의자 건축가 로타 수와레스와 함께한 15년 동안이 생에 최초로 안정감과 행복을 느낀 때였으나 연인의 갑작스런 자살 후 보스턴으로 이주한 비숍은 하버드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고통받다가 생을 마쳤다.
상실은 가장 큰 인생 수업이다.)
(90)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종일 일한 후--찰스 레즈니코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나는 지쳤다
이제 나의 일을 해야 할 날이
하루 더 사라졌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의 힘이 되돌아왔다.
그래, 밀물은 하루에 두 번 차오르지
(미국의 유대인 이민자.뉴욕법정변호사로 근무했으나 글 쓸 시간이 없다고 사퇴, 가업인 모자가게를 운영하다 대공황 때 문을 닫음/25달러를 벌기 위해 매일 시간제로 일하면서 60세가 될 때까지 무명시인의 자리를 지켰다./60세 후반이 되어서야, 그리고 死後에 세상이 그를 알아봄)
(94)어딘가에서 누군가가 (原題 북쪽농장에서)--존 애쉬베리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너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낮과 밤을 여행해
눈보라와 사막의 열기를 뚫고
급류를 건너고
좁은 길들을 지나.
하지만 그는 알까,
어디서 너를 찾을지.
그가 너를 알아볼까.
나를 보았을 때.
너에게 건네줄까,
너를 위해 그가 갖고 있는 것을
(나는 이 시를 당신에게 읽어주고 싶다.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딘가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당신에게)
(96)사막--오르텅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파리 지하철 공사가 매년 공모하는 시콩쿠르에서 8천 편의 응모작 중 1등으로 당선된 작품/'사막'은 몇 해 전 정신병원에서 쓴 시라 했다. 첫사랑과 헤어진 충격으로 정신발작을 일으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너무도'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될 만큼 고독의 밑바닥까지 간 사람, 거기서 시라는 밧줄을 붙잡고 간신히 일어선 사람이 쓴 시가 '사막'이다.)
(104)사랑 이후의 사랑--데렉 월컷
그때가 올 것이다
너의 집 문 앞에
너의 거울 속에 도착한 너 자신을
기쁨으로 맞이할 때가.
미소 지으며 서로를 맞이하게 될 때가
그에게 말하라, 이곳에 앉으라고.
그리고 먹을 것을 차려 주라
한때 너 자신이던 그 낯선 이를 너는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포도주를 주고
빵을 주라
너의 가슴을 그에게 돌려주라
일생 동안 너를 사랑한 그 낯선이에게
다른 누군가를 찾느라
네가 외면했던 너 자신에게
온 마음으로 너를 아는 그에게
책꽂이에 있는 사랑의 편지들을 치우라
사진과 절망적인 글들도
거울에 보이는 너의 이미지를 벗겨내라
앉으라
그리고 너의 삶을 살라.
(사랑이 끝난 후에 자신을 버려둬선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자신을 일으켜 세울 사람은 자기자신뿐이라고/이제 당신이 최고의 접대를 하고 만찬을 함께 즐겨야 할 사람은 타인이 아닌 당신 자신이다./데렉 월컷(1930~2017)은 서인도제도의 세인트루시아에서 출생/세 번의 이혼으로 쓰라린 체험을 함/장편시집 '오메로스'로 1922년 노벨문학상 수상)
(120)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팻 슈나이더(여, 1934~ )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
의자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
바닥이 신발 바닥을
혹은 발가락들을 받아들이는 일
발바닥이 자신이 어디 있어야 히는지 아는 일
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에 대해 생각한다.
옷들이 공손하게 옷장 안에서 기다리는 일
비누가 접시 위에서 조용히 말라가는 일
수건이 등의 피부에서 물기를 빨아들이는 일
계단의 사랑스러운 반복
그리고 창문보다 너그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평범한 것들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지지해 주는 것들과./어느날 모든 사물들이 인내심을 잃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의자가 엎어지고 거울이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을 거부한다면, 안경이 제멋대로 상을 왜곡시키고 찻주전자가 자기 학대로 주둥이를 막아 버린다면, 우리 삶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팻 슈나이더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 경험이 그녀를 가난한 이들을 이웃삼아 문학활동을 이어가게 했다./평범한 것들에 대한 특별한 느낌, 일상성의 회복, 그리고 내 옆에 늘 있어준 것들에 대한 감사.이것이 이 시의 주제이고 우리삶의 주제이다.)
(132) 생에 감사해--메르세데스 소사(1935~2009)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눈을 뜨면 흰 것과 검은 것
높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그리고 군중 속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알아보는
샛별같은 눈을 주어서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귀뚜라미 소리, 새소리
망치 소리, 기계 소리, 개짖는 소리, 소나기 소리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밤낮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어서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소리와 글자를 주어
그것들로 단어들을 생각하고 말할수 있게 해 주어서.
'엄마' '친구' '형제자매'
그리고 사랑하는 영혼의 길을 비추는
'빛'같은 말들을.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지친 다리로도
도시와 물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들판을
그리고 당신의 집,당신의 길, 당신의 정원을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어서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인간의 정신이 맺은 열매를 볼 때 악에서 멀리있는 선을 볼 때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의 깊이를 볼 때
내 고정된 틀을 흔드는 심장을 주어서.
생에 감사해, 내게 많은 걸 주어서.
웃음과 눈물을 주어서.
그것들로 행복과 고통을 구별할 수있게 해 주어서.
그 웃음과 눈물로 내 노래가 만들어졌지.
당신의 노래도 마찬가지
우리들 모두의 노래가 그러하듯이
나의 이 노래도 마찬가지
생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어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칠레가수로서 그래미상과 라틴 그래미 최우수상을 수 차례 받은 전설적인 가수다./에디트 피아프를 이은 최고의 디바였다.저항음악의 기수로서 활동하다 유럽으로 추방당했다. 다시 본국에 돌아왔을 때 청중의 우레같은 박수 속에서 울먹이며 부른 노래가 '생에 감사해' 이다)
(168)편집부에서 온 편지--헤르만 헤세(1877~1962)
'귀하의 감동적인 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玉稿는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면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음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편집부에서 오는 이런 거절 편지가 거의 매일 날아온다. 문학잡지마다 등을 돌린다.
가을내음이 풍겨 오지만, 이 보잘것없는 아들은
어디에도 고향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목적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를 써서
머리맡 탁자에 놓인 램프에게 읽어준다.
아마 램프도 내 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빛을 보내준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인간의 창조 행위는 자연발생적인 영감에서 출발하지만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 기쁨은 배가 된다./십대에 이미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가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수없이 이런 거절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더구나 이 시를 쓸 당시 헤세는 50세였다.인류 문학 최고의 반열에 오른 헤세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헤세는 히틀러 사망 후인 6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그는 전쟁반대론자였으므로)/타인의 찬사를 들으려는 목적 없이 계속해서 글을 썼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180)그는 떠났다 (原題: 나를 기억해 주기를 Remember me)--데이비드 하킨스(1958~)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눈물 흘릴 수도 있고
그가 이곳에 살았었다고 미소 지을 수도 있다.
눈을 감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도할 수도 있고
눈을 뜨고 그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를 볼 수 없기에 마음이 공허할 수도 있고
그와 나눈 사랑으로 마음이 벅찰 수도 있다
내일에 등을 돌리고 어제에 머물 수도 있고
그와의 어제가 있었기에 내일 행복할 수도 있다.
그가 떠났다는사실로만 그를 기억할 수도 있고
그에 관한 기억을 소중하게 살려나갈 수도 있다.
울면서 마음을 닫고 공허하게 등을 돌릴 수도 있고
그가 원했던 일들을 할 수도 있다
미소 짓고, 눈을 뜨고, 사랑하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날 낭송함으로써 BBC방송과 타임지에 소개되어 유명해졌다)
(210)어떤 사람--레이첼 리먼 필드(1894~1942)
이상한 일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몹시 피곤해진다는 것,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 속 생각이 모두 움츠러들어
마른 잎처럼 바삭거린다는 것
그러나 더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 생각이 갑자기 환해져서
반딧불이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기를 빼앗고 인생을 재미없게 만드는 사람과 봄날처럼 마음이 밝아지게 하는 사람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둘 중 하나일 수 있다. 우리가 힘을 갖는 궁극적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다)
(222)먼지가 되기보다는 재가 되리라--잭 런던(1876~1916)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리라
마르고 푸석푸석해져 숨 막혀 죽기보다는
내 생명의 불꽃을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완전히 불태우리라
활기없이 영원히 회전하는 행성이 되기보다는
내 안의 원자 하나하나까지
밝은 빛으로 연소되는
장엄한 별똥별이 되리라
인간의 본분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나는 단지 생을 연장하느라
나의 날들을 허비하지는 않으리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쓰리라
(순회점성술사의 사생아로 태어난 잭 런던은 가난 속에서 부랑자와 같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느날 동네 도서관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석 달만에 전 과정을 마치고 캘리포니아대학에 입학했다.하루에 5천 단어씩 써 내려갔고, 27세에 야성과 폭력이 지배하는 인간세계를 통렬히 묘사한 장편소설 '황야의 부르짖음'을 발표해서 유명작가가 되었다. 18년 동안 51편의 작품을 쓰고 마흔 살 나이에 생을 마쳤다. 위의 글은 시로서 발표된 것은 아니며, 죽기 얼마 전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과 기자 앞에서 삶에 대해 토론하던 중 유언처럼 남긴 말이다.)
(234)납치의 시--니키 지오바니(1943~) 미국 여성, 시인이자 가수
시인에게
납치된 적이 있는가
만약 내가 시인이라면
당신을 납치할 거야
나의 시구와 운율 속에
당신을 집어넣고
롱아일랜드의 존스 해변이나
혹은 어쩌면 코니 아일랜드로 혹은 어쩌면 곧바로 우리집으로 데려갈 거야
라일락꽃으로 당신을 노래하고
당신에게 흠뻑 비를 맞히고
내 시야를 완성시키기 위해
당신을 해변과 뒤섞을 거야.
당신을 위해 현악기를 연주하고
내 사랑 노래를 바치고
당신을 얻기 위해선 어떤 것도 할 거야
붉은색 검은색 초록색으로 당신을 두르고
엄마에게 보여 줄 거야
그래, 만약 내가 시인이라면
당신을 납치할 거야.
(기꺼이 시에 납치 당해준 당신에게 감사드린다--류시화)
50년도 더 지난 옛날이야기가 떠오른다.
경제학도인 남학생이 독문학도에게 던지듯 물었다.
-문학이 밥 먹여 주냐?
독문학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했다.
-이슬 먹고 살지.
아닌게 아니라 좋은 시는 밥을 먹지 않아도 포만감을 안겨 준다.
-인간이 밥으로만 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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