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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 -- 함민복

맑은 바람 2023. 2. 8. 22:45

--홀로 먼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함민복 에세이/시공사/2021.1 초판1쇄 발행/247쪽/읽은 때: 2023.2.6~2.8

함 민 복(1962~)충북충주/서울예대문창과/'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윤동주문학대상' 등 다수 수상

(알라딘중고에서 택배비 없이 책을 사려면 총액이 2만원을 넘어야 한다. 중고책 가격은 기본이 5~6천원대라 세 권 정도 사야 택배비를 건질 수 있다.  이 책은 택배비를 아끼려고 산 건데 제대로 건져올린 大魚(?)다.

함민복의 시는 좋아하는 작품이 한두 편 있고 출판사가 시공사다. 작가와 출판사가 맘에 들면 바로 사도 뉘우칠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당연 시집인 줄 알고 샀더니 에세이네. 잘됐지,뭐~ 오히려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수필이 더 좋다.
그런데 '홀로 먼길을 가는 이에게' 라는 귀절이 걸린다. 무슨 의미일까 궁금증을 남겨둔 채 읽기 시작했다.
그는 평범한 상황을 詩的으로 표현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글 읽을 맛이 난다.)

(18)김장을 담그던 아랫집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린다. 양철대문 열고 나가 보니 그림 하나가 펼쳐진다.(아랫집 막내아들과 동네아주머니들이 감나무 아래에서 감을 터는광경을 시적인 분위기로 묘사했다.)
(19)멀리 동검도 쪽 바다에서 산이 하나 솟아오른다. 산은 거대한 날개를 펴며 시끄럽게 솟아 오르다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가창오리 떼다./한 달간 새우를 좇다 바다 일에 나무거울(겉모양은그럴 듯하나 실제로는 아무 쓸데없는 사람이나 물건을 빗대어 이르는 말)인 나를 믿고 잠시 혼곤한 잠이 든 어부를 내려다보던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32)고기잡이배를 타고 나가;
말뚝을 넘는 물이 울렁울렁 훈수(물이 흐르다가 장애물을 만나 일으키는 물결)지더니 배가 뻘에 닿았다.그때 해가 나고 감나무잎처럼 반짝반짝 윤기 돌던 물이 햇살을 꺾어 수천 수만 마리 나비를 날렸다. 물비늘 나비를 잡아 어머니 흰머리에 꽂아 주고 싶은지 바다를 바라다보는 자선이 눈빛이 그윽했다. 그물에 갇힌 숭어들이 부엌칼처럼 뛰어올랐다.
(36)강화도 마니산 밑에 있는 우리동네 동막리:
아카시아꽃 달콤한 냄새가 방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유리창에 밤새 쳐져있던 아카시아꽃 향기 커튼이 찢어졌나 봅니다. 콧숨을 짧고 빠르게 끊어 쉬며 달콤한 향을 음미하다가 폐를 최대로 부풀리며 향기를 빨아들여 봅니다.
(41)뱃길:
뱃길은 아무리 다녀도 다져지지 않습니다.굳은 살 하나 없는 말랑말랑한 생살로 된 길입니다. 먼지가 나지 않는 길입니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고기가 다니는 길을 쫓아다니는 길이니 물고기가 만들어 준 길이기도 합니다.
(49-50)볼음도에서의 밴댕이, 병어 잔치:(병어찜)
감자에 밴 병어 맛이, 병어에 밴 감자맛이 일품이다. 각자의 맛만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 맛을 나눠 보탤 때, 맛은 배가 되고 깊어지나 보다.
(87-88)스테인리스스틸 이남박:
**이남박(쌀 따위를 일 때 쓰는 함지박)
방바닥에 흘린 쌀알을 찾는다. 쌀톨 몇 개를 검지로 찍어 담는다. 쌀톨을 필요 이상으로 꾹 눌러 손끝을 지압한다.쌀의 기운이 금방 전해지는지 손톱이 붉어진다.'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오죽하면 기운 기氣자에 쌀 미米자가 들어있겠냐'고 하던 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쌀을 버리는 것은 다른 것을 버리는 것에 비해 유난히 아깝다. 거리에 버려진 동전도 몇 번 그냥 지나쳤던 내가 아닌가. 쌀에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그 무엇이 담겨 있나 보다. 실수로 쌀 한 톨이 개수통으로 버려질 때 아까움을 넘어 죄스러운 마음까지 든다.이것만 봐도 쌀에는 분명 어떤 신성한 힘이 깃들어 있나 보다.
(어릴 적, 방학 때 시골 친척집에 종종 놀러다녔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우리 남매의 수저를 수저주머니에 넣어 꼭 챙겨보내곤 했다. 엄마는 수저조차도 귀한 시절이라 숟갈이 없어 밥을 못 얻어 먹을까봐 그랬는지, 자기가 쓰던 수저가 편할 거라 생각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지금도 나는 내 숟갈 니숟갈이 따로 있다. 외식을 할 땐 어차피 남이 쓰던 수저를 사용하게 되는데, 나는 숟갈을 쓰기 싫어 비빔밥조차도 젓가락만 가지고 먹다가, 같이 먹던 사람한테서 '밥맛 떨어진다'고 한소리 들었다.
그런 나도 숟갈을 드는 때가 있는데, 밥공기에 들러붙은 밥알 몇 개를 마저 먹기 위해 물을 부어 다 긁어 마신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밥 한 톨의 귀중함을 철저히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쌀 한 톨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와 닿는다.)
그래서 시인은 밥 얘기를 시로 썼나 보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

 

(98-99)긍정적인 밥--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133-134)벚꽃이 피면 마음도 따라 핀다:
누군들 꽃을 보며 가슴 펴보지 않았으랴
누군들 꽃을 보며 눈 감아보지 않았으랴
누군들 꽃을 보며 무릎 낮춰보지 않았으랴
누군들 꽃을 보며 깊은 숨 들이마셔 보지 않았으랴
누군들 꽃을 보며 노랫가락 흥얼거려 보지 않았으랴
누군들 꽃을 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해 보지 않았으랴

꽃은 詩다.
뿌리가 어둠 속에서 캐 올린 밝은 마술이다.
꽃은 식물들의 상상력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추다.
꽃은 열매를 받는 안테나다.
꽃은 식물들의 생일날이다.
꽃은 벌과 나비의 직장이고 밥상이다.
꽃은 곱게 떨리는 연애편지다.
꽃나무 아래서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고 꽃나무 아래서 사랑을 고백받고 싶었다.
꽃은 마음 흔들림의 진원이고 흔들리는 마음을 잔잔하게 다독여 주는방파제다.

(끝까지 다 읽었건만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네.
다시 어느 경제학도의 말이 떠오른다. '문학으로 밥 먹고 살겠냐'는 말--
류시화는 시쓰는 남자한테 딸을 내 줄 수 없다며 장모감이 그에게서 사랑을 빼앗아갔고, 함민복은 시로 밥먹기가 참으로 힘들었나 보다.
돈 많은 후원자가, 내가 먹고 살만큼 줄 테니 맘놓고 시나 써라 하면 시가 술술 나올까?
나는 아닐 거라고 고개를 젓는다. 아마도 지긋지긋한 가난과 굶주림이 그에게는, 송진을 잔뜩 머금은 솔가지삭정이였으리라, 시의 불꽃을 지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