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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어쩌면 괜찮은 나이>

맑은 바람 2023. 3. 21. 18:42

--오십 이후의 삶, 죽음, 그리고 사랑
헤르만 헤세 글/폴커 미헬스 엮음/유혜자 옮김/291쪽/프시케의 숲/1판1쇄 2017.10/읽은 때 2023.3.16~3.21

헤르만 헤세(1877~1962)향년 85세. 대표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유리알유희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봄이 오는 길목
(12)긴 한숨을 내쉬며 육신의 덧없음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깨닫는다.

돌이나 흙,딸기나무나 나무뿌리로 변해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 사실로 인해 나는 흙과 물과 시든 나뭇잎에 대해 더욱 심한 갈증을 느끼고 만다.
---나는 파란 하늘에 구름이 되어 둥둥 떠다니고, 시냇물의 물살이 되어. 흘러가고, 나무에 새순으로 돋아날 것이다. 스스로를 잊은 채,수천 번 염원해 왔던 변신을 하게 되리라.

*여름의 끝
(18)여름은 마치 어제까지만 해도 건장하고 튼튼해 보이던 오십 대가 질병을 앓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거나 큰 실망을 하고 나서, 갑자기얼굴 가득 잔주름이 잡히고 주름살마다 세파에 찌든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는 것처럼, 생기를 잃은 모습을 드러낸다.
(22-23)어제의 푸른 수풀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과수원의 잎들은 누렇게 변해가며, 배나무는 진홍색으로 물들어간다.해질 무렵 산의 노을은 보랏빛을 띠고, 하늘은 가을로 접어들어 감을 알리는 에메랄드빛으로 짙어간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그것은 동굴 속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아그노의 호수에서 오후에 수영을 하는 것, 집 밖에 나와 앉아있거나 밤나무 밑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 그런 모든 것이 다시 끝났음을 의미한다.
(25)우리는 점점 더 나이들어 가겠지만 죽음이 아직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음을 보도록 하자. 어느 시인이 읊조렸던 것처럼.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맛좋은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노년의 좋은 시간들을 보내다가
마지막으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러나 나중에, 아직 오늘은 아니다!

 

*뱃사공

(56)경청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경청은 뱃사공들이 갖고 있는 성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태도다.말을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듣는 모습을 보며 싯다르타는 바수데바가 그가 하는 말을 온전히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마음을 열고 기다리면서,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다. 또한 조바심을 내지 않은 채 칭찬이나 비난을 가하지 않으면서 단지 듣기만 했다.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다 털어놓고,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과 고통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큰 행운으로 여겨졌다.
(60)(싯다르타)혹시 당신도 그 비밀, 그러니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을 강물한테 배웠나요?
(뱃사공 바수데바)맞습니다, 싯다르타. 강물은 어디에서나 동시에 존재하지요. 강물의 원천이나 강의 어귀, 폭포, 나루터, 소용돌이, 바다, 산,그 어디에서든 동시에 존재합니다. 강물에는 오직 현재만이 있고,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지요. 지금 그것을 말하려는 거지요?
(싯다르타)네, 맞습니다.그것을 깨닫고 제 인생을 바라보니 제 인생도 한줄기 강이었습니다. 어린 소년 싯다르타, 성인이 된 싯다르타, 노년의 싯다르타가 진짜 현실이 아닌 그림자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고,싯다르타의 죽음과 브라마로 돌아온 것도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고,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62)우기가 되어 강물이 넘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싯다르타)벗님,강이 여러 개의 목소리, 아주 많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제 말이 맞지요? 왕의 목소리, 검객의 목소리, 황소 소리,야생조류 소리, 임산부가 진통하며 내는 소리, 한숨 소리, 그밖에 수천 개의 목소리를 갖고 있지요?
(바수데바)맞아요.강물의 소리에는 삼라만상의 소리가 다 들어 있지요.
(싯다르타)강이 수천 개의 목소리로 동시에 말을 할 때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있나요?
바수데바가 파안대소하며 싯다르타에게 몸을 기울이면서, 신성한 강 옴의 말을 싯다르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싯다르타의 귀에도 들렸던 것과 똑같은 소리였다.
(65)마흔 살과 쉰 살 사이의 십 년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에게는 언제나 힘겨운 세월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삶과 자기 자신을 적절히 조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종종 불만족에 시달리는 시기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는 편안한 시간이 다가온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심한 가슴앓이를 하는 젊음이 아름다웠던 것처럼, 나이를 먹어가는 것과 성숙해가는 것에도 아름다움과 기쁨이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68)나이 오십이 되면,
사람들은 유아기적인 버릇이 차츰 없어진다.명성과 존경을 받으려는 생각을 차츰 떨쳐내고, 아무런 열정없이 자기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것을 배우게 되고, 침묵하는 것도 익히며, 귀 기울여 듣는 것도 배운다. 허약해지고 나약해지는 대신에 그런 좋은 것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커다란 이득이다.

 

(69-70)*쉰 살의 남자
요람에서 무덤까지
오십 년의 세월
그다음 죽음이 시작된다.
어수룩해지고 시무룩해지며,
정신이 흐릿해지고. 촌스러워지며, 머리카락은 하얗게 센다.
이도 빠져버리고,
횡홀감에 젖어
젊은 아가씨를 끌어안는 대신
괴테의 책을 손에 든다.

하지만 끝이 다가오기 전에. 단 한번,
눈빛이 맑고 곱슬머리를 한
그런 여자아이를
살짝 보듬어 안고
그녀의 입과 가슴과 볼에 입맞춤하고
그녀의 윗도리와 바지를 벗겨주고싶다.
그런 다음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음이 날 부르러 오더라도 난 좋으리라.아멘
(성욕은 죄가 없다. 그러나 젊은 아가씨를 마다하는 그가 죽기 전에 '어린 여자아이의 윗도리와 바지를 벗겨주고 싶다'는 말은 충격적이다. 그간 헤세에 품고 있던 '위대한 스승'의 이미지가 유리창 깨지듯 와장창-  그가 죽은 지 아직 100년도 안 됐는데~요새 같으면 '미성년자 성추행범'으로 몰리기 딱 좋은 말을 버젓이 남기다니. 진정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일까?)

 

(73)오랜 시간 동안 질질 끄는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분명 가장 힘겨운 일 중 하나다. 영웅적인 사람은 통증에  맞서며 그것을 애써 감추려 한다. 극기심 강한 로마의 스토아철학자처럼 이를 악무는 그 자태가 의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것이 고통을 진정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오히려 극심한 고통에 대항하려 하지 않고 열광과 모험을 즐기듯 그것에 몸을 완전히 맡겨 버릴 때, 나는 그것을 가장 잘 극복할 수 있었다.
(74)쉰과 여든 사이에는, 그 이전의 지난 수십 년간 경험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아름다운 경험들을 많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든을 넘기는 것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후에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 니나

(76-86)태신의 언덕의 니나할머니:
헤세보다 40년 연상(77세)의 친구 니나/마을 한쪽구석 외딴집에 산다/니나는 날 반갑게 맞이하면서 불평도 털어놓고 중언부언 신세한탄도 할 것이다. 또한 노년,관절통,가난,외로움을 아무런 즐거움 없이 끈질기게 감내하고, 세상에 대해 유쾌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저주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의사도,신부도 부르지 않을 사람의 전형적인 본보기를 내게 보여줄 것이다./니나의 부엌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돌,냉기, 그을음과 커피향이 진동했다. 덜마른 장작의 짙은 연기 너머, 거대한 벽난로가 보였다.그 앞 돌바닥 위에 있는 낮은 의자에 늙은 니나가 앉아 있었다./내가 극구 말렸지만 니나는 굳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미 굳을 대로 굳은 뼈마디들 때문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나무로 만든 담배통을 들고 있는 왼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가슴과 등에는 검은색 모직천이 감겨 있었다. 늙고 아름다운, 수릿과의 새같은 그녀의 얼굴에서 날카로우면서도 영특한 눈빛이 슬프고도 조소적으로 내비쳤다./나보다 니나가 사십 년 일찍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물론 니나가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관절이 휘고 손가락이 지저분하며 코담배를 언제나 코밑에 바짝 들이대고 있는 흉측한 할망구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주름 많은 독수리 같은 얼굴 한복판에 있는 코는 얼마나 멋진가! 몸을 추스르고 바짝 마른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의 자태는 또 얼마나 근사한가! 고운 눈매와 순수한 눈망울에 내비치는 눈빛은 얼마나 지혜롭고 자부심이 가득하고 조소하는 듯하면서도 악의없이 느껴지는가! 그녀는 분명 젊은 시절 미모가 빼어나고 지혜롭고 순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활동과 안식의 조화

(118)봄은 대부분의 나이든 사람들에게 좋은 계절이 아니고, 내게도 역시 부담스럽다. 약과 병원의 주사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증이 풀 속의 꽃들처럼 무성하게 자라나고, 밤을 지새우기가 몹시 고역스럽다.
(118-2)자연이 삶의 과정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말을 걸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경험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하게 된다. 그 시간은 불과 몇 초나 몇 분에 불과하다.
나이가 많이 들면 기쁨과 고통, 사랑과 깨달음, 우정과 열정, 책과 음악,여행과 일로 가득찼던 인생이 그런 성숙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긴 우회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이 우리에게 풍경, 나무, 인간의 얼굴, 꽃의 모습으로 모든 존재와 발생의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계단

(148)비열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한 최고의 무기는 용기와 고집, 그리고 인내다. 용기는 강하게 만들고, 고집은 흥미롭게 하며, 인내는 휴식을 준다.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대개 인생의 늘그막에 알게 된다. 풍파에 시달릴 때와 죽음에 서서히 다가갈 때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필요로 한다.

 

(150)*봄의 언어
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이들은 다 안다
살아라,자라라, 꽃피워라, 꿈꾸어라,사랑하라,
기뻐하라,새로운 충동을 느껴라.
몸을 내맡겨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백발노인들은 다 안다.
노인이여, 땅에 묻히거라
씩씩한 소년에게 그대의 자리를 물려주어라.
몸을 내맡겨라! 죽음을 두려워하지말라!

 

*회귀

(176)눈의 통증과 두통이 성가시게 괴롭힐 때면 나는 신체를 움직여 변화를 꾀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런 목적을 위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해오고 있는 정원에서의 작업은 단순히 신체적인 움직임과 긴장감의 해소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일종의 참선 같은 것이고, 상상의 나래를 무한히 펼치는 것이기도 하며, 영혼에 대한 정신 집중이다.

 

*가을 경험

(230)고향 슈바벤의 친구 오토의 죽음:
나는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를 잃게 된 것이 몹시가슴 아프기는 했지만,한 가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사는 동안 선하고 참된 사람의 모범이었던 한 남자가 죽음 역시 경이로울 정도로 모범적이었다는 생각 말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충직하고 책임감 있게 업무에 임했다. 또한 병원 신세도 지지 않고 아무런 고통도 없이, 동정심과 보살핌에 대한 호소도 없이,간단하고 조용하고 부드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죽음, 착실하고 보람찼던 생애를 부드럽게 마감한 죽음이었다.
(考終命. 나이든 이들에게 오토의 죽음은 羨望의 대상이다. 고통없이 고요히 낮잠자듯 떠나는 일, 福 중의 福이다)

 

*늦가을 속에서

(236)나이가 들면서 이사를 하는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결국에 가서는 이사 차량에 타는 것보다 운구차량에 타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36-2)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겸손해진다.잠을 푹 자고 몸이 어디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제 만족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267)*모든 죽음
난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난 앞으로도 다시 죽게 될 것이다.
나무에서 목석 같은 죽음으로 죽고
모래 속에서 진흙이 되어가며 죽고,
바스락거리는 여름 풀밭에서 낙엽이 되어 죽고,
그리고 불쌍하고, 처참한 인간의 죽음

꽃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나무와 풀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물고기와 사슴, 새와 나비
그 어떤 형태가 되었든
제일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고통을 향한
그리움이 나를 잡아채리라
오, 떨리도록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여
불끈 쥔 주먹의 그리움이
인생의 양극을
서로 구부릴 수만 있다면!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죽음에서 탄생으로 날 몰아갈 텐데.
고통스러운 새로운 탄생.
아름다운 새로운 탄생

(번역자는 5년간 독일어를 공부했다고 한다.그러니 번역자의 솜씨를 의심할 수는 없으나 헤세의 번역시는 마음을 울리는 것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유감이다!
우리는 헤세가 살던 시대와는 다르다. 의술이 발달해서 80 이후에도 5,60대처럼 살 수 있다 라고 말들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70 중반을 넘어선 주변의 친구들을 보아도 그렇고, '80세의 벽'을 쓴 일본인 의사의 글을 접해도 그렇고, 아직까지는 70후반이 그나마 상당수의 사람이 온전한 모습으로 삶을 누릴 수 있는 한계점인 것 같다.)

누려라,
70후반의 삶을!
미루지 말고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라.
곧 어둠이 내려앉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