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감사일기

스물두 살 선이에게

맑은 바람 2023. 8. 28. 10:24

(칠십다섯에 스물두 살 선이의 일기장을 펴보았다.)

네가 지금 옆에 있다면 호통을 쳐주고 싶다.
"정신차려, 이 사람아!"
네 부모는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서 널 애탄지탄  어렵사리 대학까지 보내,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버젓한 직장까지 얻었는데, 어째서 주눅들고 무기력하고 삶의 무의미 하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자빠졌능겨, 시방!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없는 걸 비관한다고 달라지남? 그런 일에 에너지 소비할 시간이 있거들랑, 수업준비나 철저히 하고 짬날 때 영어공부나 열심히 해서 실력을 쌓았어야지~~글구 연애가 하고 싶으면 외모에 신경 쓸 게 아니라 안에서 풍기는 매력으로  승부를 냈어야지!
내가볼 땐 완죤 찌질이다.

그럼에도 포항에서의 일 년은 네 교사생활 내내 활력소가 되었고 그때 만났던 제자들이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안부인사를 물어오는 걸보면 고뇌하면서도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낸 게 아닌가 싶다.
그땐 왜 몰랐을까?
이성간의 사랑은 받고싶어 껄떡거릴 게 아니라 저쪽이 주고 싶어 안달이 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우린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았던가!

학교수업 틈틈이 임용고시 준비할때 너는 또 고3때처럼 잠지옥에서 허덕였지. 참으로 그 일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신력보다 체력이 뒷받침해 주지 못해서 그랬나 하며 슬쩍 역성을 들어본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마음도 가라안고 아이들과도 웬만큼 적응했다는걸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년 사이에 꽤 성숙했음을 알 수 있어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당시 일기장의 편린들을 몇 개 주어모아 보았다.
*11/16 결코 헛되지만도 않은 숱한 날들의 위무 속에 난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11/17 나의 부족감은 예전처럼 열등감에로 번지지 않았고 때문에 난 보다 진보된 나를 안고 일어설 수 있었던 거다.
*12/2 시골 애들다운 순진함이 가득 배어있는 그들을 대하는 순간은 언제나 그 자체가 가슴 설레는 기쁨이었다.
*12/7 아버지에게서 합격통지(교원임용고시)가 왔다는 전화를 받고 바로 서울행--
발이 땅에 안 닿았지?
*12/21 포항의 날들을 정리하며:
그들과 완전히 동화된 생활을 하지도, 글을 써 보지도,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다.
다만 시간에 쫓기며, 잠에 쫓기며 쓸데없는 불안감에 쫓기며 이제까지 밀려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자위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재를, '내일을 위한 발돋움'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1970.12.31:포항출발.
그러나 난 하나도 기쁘지 않다.짐이 무거울뿐이다.
그러나 부모님의 울타리안에서 깊은 잠을 마음껏 잘 수 있다는 것, 깨끗하고 입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않다는 말인가
(그때 누군가 내 맘에 드는 이가 적극적으로 다가와 이곳 포항에서 교편 잡고 살자고 했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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