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강원도

태백 예수원-혼자 떠나는 여행(1)

맑은 바람 2008. 9. 27. 01:01

 

 

가끔 모든 인연의 줄을 잠시 놓고 혼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마침, 아무 때나 오라는 데가 있어, 2박3일 여정으로 짐을 쌌다.

간단한 세면도구, 여벌 옷 한 벌, 차 속에서 읽을 책 한 권.


청량리 발 무궁화 호는 양평-용문-원주-제천-자미원-사북-고한-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추전역(해발855m)을 지났다.

차 안은 노랑머리, 빨강머리의 사내, 계집애들이 마냥 들떠서 제 세상인 양 떠들어대고,

그런 속에서도 잠을 청하거나 무심한 채로 창밖을 내다보는 이들이 있고,

차창 밖으로는 펼쳐진 산과 들에 햇빛, 바람, 비를 맞고 싱싱하게 자라는 곡식과 채소들이 있는가

하면,  갈증으로 지친 땅이 더 이상 채소를 길러내지 못해 병들어 뽑혀진 채로 누렇게 말라가는

배추 포기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안팎으로 세상의 음과 양의 이치를 보는 듯했다.


드디어 4시간 30분만에 목적지 태백에 당도했다. 다시 버스로 이동을 해야 되는데

버스 출발시간이 임박했다는 안내소의 안내를 받고 후다닥 달려가 표 끊고 차에 올랐다.


내가 찾은 곳은 기도-묵상-노동을 일삼는 수도 공동체다.

지난 겨울부터 오고 싶어 한때 예약까지 해놓고 갑작스런 일 때문에 오지 못했던 곳,

그곳에서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나를 시들지 않게 하는 삶의 원동력인 호기심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이다.


혼자 움직이니, 누가 말을 걸어오기 전에는 입을 뗄 필요가 없어 좋았다.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운 가운데 침묵 속에서 생각의 바다를 마냥 헤엄치기도 하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속을 산책하기도 했다.


하루는 해발 1100m 고지에서 온종일 평생 처음으로 고랭지 배추 심는 일을 했다.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땡볕과 바람과 구름과 소나기 속에서

쟁기질하기(사람이 소 대신 쟁기를 끌었다!), 비료주기, 고랑내기, 물주기, 배추심기,

다시 물 살포하기 작업을 반복하며 배추 5000포기를 심었다.


새참으로 나온 얼음 탄 미숫가루의 맛이 그토록 단 줄을,

손바닥만한 그늘이 그렇게 고마운 줄을,

이마를 스치는 바람 한 점이 그토록 상쾌한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고산지대라 체감 온도 22도의 쾌적한 공간 속에서

복에 겨운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동행한 책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또한

혼자 여행할 때 읽기에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는지--

 

                                                                                                   2001. 8. 9

 

'국내여행 > 강원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 오죽헌  (0) 2009.05.05
양양 <쏠 비치> 리조트  (0) 2009.05.04
휴휴암, 쏠 비치 가는 길 (1)  (0) 2009.05.04
광덕산의 봄  (0) 2009.02.21
금강산 기행  (0) 2009.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