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이야기/봄

작은 것들에 관하여

맑은 바람 2008. 9. 27. 18:59

작은 것들에 관하여


4월 들어 매화 검은 가지 끝에 봄소식이 하나둘 전해오더니 이어서 훤칠한 목련 가지 끝마다 芽鱗을

벗어던진 우윳빛 꽃망울이 등불처럼 환하다.

매화꽃

 

목련

 

담 옆 수수꽃다리는 언제 온 줄도 모르게 하얀 향내를 은은히 피우고 그 아래 다소곳이 잎자락을 펼친

모란도 純白의 탐스러운 꽃을 피워냈다.

백모란

 

 이어 붉고 하얀 자태를 뽐내던 영산홍이 몇 차례의 비바람에 하나둘 시들어가고 앵두와 매실이 가지마다

조롱조롱 열매를 달고 파랗게 영글어 가며 빨간 넝쿨장미가 담장을 장식하기 시작하는 오월이 왔다.

영산홍

 

 

앵두꽃

 

유심히 보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다.


사실 제일 먼저 집안에 봄을 끌어들인 것은 제비꽃, 민들레였다. 어느 것이 먼저 들어왔는지 모르게 경쟁적으로

노랗게 또 보랏빛으로 여기저기 꽃점을 찍더니 민들레는 어느새 하얀 씨 주머니를 만들고 바람이 찾아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당 한켠에 올해도 몇 포기 고추와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금낭화와 은방울꽃도 함께 심었다.

상추란 놈은 올해는 심지 말아야겠다 했더니 작년에 씨가 떨어졌는지 여나문 포기가 잡풀들 속에서 여기저기 불쑥불쑥

올라와 있다.

저도 한 몫 하겠다고 얼굴을 내미는데 몰라라할 수 없어 한쪽으로 옮겨다 심어놓았다.

약간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장만해 놓고 뿌듯한 마음으로 매일 한차례씩 물을 주며 들여다본다.

하나같이 올망졸망 작은 것들이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변화를 알아챌 수 있다.

보랏빛 상사초는 겨우내 집안에 들여놓았다가 일찌감치 마당에 옮겨놓았더니 너무 추웠나 어디론가 숨어버렸다가

이제사 여기저기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물을 주다가 방울토마토를 보았더니, 세 놈이 모두 한 뼘이 겨우 될락말락한 작은 키에 파란 열매를

두 개씩 달고 열심히 키우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고것들이 꽃을 피우긴 했었다. 

 

고 작은 것들의 삶을 보노라니 나의 옛일들이 떠올랐다.


 학창시절, 키가 작아서 맨 앞자리가 으레 내 차지였던 나는 세월이 아득히 흐른 지금도 강의실이나

성당, 식장에 들어서면 저절로 맨 앞자리 쪽으로 발을 옮기게 된다. 평생습관의 힘인가?

초등학교 때는 작은 것이 좋을 때도 많았다. 앙증맞고 귀엽다고들 했으니까. 다만 일 년에 한차례 키가 작다는

이유 하나로 소외감 내지 억울함을 느낄 때가 있었는데 당시 초대대통령 이 승만 박사 탄신일에는 해마다

축하행사로 동대문운동장에서 대형 마스게임이 있었다. 생신이 임박해 오면 키 큰 아이들만 뽑아 매일 방과 후

운동장에서 연습을 시키고 당일에 예쁜 옷과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여 데리고 나가곤 했던 것이다.

 중학생이 되니 키 작은 아이들은 청소시간에 주로 교장실이나 특별실로 보냈다. 아무래도 굵직굵직한 아이들보다

동작이 작으니까 작은방을 청소하기에 어울린다고 선생님들은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때 체육부실의 어떤 선생님은 나만 보면 서울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양쪽 귀에 손을 대고 번쩍 들어 올려 주시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 눈매나 웃음 짓는 모습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케이블 같아서 어린 마음에도 싫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중학교 때와는 딴판으로 여자체육선생님이 작은 아이들에게 거의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며

싫어하고 구박했다. 매사에 꼼지락거리고 시원시원하지 못하다며--

그렇더라도 비관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3때 진로를 간호학과로 잡아 지금의 국립의료원인 메디칼 센터에 원서를 넣으려 했더니 키가 기준 미달이라 안 된다는 것이다. 

실력도 겨뤄 보지 못하고 키에서 밀리는 낭패를 본 것이다.

그때부터 점점 내 작은 키가 싫었다. 열등감이 자랐다. 유학을 가재도 키가 커야 할 것 같았다. 서양 땅에서 피부도 까무잡잡한 데다

 키까지 짜리몽땅이니 외견상 얼마나 그들이 업신여길 것인가?

내 땅에서도 작은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데--

 

간호학과를 포기하면서 국문과로 바꿔 나는 교사가 되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발육 좋은 아이들 속에 파묻힐 때는 내 키가 한 뼘만 더 컸으면 하고 또 생각한다.

그놈의 ‘미련’은 늙지도 않는 모양이다.

결혼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자, 신랑감의 제일 조건으로 삼은 건 큰 키였다. 

다행히 자신이 키에 대해 아쉬움이 없어서인지 상대방 키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남자를 만났다.

그러나 영양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던 탓인지, 엄마의 인자가 우성인지 2세의 키가 아빠를 쏙 빼닮는

행운을 얻지 못하고 내 쪽에 가까웠다.

다만 ‘작은’ 키는 면한 정도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제는 생의 굽이굽이를 돌아,작은 키가 아무 데서도 걸림돌이 될 게 없는 나이가 되었다.

오히려 옛사람들이 일찌기 가르쳐 준 말들을-'작은 고추가 맵다.','대추씨처럼 단단하다.',

겨자씨의 비유- 왜 진작 공감하지 못했던고 하는 아쉬움이 스칠 뿐이다. 

 

2008.  5. 6

'풀꽃나무 이야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 언제 왔니?  (0) 2011.03.24
봄꽃들의 축제  (0) 2010.04.02
앵두의 계절  (0) 2009.06.12
하얀 모란이 피기까지는  (0) 2009.05.08
금낭화와 수수꽃다리와--(4월의 뜰)  (0) 200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