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사라진 모교

맑은 바람 2009. 6. 9. 22:26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수십 년 사이에 서울만큼 옛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시는 지구상에 많지 않을 듯 싶다. 내 유년의 꿈이 자란 국민학교도 없어진 지 오래다.

 

50년대 중반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병원 바로 옆 철조망 하나 사이에 <창경 국민학교>가 있었다.  아득히 넓은 운동장 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만국기가 펄럭거리는 밑을 먼지를 폴폴 날리며 달리기를 했다.

훈육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이던가 단상에 올라 침을 튀겨 가며 육두문자를 내쏟는 때면 아이들은 바들바들 떨며 침도 제대로 못 삼켰다.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 생신이 임박하면 운동장은 꽃밭으로 변했다.

각 반에서 키 큰 아이들만 골라 짧은 주름치마에 알록달록한 셔츠를 입히고 마스 게임 연습을 시켰기 때문이다. 키가 작아 한 번도 마스 게임에 뽑히지 못한 나는 작은애들끼리 고무줄 노래로 '이승만 찬가'를 고래고래 불러댔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도옥립을 위하여

하안 평생 한결같이 모옴 바쳐 오오신,

고마우신 이이 대통령 우우리이 대통령

그의 이름 기이리 기리 비인내에 오리다아--"

 

 생일이 며칠 늦어 취학통지서를 못 받은 나는 옆집 아이가 다니는 혜화 유치원엘  쫓아다녔다.

그 아이가 유치원 가는 시간에 내가 먼저 나가 기다렸다.

따라 가서는, 복도에서 교실 안을 발돋움해 들여다보면서 친구가 끝나기를 기다리곤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걸 어느 날 엄마가 아시고는, 학기가 시작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건만  날 끌고 학교로

가셨다. 교감선생님은 콩알 만한 나를 한심한 듯 내려다보며 '집에 가서 젖이나 더 먹고 오라.'며

돌려보내려 했으나 우리 엄마 고집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교무책임자 선생님은 나를 받아 들여 주셨고 그날부터 나는 이름 석자 외고 쓰느라 맞기도

많이 맞았다. 엄마를 더욱 속 터지게 한 건 왼손잡이에게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게 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칼질이나 가위질은 왼손이 자유롭다.

 

"창경! 창경! 그지떼들아!"

지금도 아련히 들려오는 그 소리--

혜화 국민학교 아이들은 우리더러 그렇게 놀려댔다.

당시 낙산엔 피난민들이 많이 살았는데 거기 아이들이 우리학교에 많이 다녔기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다.

 

"조그만 도토리가 자라 참나무

조그만 실개천이 자라 한강물

우리는 자라면 나라의 일꾼

잘 배우자, 잘 배우자 우리의 창경!"

 

누가 뭐래도 잊을 수 없는 나의 영원한 모교 창경국민학교---

지금 그 자리엔 고층빌딩이 서 있고 학교는 언제인지도 모르는 때 사라져 버렸지만

내 유년의 시절은 교가와 함께 가슴 속에 따뜻하게 자리하고 있다. 

(200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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