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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베 발굴기 31~45

맑은 바람 2020. 9. 18. 22:24

(289)쥐꼬리만한 탐사예산을 가지고서도,  레이어드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발굴 및 탐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원정 중 그는 퀸지크의 구릉을 재공격하여, 말타(지금의 몰타?)로 떠나기 전 로스가 발견한 새로운 광맥을 계속 파헤치며, 님루드와 갈라 샤르가트를 재발굴하고, 남쪽에 위치한 바빌로니아로 내려가 고대 바빌론을 부활시키고, 바벨탑의 비밀을 벗겨볼 계획이었다.
(290)바다여행은 평화로우면서도 상쾌하였다.
"이 길은 전혀 낯설다는 점에서 모험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에 들었다."
(294)아시리아 예술의 주요 주제는 전쟁과 그 참화였다.
(300)그는 방 하나를 찾아냈는데 그 방은 아마도 왕실의 무기와 제사용  용기들을 저장해두는 창고로 사용되었던  것 같았다.  그 방은 아시리아 역사와 예술의 보물상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솥들은 호머의 일리어드에 묘사된 솥들과 유사하였다.---어느 유리잔은, 기원전 1천 년 전에 살았던 아시아의 두통거리  사르곤대제의 이름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레이어드는 이 기물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세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리아의 예술가들은 어찌 그토록 극히 미세한 문양들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열쇠는 무색 투명한 수정 렌즈에 있었다. 이 렌즈는 일종의 확대경으로 사용되어졌던 것이다.
(303)님루드로부터 사자상들을 운반하면서 레이어드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시작되면서부터 학자들을 괴롭혀온 문제 때문에 고민하였다. 과거, 즉  죽은 자들을 방해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닌가?
<니네베와 바빌론>에서 레이어드는 사자상들에 대한 그의 느낌을 진지하면서도 웅변적이고 로멘틱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그날밤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숭엄한 상들은 내  마음 속에 뭔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그들은 수천 년 동안 태평스레 서 있어 온 그들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아우성대고 복작거리는 현대세계에 뭔가 기상천외한 눈요기거리를 보여준답시고 이들을 이들의 소굴로부터 끄집어낸다는 것이 신성모독적인 불손한 행위인 것처럼  생각되어진다. 그들에겐 바로 이 황량한 폐허가 차라리 더 잘 어울린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옛날 영광의 시절에  이 궁성을 지켰었으니 이제 와서 폐허가 되어 버린 이 궁성을 지키는 것도 그들의  도리일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마음껏 뛰놀던 동물들을 잡아다가 동물원 우리 속에 넣고 구경거리를 만드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동물원의 동물들이 측은해서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그들의 슬픈 듯한 눈망울과 마주칠 것 같아서~

내가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두기 위해 사진을 찍고, 필사를 하고, 일기를 쓰는 행위도 부자연스럽기는 매한가지?)
(304)아시리아 왕실도서관 발견:
설형문자가 씌어진  점토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점토판들은 아시리아의 언어와 역사를 부활시키는데 필요한  설형문자의 완전한 해독 자료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의 관행과 학문은 물론 문학까지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서관에서 얻은 점토판을 세어보니 2천5백 개가  넘었다.
(305)설형문자  해독가 롤린슨의 소감: 아시리아 학문의 완전무결한 백과사전이 나왔다.
롤린슨의 말대로 레이어드가 발견한 도서관엔 어휘사전과 문법은 물론  식물학, 천문학, 점성학, 야금술,지질학, 지리학에 관한 논문과 연대기, 종교와 역사에 관한 소책자들, 칙령과 포고문 및 법률과 신경 등의 모음집  등이 총망라하여 다 들어 있었다.
레이어드의 발견은 아담과 이브의 아들 셋이 홍수 이전 시대의 지혜와 역사를 영원무궁토록 보존하기 위하여  구운 벽돌과 굽지 않은 벽돌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306)니네베의 터인 퀸지크에서 성서 아시리아학은 탄생하였던 것이다.
(사람 하나 살지 않는 사막에서 두어 달 발굴팀이 지내기 위해 준비한 낙타와 말과 식량과 군대들, 각각의 인종들(유럽인, 터키인, 베두인, 아랍원주민, 티야리아,예지디인--)의 알록달록한 행렬은 상상만해도 즐겁다. 영화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볼만했을까? 앞으로 내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밟을 기회가 올까? 참으로 가보고싶은 그곳!)
(310)레이어드는 구릉 하나하나마다 체계적으로 탐사할 수 없는 자신의 가벼운 돈주머니를 저주하였다.  백 개에 가까운 구릉들을 셀 수 있었다.
"그 옛날 위대한 문명의 물결이 밀려왔다 사라져간 이 모래사장엔 그들이 남기고 간 잔해들만이 널려 있을 뿐이다.
그 물결은 다시금 밀려올 것인가? 오랜 옛날 서방세계를 풍요롭게 해준 그들의 지식과 부의 씨앗을 또다시 품고서? 우리들 방랑자들은 황량한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는 아이들처럼 그들이 남기고간 것들을 찾아 헤맨다."
사막의 공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레이어드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십여 년 전 미트포드와 세일론으로 여행을 떠날 때 처음 느꼈던 그러한 해방감이 그의 핏속을 흐르는 것 같았다.  아랍유목민들처럼 레이어드 역시 사막의 자식이었다. 사막의 풍경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사막에서만이 그는 바람처럼  자유스러울 수 있었다. 베두인 안내자인 수툼 역시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수툼이 외쳤다.
"삶의 보람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암요, 도회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에 대해  무얼 알겠습니까?---신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길!"

(이 책을 읽은 지 30년 가까이 되었건만 이 대목은 잊혀지질 않는다. 낙타를 타고 인도북부 타르 사막을  건너서 주먹만한 별들이 쏟아지는 야영지에서도 이 귀절이 생각났다!)
(311)샤마르 아랍인들이 노랑머리들을 부러워하였는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레이어드가 족장을 부러워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나는 아르반의 위대한 아랍족장의 가정사에 관하여 독자들에게 뭔가 들려주고 싶다.
그의 약점은 아랍인들에게 자신의 힘과 권력을 자랑하고자 하는 욕심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깨가 쏟이지는 신혼생활의 단꿈을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거의 달마다 헌 신부를 버리고 새신부를 맞아들인다. 따라서 이 행복한 사나이는 영원한 밀월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317)박물관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라쌈(칼데아인, 수 개 국어에 능통, 통역관, 회계담당, 총감독, 인부들간의 분쟁 해결, 항상 호쾌한 성격) 이외에는 도와주는 이 없는 상황에서 레이어드는 좌절과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한 아직 완전히 패배하진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18)레이어드가 말라리아와 더위에 지쳐 허덕거릴 때 런던은 레이어드를  '미스터 황소'라는 별명을 붙여가며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가 보낸 석상들 때문이었다.
(319)그러나 영국으로부터 온 소식들은 그의 사기를 북돋아주기는 커녕  점점  더 깊은 좌절과 우울 속으로 그를 끌고 갔다. 레이어드는 '명성'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저는 제가 이루었다는 성공 따위를 놓고 그저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든가, 추어올리는 일 따위를 증오합니다. 저는 절대로 그들에게 속지 않아요."
그가 보인 태도는 결코 겉치레 겸손이 아니었다. 후에 라쌈이 그의 이러한 성격을 그럴  듯하게 묘사하고 있듯이 그는 '허풍 떠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다.'
레이어드는 마음 깊숙히 자신이 인생의 낙오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느 누구도 그를 달리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사실이  그러니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사관의 말단사원이라는 보잘것 없는 직업을 가진 그는 명목상의 수입만을 올리는 미래가 없는 건달이었다.
(320)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박물관에서 뜻밖의 돈이 오자 그는 서둘러 바빌론으로 떠났다(1850.10)
(323)힐라를 향해:바그다드에서 60마일 남쪽에 위치함/ 노아의 가족들이 홍수가 끝난 후 처음 만났다는 시나르 땅/유다의 자손들이 포로로 쟙혀갔던 곳/네브카드네자르가 황금옥좌에 앉아 있었던 곳/바빌론
(325)바벨탑:힐라로부터 5마일 떨어진 지평선상에 우뚝 솟은 거대한 폐허/아랍인들은 그에게 이 구릉이 무젤리베, 즉 '뒤엎어진 탑'이라 불린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니 이 자리는 바로 바벨탑이 서 있던 자리가 아닌가?

후에 확인된 사실은 그곳 지하실에서 발견된 구운벽돌에 네브카드네자르의 이름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333)그는 진정한 고고학자와 진정한 아시리아학자는 종착역이 없는 여행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담벼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혹심한 더위와 해충들, 끝없이 재발되는 학질,  메소포타미아의 거칠고 험한 생활, 재정 지원자들의 인색함,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이 모든 것들이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 떠난 그의 앞에 이제 막다른 골목의 표지판처럼 서있는 것이었다.  영국으로 돌아갈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337)1851년 4월  27일  그는 마지막으로 정든 구릉들을 돌아보았다.
"어찌하여 이 천하의 온갖 영화를 누렸다는 위대한 왕국은 지금 이렇게 현대의 무지와 부패의 한가운데서 다시금 불쑥 나타났단 말인가?"
다음날 그는 모술의 친구들에게 '무거운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고 그 고대 아시리아의 폐허로부터 등을 돌렀다.
그는 자신이 결코 되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357)설형문자 해독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은 아일랜드의 사제였던 에드워드 힌크스 박사였는데 역사는 그를 너무 푸대접하였던 것 같다. 1840년대 후반에서 1850년대로 넘어오면서 힌크스는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보고는 시종일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어쩌면 그가 문외한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그가 빅토리아 체제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힌크스가 해독작업에 아주 중요한 진전을 가져다주는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만 해도 <아테네움>지는 몇 줄밖에 허용해주지 않았다. 후에 기사 작위를 받은 롤린슨이 그의 소견을 발표할 때는 주석만해도 3단씩이나  차지하였다.
(358)크림전쟁 후 네 명의 학자들이 라쌈이 출토한 진흙 실린더에 대해 거의 똑같은 해독문을 내놓았다.
기원전 1400년경 군림했던  티글라트-필레저 황제의 연대기였음이 판명되었다. 그 실린더는 레이어드의 구릉에서 발견된 비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 있어 롤린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아시리아 왕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밖에 일반 역사가들이나 작가들이 언급한 욍들도 역사적 인물들이었음이 밝혀졌다."
(364)나이 사십에 레이어드는 돈걱정에서 해방되고 외무차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빅토리아여왕은 그의 외교문제를 다루는 실력을 인정, 열렬한 팬이 되었다.
후에 노동과 건설 담당 최고이사의 자리에 오르나 그의 정책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스페인대사로 발령을 받게 된다.
(367)1869년 레이어드는 정치적인 야망을 저버리고 결혼하게 된다. 한때 염문설을 뿌린 샤를로트의 딸 에니드와.
스물일곱 살 연하인 그녀에게 레이어드는 아버지같고 영원한 사랑이었다.
신랑신부는 신혼여행을 서리의 도르킹으로 갔다가 다음엔 노르쓰 다운스의 벼랑과 레이스 힐의 모래언덕 사이에 있는 모올 강의 푸른 계곡으로 갔다.
(370)그들의 결혼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으니 수다쟁이들도 나중에는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들은 아주 목가적인 한 쌍이었다. 레이어드는 한 번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도 않았고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결혼 초에 에니드는 놀랍게도 레이어드와의 생활은 완전무결하게 행복하다고 고백까지 하였다. 끝내 아이를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대부분, 아이들 때문에  부부싸움이 일곤 하는데 그들에겐 싸울거리가 없었던 셈. 그러나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건 마냥 부럽기도 하다.)
외견상으로 볼 때 그들은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에니드는 레이어드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을 뿐 아니라 호리호리한 반면 레이어드는 세월이 갈수록 뚱뚱해져갔다.
에니드는 눈부시게 하얀 옷을 즐겨 입곤 하였는데 레이어드의 해오라기빛  머리털과 수염에 아주 잘어울렸다. 그들이 나란히 나서는 걸 보면 한쪽이 익살맞은 고성능 폭탄이라면 다른 한쪽은 평범하고 얌전한 보름달이라고 하면 딱 알맞을 터였다.(이 글의 저자 아놀드 브렉만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이런 시시콜콜한 표현까지 흥미를 끌어 필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는 에니드의 동의를 얻어 스페인 대사로 나가면서 주로 외국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시리아고고학을 원격조종하면서~
그때 스미스라는  가난한 도제공이 레이어드의 발굴기에  반해 박물관에 일삼아 드나들다가 박물관 고대유물 부서에 취직이 된다.
(372)스미스의 말:모든 사람은 좋은 환경에 의해 부추김만 당하면 앞으로 자신의 일생을 멋지게 그려 나갈 수 있는 소질과 성향을 지니고 있다. 나의 관심사는 항상 동방연구에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동방의 발굴과 탐험,  특히 레이어드와 롤린슨이 이루어 놓은 위대한 업적에 열광하고 있었다."
스미스는 레이어드의 뒤를 이어 퀸지크 발굴에서 칼데아어판  홍수 이야기를 기록한 점토판 조각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의 명은 36세로 끝난다.
다시 일어난 아시리아 열풍은 레이어드를  또 아시리아로 향하게 한다. 터키대사직에 임명되면서.
그의 작위 수여와 함께.
그는 이제 대영제국의 서sir 어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되었다.
(그는 타고난 외교술을  지닌 인물 같았다.
그가 맘먹고 처리하고 싶은 일에 장애가 되는 인물들을 만나면 그들의 마음을 돌려 어찌 그리 기분좋게 도와주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는지!
그렇다고 그의 생김새가 타인의 호감을 살만큼 훤칠하지도 않았다. 성질도 불 같았다.
뚱뚱하고 작달막한 외모  어디에 그런,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숨어 있는 건지, 이 글에 빠지게 하는 것도 블렉만의 능란한 글솜씨도 한몫하지만 주인공 레이어드가 이끄는 매력 때문이 아닐까? 한때 눈에 거슬리는 존재로 비쳐졌던 그가 어느새 빅토리아여왕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오스만 터키 술탄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아, 아시리아 지역 어디서든지 발굴하도록 허가증을 내주었다.
이제 나도 그의 삶이 저무는 소리를 들으며 몇 페이지 안 남은 책이 벌써 마음을  허전하게 하니 말이다)
(388)터키대사를 끝으로 레이어드는 은퇴를 하고, 베니스에 아름다운 조망과 멋진 옥상정원을 가진 성을 사들여 안주한다.
아내 에니드의 말:레이어드에 있어 은퇴란 온종일 일함을 뜻한다.
<젊은 시절의 모험담>은 이때 씌여졌다. 에니드는 남편의 시중을 드느라 밤낮없이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있었다.
(390)만년의 레이어드의 생활:
"나는 요즈음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그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이상 무얼 또 바라리?"
그에겐 수많은 학회의 명예회원의 자리가 주어졌다.
"명예란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396)<네이처>를 중심으로 한 박물관과 영국정부의 인종차별적이고 부당한 처사에 대한 레이어드의 항변:

나는 내가 발견한 모든 것들을 몽땅 팔아치워 떼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유물들을 자진하여 국가에 바쳤다. 어디 그뿐이랴. 얼마 되지 않는 내 푼돈까지 털어가며 발굴을 계속하였단 말이다.
---내가 언제 영국 박물관의 이사회더러 대리석상들을 주었으니 돈을 달라고 요구했는가? 아니면 죽도록 고생을 했으니 보상을 하라고 그랬느냔 말이다!  나는 기본 경비외는 전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인간사의 간악한 면을 보여주는 상황에 대해 레이어드는 울분을 터트렸다. 믿을 눔 없다!)
(397)레이어드의 마지막 날들:
"25년 간의 결혼 생활 중에서 나처럼 단 한 번의 휴가도 얻지 않고 단 한 번의 부부싸움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면 말해 보게나.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같이 있기로 하였는지도 모르지. 그 끝이라는 것도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이,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398)레이어드의 영면:1894년 7월 5일 오후 8시 15분 나의 남편은 눈을 감았다. 25년간 한번도 나의 곁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는 이제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고 만 것이다.--에니드
(399)에니드:철저한 빅토리아시대의 여인. 시종일관 과묵하고 인내심이 많음. 마지막 일기장에 눈물이 번졌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자 후기
(403)나는 이 전기로 인해 돈을  벌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레이어드가 집필대상으로서 기가 막히게 만족스런 인물이라는 점은 특히 그가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부인할 수가 없다. 우리들은 부정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긍정적인 시대에 살았던 긍정적인 사람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경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415)창조론:모세의 천지창조론과 아시리아의 천지창조론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는 논거의 예는 이집트학 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모세의 유일신 사상이 엑소더스 이전에 이집트의 만신전에 있는 우상들을 부수고 유일신의 존재를 가르쳤던 이단왕 아케나텐(아크나톤)으로부터  배운 것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416)아시리아학과 이집트학이 구약성서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을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를 노예와 포로로서 오락가락하는 동안에 양민족의 고도로 발달한 신화라든가 종교로부터 구약성서 속에 나타나 있는 '존엄한 신'의 개념을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 개념은 그후 신약성서 ,나아가서는 코란에게로 전수되었을 터이고--

 

(419)고대유물을 유럽으로 가져오는 일이 옳은가에 대해:
터키정부의 입장:가장 가공할 훼손은 고대유물들을 원래의 경관으로부터 서구의 유명한 박물관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유럽인의 입장:신실한 회교도들은 땅속에서 나오는 것이면 무조건  부수어버리는 전통이 있어 더욱 훼손되기 쉽다.
결론적으로, 서구의 대형박물관들은 이들 발굴물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영구히 보여줄 수 있도록 소중히 보관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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