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의 휴먼드라마
한울/2011.5 발행/294쪽/읽은 때 20210704~0706
김열규(1932~2013) 향년81세/경남 고성/서강대 국문학 교수/문학과 미학, 신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그의 글쓰기의 원천은 탐독이다/그는 일제강점과 광복, 6ㆍ25전쟁과 독재정권 등 한국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꽃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한국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인의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선생님의 책이 언제 어느 경로로 내 손에 들어왔는지 아무런 메모가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다만 문득 이 책을 대하는 순간 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봄 선생님을 뵙던 순간을 그리며--
그런데 김점선은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의 글은 읽지 않는다 했다. 기대밖의 글을 대했을 때의 민망함 같은 거 때문. 나도 바로 전에 김점선의 철학과 유머가 담긴 전기를 줄쳐가며 재밌게 읽은 까닭에 선생님의 글이 그보다 못한 느낌이 들면 어쩌나 조심스러워진다.
(34)일본인을 향한 반발심(?):정초에 일본인 집의 물건을 훼손시키기도 하고, 똥덩어리를 문앞에 던져놓거나, 일본아이들을 고의적으로 습격해 괴롭히기도 했다.
선생님은 약골이라 아이들과 어울려 뛰어놀지 못하는 바람에 소일거리로 책을 가까이 하다보니 책벌레가 되었고, 외할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라 절에 따라다니다 보니 나중에 혼자서도 절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부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니 내로라 하는 수영 솜씨를 자랑할 수 있다. 환경과 신체적 조건이 삶의 형태를 규정한 셈이다.
(124)실감나고 긴박한 6.25:일요일 아침 성북동을 출발해 대한극장에 영화보러 갔다가 상영도중에 쫓겨난 이야기, 부산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탄 이야기들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근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욱 실감난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크고 작은 사건을 퍼즐 조각 맞추듯 하나하나 짜맞추어가며 하나의 완성된 삶을 이룬다.
(165)똥물을 핥게 한 일본인 상급생:화장실 청소 책임자의 역할을 질책하며 똥물을 핥게 했다.
선생님의 마음바닥을 이제 보았으니 직접 관련 없는 일본인에게까지 반일감정이 우러나는 걸 십분 이해하겠다.
**박완서와 김열규 선생님은 국문과 입학동기?
(178)전시 연합대학:
영화관이 상영을 안 하는 아침과 밤 시간에 열리는 강의-- 피난민으로 넘치는 와중에서도 대학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6개월만에 연합대학문은 닫히고 학교별로 독립해 나갔다.
(183)종교학 교수의 들판에서의 기도:
부산 동대신동 산비탈에 차린 임시 校舍/종교학 야외수업 전 교수의 기도--"주여! 거친 풀밭입니다.하지만 그런 터전이기에 우리는 더욱 열심히 강의하고 학습할 것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 신도가 아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고개를 깊이 숙였다. 풀밭 강의실의 풀냄새가 향기롭게 일면서 더 열심히 하자는 나의 다짐을 돋우어 주었다.
(190)대학생의 군 면제:피란대학이 개강을 했다. 그렇게 하도록 결단을 내린 정부당국과 문교부의 태도며 정책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런 시대적인 위급한 상황에서도 대학생들은 병 역이 면제되었다.
(지식인을 보호해야겠다는 방침은 이해하나 사정이여의치 못해 전장으로 내몰린(?)청춘들은 얼마나 비통할까?)
**준순:조금씩 뒤로 물러섬
(220)선생님의 비밀:나같으면 차라리 전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픈 가족사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그 아픔은 개인의 아픔이자 세계 유일의 분단국의 아픔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으셨던 거다.
그분이 서강에 오래도록 머물렀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신의가 무엇인지 그분들(학교당국자)은 몸소 가르치고 실천하셨다.
Seogang proud of you, You proud of Seogang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이,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선생님의 서강 사랑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 사이에 인기도 최고였다. 35세의 젊은 선생님은 스물셋 제자들에게는 친근한 오라버니같은 스승이었다.
(262)경남 고성 선생님의 집이 그려지는 시:
고개돌리면 산
눈길 던지면 바다,
그 사이에 나의 둥지
숲을 부는 바람소리가
파도에 설레는바람 소리 맞아서
서로 도란대는 곳,
거기 나의 둥지
**좌이산, 자란만
선생님은 귀향하시어 무척 행복하셨나 보다. 특히 손님방으로 쓰고 있다는 아래채에 많은 애정을 담아 표현하셨다.
'집다운 집'이 거기 있다고. 우리도 그 집을 보았으나 스승께 민폐가 될까봐 선생님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 한 잔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시기 3년 전, 경남 고성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통유리 거실에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우리를 맞이하던 선생님 모습이 떠오른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訃音을 듣고 동기들에게 전화를 돌리니 하나같이 사정이 있어 갈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문상을 가니 아는 후배들이 인사를 건네온다. 부의금만 전하고 바로 나올까 하다가 문득, 선생님이
"이눔,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은 먹고 가야지!"
하며 뒷덜미를 잡는 듯하여 후배들과 둘러 앉아서 밥을 먹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