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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

맑은 바람 2022. 2. 19. 14:46

--낯선 조선 땅에서 보낸 13년 20일의 기록
헨드릭  하멜 지음/김태진 옮김/서해문집/초판 1쇄 2003년3월/초판 16쇄 2020.2/141쪽/읽은 때 20220216~0220

헨드릭 하멜(1630~1692)향년62세/네덜란드 호르쿰 출생, 동인도 연합회사 소속 선박 포수/1653년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에 표류(8월16일), 13년만인 현종7년(1666년 9월 14일)) 동료 7명과 함께 탈출, 일본에 들렀다가 고국으로 돌아감
'하멜표류기'로 우리나라를 최초로 유럽에 소개함
**흥미위주의 '하멜표류기'도 있었으나 이 책은 문서보관함에 있던, 하멜정본을 번역한 것임/역자는 15년 이상 하멜과 네덜란드 선원들의 17세기 조선에서의 생활에 관한 자료수집과 연구를 해왔다.

하멜일지(1653~1665)
--1653--

(27)아름답던 배는 산산조각 나고 64명의 선원 중 불과 3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 모든 일이 15분 사이에 일어났다.

(30)(말은 통하지 않으나, 조선의 절도사의 지시에 따라 군사들은 그들에게 처음에 죽을 주고 다음엔 쌀밥을 주었다.

하멜 일행도 조선 군사에게 망원경을 주고 와인을 맛보였다.)
(33)우리가 도착하자 그들은 우리를 관청의 앞마당에 모이게 하여 미음 한 그릇씩을 들게 했다. 우린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식사이고 모두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총이랑 전쟁에서 쓰는 갖가지 물품들, 다양한 옷차림들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약 3000명 정도의 무장 병졸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행동은 중국인이나 일본인 사이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었다.
(34)제주목사(이원진)에 대한 하멜의 평:
그 총독은 선량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70세 가량 된 그는 서울 출신으로 조정에서도 상당한 신망을 받고 있었다./나중에는 우리에게 향연을 베풀어 우리의 시름을 달래 주려고 노력했다./부상자도 치료받도록 조처해 주었다./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35)제주목사가 네덜란드인을 대면시켜줌/그의 이름은 얀 얀스 벨테브레(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이고 1627년 조선에 표류했다고 말함/왕에게 귀국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으나 여생을 책임질 테니 눌러살라고 했다고 말했다.
--1654--
(41)배로 몰래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붙들려와서 곤장을 맞음

12일간 서울로  올라감

(46)12일의 여정 끝에 서울로 올라와 효종을 만났으나 귀국을 허락하지 않음:"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 관습이 아니므로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며 대신 너희들을 부양해 주겠다."/그런 후에 그들을 친위병으로 삼고 호패와 화승총과 포목 두 필씩 주었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아이들이 그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우리들을 응시하곤 했다. 하멜 일행이 얼마나 그 시선들에 시달렸을까 이해된다.)
--1655--
네덜란드 일등항해사는 청나라 칙사를 몰래 만나려다 발각되어 참수당한다. 또 한 사람은 낙망해서 굶어죽는다.
-- 1656--
고관들이 외국인들을 없애자고 간언했으나 왕의 동생(인평대군)의 배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고관들은 외국인들이 다시 청나라 칙사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전라도로 유배시킴
서울에서 인연을 맺었던 벨테브레(한국이름 朴淵, 음악가 朴堧과는 同名異人)와는 그때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함
전남 강진군 병영리로 거주지를 옮겨 33명이 그곳에 살게 됨
--1657--
(56)구관이 명관?:2월에 새 절도사가 부임했는데 전임자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주 일을 시켰다. 전임자는 땔감을 지급해 주었는데 신임절도사는 이 특혜를 없애버려서 우린 스스로 나무를 해와야 했다.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산을 넘어 20km 정도 가야 했는데 몹시 힘이 들었다. 그러나 9월에 그에게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이다. 그는 가혹한 통치를 했기 때문에 우리와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다.
(나름 엄격한 관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칙사도 아닌데 얌전히 모셔놓고 먹일 수만은 없잖은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甘呑苦吐) 인간의 속성을 보니 씁쓸할 뿐이다.)
세번째로 온 절도사는 아예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57)이 조선 사람들은 외국의 풍물에 대해 몹시 호기심이 많고 듣고싶어 했다. 이 나라에서는 구걸한다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구걸이라도 해서 어려움을 타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진 것이 적더라도 서로 주고받는 미풍양속이 그들에게는 구걸로 보였나?)
--1658--
절도사가 또 바뀜/아예 출입을 금지시킴/장티푸스가 만연함
--1659--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함/외국인의 풍습에 호기심이 많은 스님들과 사이좋게 지냄
--1660--
절도사가 또 바뀜/신임 절도사는 하멜 일행에게 동정적임/권한만 있다면 고국의 부모ㆍ형제 곁으로 돌려보내고 싶다고 말함/그는 하멜 일행에게 자유를 줌
--1661--
몹시 가뭄이 들어 수확을 별로 할 수 없었다
--1662--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고 도둑이 횡행했다./국고가 습격 당하고 곡물이 강탈 당했는데 대부분 고관들의 하인 소행이었다./백성들은 도토리와 소나무 안껍질과 풀로 연명했다.
--1663--
3년 이상 기근이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하멜 일행은 22명이 남았는데 분산정책에 의해 여수에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이 배치되었다./하멜은 여수로 가서 그곳에서  좌수사의 지시를 따랐다/일등사수를 만들려는 좌수사의 목표 때문에 그들은 하루종일 서서 화살을 주워야 했다.
(62)그는 우리에게 일도 많이 시켰는데,기독교인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전능하신 하느님이 그 죄값을 받게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1664--
(63)올초에 우리 좌수사의 임기가 만료되었다. 왕은 그를 장수의 지위, 그 지방의 2인자로 임명했다.그래서 신임좌수사가 오게 되었는데 그는 곧 모든 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었고 다른 고장에서는 우리 동료보다 일을 더하지 않도록 명령했다./신임 좌수사는 우리에게 좋은 일만 했으며 우정을 보여 주었고 가끔 우리를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위로했다.
--1665--
(66)올해에도 우리들의 고생은 여전했다. 그러나 우린 이교도의 국가에 잡혀 있는 불쌍한 포로라는 걸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살려주고 죽지 않게 먹여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
--1666--
(66)올해초에 우리에게 다정했던 친구를 다시 잃게 되었다.(전라 좌수영의 수군통제사 이도빈)그의 임기가 만료되어 더 높은 자리로 영전해 갔기 때문이다. 2년 동안 그는 우리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선량함으로 인하여 고장사람들, 농민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왕이나 고관들로부터는 그의 善政과 학식으로 인정받았다. 재임기간 동안 마을이나 농가의 주택을 많이 개량해 주었으며 또 해안과 군함도 정비해 두었다. 이런 모든 것이 조정에서 높이 평가 되어 왕은 높은 지위를 내렸던 것이다.
(드디어 배를 몰래 사들이고, 식량과 물을 준비해서 9월 4일 밤에 배를 띄운다)

(71) 그 다음 날, 즉 9월 5일 동틀 무렵, 바람이 멎어서 돛을 내리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돛을 올리면 그들이 추적할 때 발견될까 우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오 무렵 서쪽에서부터 날씨가 약간 추워졌다. 다시 돛을 올리고 짐작으로 남동쪽으로 진로를 계속해 나갔다. 저녁 무렵 날씨가 더욱 추워졌다. 조선 땅의 끝점이 우리 뒤로 멀어지고 이제 더 이상 잡힐 염려는 없어졌다.
9월 6일 아침에 일본열도의 섬 하나에 접근했다.
(72)9월7일, 8일 바람과 해류 때문에 제자리를 맴돌았다/오후에 어떤 만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칼 찬 6명의 일본인들의 눈에 띄었다
(74)그들에 의해 큰배로 인도된 후  9월 9,10,11일 정박한 배 위에서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9월12일, 나가사키로 항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 완료/9월13일 큰 배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 저녁 무렵, 나가사키 항구에 정박/9월 14일 아침 상륙/총독과 면담

(75)정오쯤에 총독 앞에 불려갔는데 그는 그렇게 조그맣고 낡은 배로 큰 위협을 무릎쓰고 바다를 건너 자유를 찾아 항해한 것을 칭찬해 주고, 통역에게 우리를 데지마섬의 商館長에게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그곳에 가니 상관장 빌렘 볼허 각하, 차석인 니콜라스 드 로이, 그밖의 다른 관리들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고 다시 네덜란드식의 옷을 주었다.

네덜란드인을 위해 일본이 내준 인공섬

(76)우리들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행운과 오랜 기간 동안 건강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13년 28일 동안 슬픔과 위험 속에 감금생활을 했던 우리들은 구해주신 하느님에 대해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또 아직 그 땅에 남아 있는 8명의 동포들도 구조될 수 있도록 하느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길 기도했다.

(그들은 거기서 일 년 머문 후 고국으로 향했다)

 

[조선국에 관한 기술(107~141)]
(17세기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지리적 위치:
이 나라는 8도로 나뉘어 있으며, 8도안에 360개의 도읍이 있다. 또 수많은 요새와 성채가 있는데 그 일부는 산 속과 해안을 따라 세워져 있다./이 나라는 인구 밀도가 높다/풍년이 들 때 남부지역에서 재배하는 쌀. 목화, 곡물 등이 풍부하기 때문에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부산에서 오사카까지의 거리는 185내지 190km밖에 안 된다. 또 이 두 도시 사이의 해협에 쓰시마섬이 있는데  이 섬은 이전에 조선땅이었으나 일본과의 전쟁 후 맺은 조약에 따라 제주도와 바꾸었다고 한다.

어업
고래와 청어가 많이 잡힌다/잡힌 고래에서는 네덜란드제 작살이 발견되곤 했다.
(그 흔하던 청어, 명태, 오징어가 지금은 모두 몸값이 올라 맛보기 힘들다)

기후와 농업
(109)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행객들은 거의 항상 배를 타고 좁은 만을 지난다. 그것은 겨울에는 산의 추위가 혹독하며 여름에는 맹수들 때문에 육로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강이 단단히 얼기도 하는데 이때는 얼음 위로 쉽게 여행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겨울에는 우리가 1662년에 산중의 어떤 절에 머무를 때처럼 굉장히 많은 눈이 내린다. 집과 나무들이 눈으로 덮여 있어서 다른 집에 가려면 눈속으로 통하는 굴을 파야 한다.
(오영수의 소설 '은냇골 이야기'에 이런 얘기가 소상하게 나온다)
이때 조선인들은 돌아다니기 위해 발 아래에 조그만 널빤지를 다는데 이것 때문에 산을 쉽게 오르내리고 눈 속에 빠지지도 않는다.

썰매와 설피

군주제
(110)조선 국왕의 권위는 그가 비록 청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추긴 하지만 조선에서는 절대적이다. 이 나라에 읍이나 마을, 섬 따위를 소유하고 있는 봉건영주는 없다. 양반들의 수입은 소유지의 재산과 노비로부터 생긴다. 어떤 양반은 2천~3천 명에 달하는 노예(종)를 소유하고 있다.


兵馬
(111)국가 방위를 위해 수도에 보병과 기병이 있다. 이들은 나라에서 봉록을 받으면서 왕궁을 지키고 왕이 행차할  때 왕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각도에서 7년마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왕궁 수호를 위해 수도에 양민을 보내야 한다. 각 도에는 사령관(절도사)1명이 3.4명의 부대장(절제사)을 거느리고 있고, 각 부대장은 여러 명의 지휘관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지휘관들은 한 읍을 관장한다.
기병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다.
이들의 무기는 활과  화살 및 일종의 도리께 같은 것인데 이 도리께 같은 무기는 우리나라(네덜란드)에서 곡물을 탈곡할 때 쓰는 것과 같으며, 끝부분에 짧은 쇠붙이가 달려 있다.(편곤은  중국에서 발생,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에 들어옴)/모든 병사들은 화약과 50발분의 총탄을 자비로 부담하며 반드시 그것들을 소지하고 다녀야 한다. 우리가 서울에서 복무 중일 때 충분한 화약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볼기를 까고 볼기 다섯 대를 맞았다.


(112)각 읍에서는 주변 사찰에 있는 많은 승려들을 교대로 임명해서 자비로 산 속의 성채와 요새를 관리한다. 유사시에 이 승려들은 승군이 된다. 이들은 칼과 활, 화살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들의 계급에서 선출된 대장의 지휘를 받는다./이들 역시 병사명부에 올라 있다. 따라서 국왕은 항상 병사이든 대장이든 노동자든 승려든 간에 군복무에 임할 수 있는 양민의 수가 얼마인지 알고 있다/60세에 달한 병졸들은 군복무가 면제되며, 이들의 아들이 이를 대신하게 된다.

水軍
(113)각 읍은 전투용 정크선(거북선)과 승무원, 탄약 및 다른 장비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 戰船은 이중으로 된 갑판과 20~24개의 노가 있다. 각각의 노에는 5~6명이 배치되며, 전체 승무원은 200~300명의 일반인, 군졸 및 조타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배는 몇 대의 총과  많은 화약을 싣고 있다.
각 도에는 수군 제독(수군절도사)이 있어 수군을 훈련시키고 매년 이 배들을 점검하는 시기도 있다. 만약 어떤 제독이나 힘장이 의무 수행에 있어 조그만 과실이라도 범하면, 그는 1666년  우리 제독이 그랬던 것처럼 추방되거나 파문 또는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행정
(114)어전회의는 지위가 높고낮은 고관들로 이루어져 있는 왕의 자문기관이다./이들은 매일 왕궁에 등청하여 국왕에게 모든 사건을 보고한다./그들은 비행을 저지르지 않는 한 80세까지 재직할 수 있다.
/지방 관찰사의 재직 기간은 1년이다. 다른 지방 관속들의 임기는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3년이다.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재직 중에 저지른 비행 때문에 임기 만료 이전에 쫓겨난다. 왕은 항상 전국에 암행어사를 두어 행정 전반에 걸친 상세한 정보를 입수한다. 따라서 많은 관리들이 사형이나 종신 유형에 처해질 위험이 있다.
(하멜은 거의 첩자 수준으로 조선의 행정, 군사력 등을 파악한 것 같다. 우리들이야 대부분 익숙한 이야기들이지만 서양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읽고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의 화려한 修辭와 풍부한 이야깃거리에  비하면 분량이나 수사면에서 拙하기 그지없다. 허기사 마르코 폴로가 본 원나라와 그 옆의 조선은 우선 볼거리부터가 다르니까~)

세입
형법
(115)국왕이나 국가에 반역한 반역죄 및 다른 중범죄는 매우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ㅡ 죄수의 전 가족이 파멸된다. 그 죄수의 집은 주춧돌까지 완전히 헐리며, 그 집터에 다시는 집을 지을 수 없다. 그의 모든 재산과 노비는 국가 재산으로 몰수되든가 다른 사람에게 양도된다.(반역자에겐 삼족을 멸하는 형벌이 내려진다는 얘기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오던, 가장 무시무시한 얘기의 하나였다)
(116)효종의 형수인 소현세자빈도 효종의 어의 안감에 저주가 담긴 물건을 넣었다가 발각되어 불을 지핀 구리방에 갇혀 죽게 했다. 그 일을 항의조로 상소한 그녀의 친척(황해 감사 김홍욱)도 태형과 참수와 재산몰수를 당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범죄는 죄수의 집안까지 처벌하지는 않는다.
남편을 죽인 아내, 지방장관에 항거한 사람, 노예가 주인을 죽였을 때 그 형벌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주인은 사소한 과실에 대해서도 노비를 죽일 수 있다(유럽에서도 이런 일은 많이 볼 수 있지 않은가)/살인자는 발바닥을 여러 번 맞은 후 자기가 저지른 살인방법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
절도범은 보통 발바닥을 때려서 서서히 죽게 한다.

간통한 자들은 발가벗기거나 얇은 속옷만 입히고 얼굴에다 석회를 칠한 채 온마을을 돌아다니게 한다.이들의 등에는 작은 짐을 매는데, 형리가 그 징을 두드리며 "저들은 간통한자들이다"라고 외치고 다닌다. 그렇게 온 마을을 끌려다닌 뒤에 볼기를 50~60대  맞는다.

세금을 내지 않는 자는 매달 두세 번 정강이뼈를 맞는데 낼 때까지 맞는다. 내지 못하고 죽으면 친척이 대신 내야 한다.  이 나라의 국왕이 세금을 못 받는 일은 결코 없다.
(하멜은 특히 형벌에 대하여 세세하게 기록했다. 정강이를 때릴 때, 발바닥을 때릴 때,  볼기를 때릴 때의 방법들을 소상하게 열거했다. 그때 차례를 기다리던 죄인들이 너무나 통곡하는 바람에 그 아우성 소리가 매맞는 것보다 더 질겁하게 만든다고 했다. 죄인을 다루는 형벌제도가 너무 가혹해 그들의 눈에 야만인들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종교
일반인들은 그들의 우상 앞에서 일종의 미신을 지키지만 우상보다는 공직에 있는 관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관과 양반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데 자기 자신들이 우상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주택
(123)고관들은 아주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지만 일반 백성들은 아무 보잘것없는 거처에서 지내야만 한다. 이나라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집을 개량할 수가 없다. 지방포교의 허가 없이는 지붕의 기와를 올리지도 못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집은 갈대나 볏짚 따위로 지붕을 잇는다. 마당은 담이나 울타리로 옆집 마당과 분리되어 있다. 주택은 나무 기둥을 쓴다. 벽의 하단부는 돌을 쌓고 이 위에 작은 목재를 열십자로 엮은 다음 안팎에 진흙과 모래를 칠한다. 이 벽의 안쪽에는 벽지를 바른다. 겨울에는 매일 방바닥이 일종의 난로와 같이 달궈져서 항상 방이 따뜻하므로 그것은 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븐(화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방바닥에는 유지가 발라져 있다. 가옥은 단층이며, 위쪽에 작은 다락방이 있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집어넣는다.

여행과 환대
(124)여행자들이 하룻밤 묵을 수있는 여관은 없다.여행자들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비록 양반집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이든지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자기가 먹을 만큼의 쌀을 내놓는다. 그러면 집주인은 즉시 이것으로 밥을 지어 반찬과 같이 나그네를 대접한다. 여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나그네들을 맞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군소리도 없다.
서울로 가는 큰길에는 고관이든 일반 백성이든 여행자들이 묵어갈 수있는 진정한 의미의 휴게소(주막집)가 있다. 양반이나 그 지방의 일로 다른 지방에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그 지역 포교(捕盜部將)의 집에 묵으며 음식을 대접받는다.

결혼
(125)남자는 아내가 이미 몇 명의 자식을 낳은 뒤라 해도 내보내고 다른 여자와 결혼 할 수 있다.그러나 여자는 법이 허용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남자는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여러 명의 첩을 둘 수 있다.
또 마음만 내키면 기생의 집에 갈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비난을 받지도 않는다. 정실부인 한 사람만이 집 안채에 살며 살림을 꾸려가고 다른 첩들은 다른 곳의 집에서 따로따로 산다. 양반이나 고관들은 대체로 세 명의 아내를 한 집에 데리고 사는데 이들 중 한 명이 집안살림을 꾸려간다. 이 나라에선 아내를 마치 여자 노예처럼 다루며 사소한 일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다. 남편이 아이를 맡고 싶지 않다면 쫓겨난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 이 나라의 인구밀도가 높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남존여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멜이 본 가정은 사대부 가정은 아니었나 보다. 아내를노예 다루듯 하다니---)

교육
(126)양반이나 부유층에서는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킨다. 그들은 가정교사를 두어 자녀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게 한다./아이들은 과거의 많은 현인들에 관해서, 또 그 현인들이 어떻게 지위와 명예를 얻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끊임없이 듣게 된다. 아이들은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독서를 한다. 이런 어린애들이 자기가 배운 책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보면 정말 경탄할 만하다./각 마을마다 그 마을을 빛낸 사람들에게 매년 제사지내는 사당이 한 채 있다.이곳에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옛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양반들은 거기에서 독서를 하기도 한다./과거시험--승진증서/이 자격을 얻기위해서 많은 젊은 양반들이 늙어서 거지 신세가 되는 수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 값비싼 기부금과 연회 비용 등으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교육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그것이 우리나라가 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자랑스럽다)

장례
(128)자식들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3년, 어머니가 죽었을 때는 2년간 상복을 입는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승려들처럼 육식을 금하며, 관직에 나아갈 수도 없다. 요직이든 비요직이든 간에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부모가 죽게 되면 즉시 사직해야 한다. 상중에는 아내와의 성교도 금지된다. 이 기간 중에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사생아로 취급한다. 이 기간중에 말다툼이나 싸움은 금물이며, 술을 마셔서도 안 된다. 그들은 옷단이 없는 긴 삼베옷을 걸치며 모자는 쓰지 않는다. 그들은 여자들이 입는 거들처럼 어른 팔뚝만한 두께의 굵은 허리띠를  착용한다. 머리에는 허리에 대는 것보다 더 가는 끈을 두르고, 대나무로 된 두건을 쓴다. 손에는 굵은지팡이나 대나무 막대기를 드는데 이것으로 부모의 어느쪽이 죽었는지 알 수 있다. 대나무는 아버지, 굵은 지팡이는 어머니가 죽었음을 나타낸다. 상중에 있는 사람은 거의 몸을 씻지 못하므로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흡사 허수아비의 모습 같다.
(어른인 나도 잘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 흥미롭다. 하멜의 이 글을 꼼꼼히 읽은 유럽인이라면 결코 조선의 문화가 그 어떤 유럽국의 문화에도 뒤지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130)부모가 80세가 되면 그들의 재산을 장남에게 물려줘야 하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재산관리를 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존경을 받는다.

국민성
(130)조선인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긴다.

조선인은 성품이 착하고 매우 곧이 잘 듣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나 믿게 할 수 있었다./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너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많은 군사들이 적의 손에 죽기보다는 숲속으로 가서 목매달아  죽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자살하는 것을 수치스런 행동으로 여기지 않으며, 필요에 의해 그렇게 한다고 말하며 자살자를 가엾게 여긴다.

(임진왜란 때도  어느 일본인 장수가, 왜 조선인은 끝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기부터 하느냐고 경멸했다. 사실 지레 겁먹고 자결한 장수들이 많았다)

조선인들은 피를 보기싫어한다. 어떤 사람이 싸우다 쓰러지면 다른 사람들은 도망간다.

전염병이 발생한 집이나 마을은 소나무가지로 거리를 막고, 그 환자의 집 지붕은 모든 사람이 알도록 가시관목으로 덮어놓는다.

무역
주변세계
(133)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담배재배술과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조선에서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여자들은 물론 댓 살되는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피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담배가 맨처음 이 나라에 수입되었을 때 그들은 파이프 하나에 은 한냥(4g)이나 이가격에 상응하는 것을 주고 샀다.(기생충이 많아 배앓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좋다 해서 어린애에게도 담배를 피우게 했나 보다)

농업,광업  및 한약
(134)이 나라는 필요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다./쌀이나 그밖의 곡식이  풍부하며 무명이나 베를 짠다./은ㆍ철ㆍ납 등이 산출되며 호피나 인삼뿌리, 다른 물건들이 거래된다. 조선인들은 많은 약초를 재배하지만 일반인들은 거의 그 약초를 쓰지 못한다. 의원은 고관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일반 백성들이 의원을 부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일반 백성들은 의사 대신 장님이나 점쟁이를 찾는다. 그들이 강가, 절벽, 암초 또는 우상이 있는 절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충고를 따른다. 그러나 1622년 왕명으로 이것들이 폐지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다지 실시되지 않고 있다.

도량형
동물군
(135)이 나라에는 말과 암소, 황소 등이 많이 있는데 황소는 거의 거세되는 일이 없다. 그들은 논밭을 갈 때 암소나 황소를 이용한다. 여행자나 상인들은 물건을 이용하는데 말을 이용한다. 호랑이도 아주 많은데 이 호랑이의 가죽은 중국이나 일본에 수출된다.

문자와 인쇄
(136)문자를 쓰는 데는 세 가지 다른 방법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주로 쓰는 방식인데 중국이나 일본의 글자와 같다. 조정과 관계된 공식적인 국가문서뿐만 아니라 모든 책들이 이런 식으로 인쇄된다.(한문) 두 번째 것은 네덜란드의 필기체처럼 매우 빨리 쓰는 문자가 있는데 이 문자는 고관이나 지방관들이 포고령을 쓰거나 청원서에 대한 권고를 덧붙일 때 쓰며 서로 편지를 쓸 때도 사용한다. 일반 백성들은 이 문자를 잘 읽을 수가 없다.(이두)  세 번째 것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문자로 배우기가 매우 쉽고, 어떤 사물이든지 쓸 수 있다. 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것도 표기할 수 있는, 더 쉽고 더 나은 문자 표기 방법이다. 그들은 이 글씨들을 붓으로 매우 능숙하게  빨리 쓴다.(한글)
(137)그들은 옛날 문서나 잭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는데 이것을 왕의 형제, 즉 왕자들이 항상 이 책들에 대한 감독을 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그들은 목판을 가지고 인쇄하며 책, 종이 양쪽에 각각 다른 목판을 사용한다.

산술 및 부기
국왕의 행차
(138)귀족들은 검은 비단으로 된 긴 옷을 입는데 그 옷의 앞과 뒤에는 문장이나 그밖의 다른 상징물이 수놓아져 있고 그 옷 위에 굵은 띠를 맨다. 기병과 보병이 행렬 선두에 서서 가며, 이들은 가장 좋은 의복을 입고 많은 기를 세우고 있으며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한다./시종들의 가운데에 임금은 금으로 세공된 아름다운 작은 집 모양의 가마에 앉아 있다. 그 행렬은 매우 조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숨소리나 말발굽 소리도 들을 수 있다./국왕 앞에는 그의 비서나 시종 중의 한 사람이 잠겨진 조그만 상자를 들고 행진하는데 이것은 백성들이 정부나 그밖의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았거나, 판사의 판결을 받지 못했거나 부모나 친구 중에 누군가 부당하게 처벌되었든가 그밖에 다른 청원이 있는 사람들이 탄원서를 넣는 함이다./국왕이 궁에 돌아오면 그 상자는 국왕에 제출되어 모든 청원이 국왕에 의해 처리된다. 그리고 왕은 최종판결을 선포하며 그 결정은 반대없이 당장 집행된다.

중국 사신의 방문
등의 이야기로 17세기 조선의 단면을 유럽인에게 소개했다.
(조선에 관한 이야기는 다 아는 것 같지만 막상 하멜이 전하는 글을 보면 내가 잘 몰랐던, 흥미로운 사실들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