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큰스승 이어령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런 분과 한시대를 살면서 종종 그분을 직접 뵙고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는데~
그분의 안사람 강인숙여사가 쓴 '어느 인문학자의 6.25'에서는 전쟁의 참상과 함께 이어령선생님과의 부산피난시절 얘기가 소상하게 펼쳐진다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와 개인의 고난이 부산에서 막을 내리고 서울로 입성해서 동숭동 캠퍼스 시절을 구가하는 이야기는 ‘고생 끝에 낙을 누리는’ 자의 뿌듯하고 행복한 모습이라, 박목월의 시 '사월의 노래'라도 불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본 ‘동숭동 시절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이어령과 강인숙의 연애사건(?)이다.
두 사람은 5년을 한결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만났다고 하니 '로맨티스트 이어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분을 마지막으로 뵌 건 2015년 6월 동국대강당에서였다.
'미당100세 잔칫날' 행사가 열리고 거기 강연자로 오셨다. 그때 우리동문들도 그 자리에 많이 참석했다.
차례가 되어 이어령 선생님이 무대에 오르셨다.
八十老軀가 무색하게 꼿꼿한 자세로 군더더기 없이 말씀하시는 모습이 여전하시다.
당신은 未堂선생을 만나 그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 것이 일생의 자랑거리라 하셨다.
그리고 '화사'의 원작자의 깊은 속뜻을 간과한 채 표준어를 사용한데 대해 一喝하신다.
징그러운 뱀을 보는 순간 ‘으 으 으 으 ~~’하는 비명을 연상시켜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라고 표현하신 건데 그 표현에 손을 대다니 하면서 개탄하셨다.
전에 '문학의 집, 남산'에서도 강연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하신 말씀 하나가 떠오른다.
가끔 아내에게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실 경우가 있었는데 책꽂이 몇 번째 줄에 왼쪽에서 몇 번째 칸에 그 책이 있으니 가져오라 하셨단다. 기억력도 비상하셨음을 말해 준다.
89세. 慘慽의 고통을 겪으시면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을 떠나셨다.
부디 安息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