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떠 가는 일이 바느질뿐이랴~
한군데라도 바늘이 제자리를 채우지 못하면 옷이 일그러지듯, 한 글자라도 잘못 들어가면 문장이 흐트러지고 출판사의 이미지가 한방에 구겨진다.
이렇게 편집실의 匠人들의 솜씨를 거쳐 나온 책이 제대로 소비되지 않으면 한낱 폐지로 전락하는 건 순간의 일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도 이와같지 않나 싶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지만 사실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렵사리 숱한 경쟁을 뚫고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거나 스테디셀러가 되는 책들은 떼어놓은 당상이 된다.
돈이 따르고 명예도 주어진다.
영상 매체가 그들을 다루기 시작하면 대박나는 거지.
나는 언제부턴가 중고서적만 사들이기 시작했다.
새 책을 사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런 경우는 중고책을 살 수 없을 경우나 선물용이 필요할 때다.
전에는 책에다 밑줄도 긋고 메모도 했지만 지금은 책이 더러워질까봐 무척 조심한다 .
다 읽은 후 중고매장에 되팔기 위해서다.
과거엔 서가에 책이 늘어가는 것이 자랑스럽고 흐뭇했는데 지금은 그 반대다.
꼭 남겨야 할 책은 몇 권이면 될까.
내가 간 후에 아들 며느리가 이 책들을 과연 반가워하며 거둘까?
이마저도 짐스러워하면 어쩌지?
손녀가 이 책들을 읽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리고 그 아이가 컸을 때는 책 내용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거나 아니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
가능한 한 모두 내다 팔아야지~
단골가게에 예닐곱 권씩 모아서 가져가면 한두 권은 재고가 많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는다.
퇴짜 맞은 책들은 도로 갖고 나와 지하철역 벤치에 살그머니 놓거나 친구들 만났을 때 건네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다 읽은 책을 들고 나가는 이유는 비록 몇만 원짜리 책이 몇천 원에, 몇백 원에 팔릴지언정 중고서점이 그 책을 사서 순환시킴으로써 책의 수명을 늘려주기 때문이다.
한번은 '동키호테'가 서가에 있는 줄도 모르고 또 샀다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두 권짜리 새책 '동키호테'를 되팔러 갔다.
서점 직원이 말했다.
"이 책 재고가 많아서 지금은 매입할 수 없는 데요~"
그날 마침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볼일을 보러 다녀야겠어서, 1000페이지가 넘고 표지 장정도 두꺼운 그 책을 들고다닌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그냥 여기서 처리해 주세요."
그러자 젊은 여직원은 무표정하게 '그 아까운' 책표지를 부욱 뜯어버린다.
고객 앞에서 책을 폐기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 행동이다.
순간 내 가슴 한쪽이 뜯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한번 펼쳐보지도 않은 새 책을 좀더 고민해 보지 않고 들고 나와 저 지경을 만들다니--
나의 경솔함이 순간 후회로 밀려왔다. 저렇게 끝내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투자한 돈이 제일 아까웠고, 저 책을 만들기 위해 숱한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을 텐데 그들에게 한없이 미안했고--
책이 有情하다면 '이 무정한 주인아! 그 서가 한귀퉁이에 내 잠시 머물 곳도 없었단 말이냐' 하고 부르짖을 것만 같았다.
--2022년 3월 7일 알라딘 중고에 내다 판 책의 가격--
1.달리 시공사 7000원/600원
2.고야 시공사 7000원
3.타이완 RHK 17500원
4.마을버스 세계를가다 메디치 15000원/2500원
5.일본철도여행 씨네북스 8000/1800원
6.붉은색의 베르사체 길벗 7100/1400원
7.마음을열어주는101가지 이야기 이레 6000원/900원
8.일본철도여행 즐거운상상 6600원
9.고통 앙드레 드 리쇼 문학동네 5500/1100원
10.잃어버린 여행가방 실천문학사 5200원
11.여행이야기로 주위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기술 필로소피 4800원
12권을 배낭에 넣고 멨더니 허리가 휘청한다. 몇 푼 건지자고 이러다 일내는 거 아냐? 하며 조심스레 걷는다.
11권 중 6권이 팔렸다. 나머지 책들을 도로 집으로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우리 동네 골목 입구에 '독서 카페'가 하나 있는데 오늘 그곳의 문을 열었다. 늘 주인장 혼자 텅빈 가게를 고독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짠했던 곳이다.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반긴다. 들어서는데 바로 옆에 '책을 기증받습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잘됐다. 주인장에게다가가서 책을 꺼내놓는다.
"책을 사지는 않습니다."
"알아요, 저기 기증받는다고 써 있는 거 봤어요."
그곳 카페는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갖고 토론도 하고 낭독회도 하는 곳이란다. 십 년만 젊었어도 귀가 솔깃했을 텐데--받아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앞으로 매장에서 퇴짜 맞은 책을 받아줄 곳이 생겨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