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여자 나이 오십

맑은 바람 2023. 8. 9. 00:35

여자 나이 마흔은 미친 개도 돌아보지 않고 여자 나이 오십은 귀신이 반쯤 씹다 버린 때라고 입 바른 남정네들은 말한다.
그러니 투기(妬忌)를 하거나 누군가에게 연정이라도 품는다면 유죄판결을 받을 일이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 없어 찜질방이다, 맥반석이다, 쫓아다녀 보기도 하고 집안이 텅 빈 때면 공연히 설움이 밀려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도 하고, 동창을 만나면 서로들 안 변했다, 그대로다 떠들며 자위하다가 바깥 햇살 속에서 짜글짜글한 주름을 드러내놓고는 새삼 민망해져 눈 둘 곳 몰라하는 그런 나이--
모처럼 기분내고 영화관이나 공연장엘 가 보면 온통 젊은이들 판이라 문득 내가 못 올 데를 왔나 조심스러워지고, 차 한 잔 하려 해도 젊은이들 전용공간이라 문전 퇴박 당하지 않을까 신경 쓰이고, 버스 안에선 선량한 젊은이들이 자리를 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리게 만드는 게 50대 여자다. 그래도 이 나이에 눈치 안 보고 버젓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이 학교였건만 이제는 너나 없이 퇴물 취급 당하고 등 떠밀려 줄줄이 떠나고들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여자 나이 50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나이다.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어 알 만한 건 다 안다.
십 년 이십 년을 한결같이 되풀이되는 그렇고 그런 뉴스들--안 봐도 다 안다. 뉴스 기피증에 걸려 차라리 신문을 펼쳐 놓고 식성대로 취한다.
고된 시집살이에서 벗어나고 아이들로부터 웬만큼 자유로워졌다. 제2의 신혼을 시작할 절호의 찬스다. 나이 더 먹고 힘좀 세다고 쥐잡듯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 무박 2일의 정동진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도 있다. 가슴을 펴고 싱싱한 해를 호흡하고 생기 넘쳐서 돌아오는 거다. 신문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무수한 전시회, 공연장들을 들춰내어 찾아가 본다.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옷 밖으로 비져나오는 살 때문에 울적해 말고 덜 먹고 남에게 줘보자.
70에 발명특허를 내는 부인이 있고, 지적으로 늙어가고 싶다며 솔본느에 밀려드는 할머니 부대가 있고 50줄에 '아나기'를 선언하는 막강한 세력이 우리 주위에 있다.
여자 나이 50은 결코 다 산 인생이 아니다.
(1999년 11월 26일, **일보 독자란 투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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