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박동자 옮김/민음사/138쪽/1판1쇄 2023.5/읽은때 2025년1월5일~1월6일
토마스 만:(1875~1955)
1875년 북독일 뤼베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1901년 25세에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펴낸 뒤 작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1903년 자전적 단편소설 <토니오 크뢰거> 발표/1911년 <베네치아에서 죽다>출간/집필에서 탈고까지 십 년 이상이 걸린 <마의산>은 세계적 성공을 불러왔으며 작가는 '20세기 전반기 세계 소설 문학의 최고봉'에 오른다/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1955년 8월 취리히에서 사망.
**1911년 5월 18일 작가가 브리오니 섬에서 휴양 중 구스타프 말러의 訃告를 듣는다.
이때의 일을 계기로 <베네치아에서 죽다>가 나왔다--작품 해설자 안심환
<베네치아에서 죽다>는 본질적으로 죽음, 유혹과 불멸의 힘을 발휘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끈 문제는 바로 예술가의 모호성, 완벽한 예술에 대한 집착이 불러오는 비극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질서와 타락으로서의 열정이야말로 내 소설의 진정한 주제였습니다."--토마스 만
1.
(12-14)5월 초,뮌헨 근교 영국공원에서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가 만난, 인피를 쓴 남자:
적당한 키에 깡마른 체구, 수염 없는 얼굴, 유난히 납작한 코를 가진 그 남자의 머리카락은 붉었고 피부는 죽은깨 섞인 우윳빛이었다. 그는 바이에른 태생이 아님이 분명했다.그가 쓴 넓고 둥근 차양의 *靭皮모자만 보더라도 그의 외모는 충분히 이국적이고, 먼 곳에서 온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인피모자--
오른손에는 끄트머리에 뾰족한 쇠붙이가 박힌 지팡이를 들었는데 그것을 바닥에 비스듬히 짚은 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꼰 자세로 지팡이 손잡이에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게다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어서, 헐렁한 셔츠 위로 삐져나온 깡마른 목덜미에 툭 불거져 나온 목젖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빨간 속눈썹이 난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는 먼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태도에는 뭔가를 위압적으로 조망하는 것 같은 인상과 대담함,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한데 그의 입술은 너무 얇아서, 마치 치아에 완전히 밀려 올라간 듯 잇몸까지 노출되었다.
아센바흐는 절반은 얼떨결에, 절반은 호기심으로 그 낯선 남자를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 남자의 시선이 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아주 호전적으로 똑바로 노려보면서 상대편이 눈을 돌릴 때까지, 한번 해보자는 기세였다. 결국 아센바흐는 등 뒤로 그 따가운 눈총을 느끼며 힘겹게 돌아서야 했다.
*그 남자는 나그네의 신이며 冥府의 안내자이기도 한 헤르메스의 전통적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17-18)그 남자를 본 이후 강렬하게 치솟는 여행에의 충동:
그가 인정하는 바에 따르면, 바로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미지의 새로움을 동경하며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이른바 작품에서, 경직되고 냉혹하며 고통스럽기까지한 일상의 작업 장소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충동이었다.
---그에겐 어떤 활력소가 필요했다. 순간순간의 즐거움과 느긋한 여유, 異國의 바람과 새로운 피를 솟구치게 해줄 무언가가 절실했다.그러기만 하면 여름을 그럭저럭 유익하게 견뎌낼 수 있으리라. 그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머나먼 나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침대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멋진 남국의 어느 평범한 휴양지에서 서너 주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낮잠을 즐기며 지낸다면---
밤에는 지도와 차편을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
(22)휴식을 모르는 아센바흐의 삶:
그는 오로지 명성을 추구하였기에, 진작부터 능숙하게 처세할 줄 알았다. ---짧은 편지글에서조차 호의를 보여주고,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사방에서 업적을 기대했기에 그는 단 한 번도 빈둥대거나, 아무런 염려없이 방종하게 보낸 적이 없었다.---그가 결연히 도덕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체질이 전혀 강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긴장해 있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끝까지 견뎌라!'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에게는 이 명령 자체가 고통 속에 자리한 창작의 미덕으로 여겨졌다.또한 그는 어서 늙기를 고대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진정 위대하고 총체적이면서 존경할 만한 예술가적 재능은, 인생의 모든 단계들로부터 독자적인 결실을 거두는 천복을 입어야만 빛날 수 있노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재능 덕분에 떠맡은 임무들을 그 가냘픈 어깨에 짊어지고 계속 자기 길을 나아가려면 극도의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나이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라면 자만심에 가득 차서 시간을 낭비하고 몽상에 도취되고 거대한 구상의 실현을 유유히 미루는 시기에도, 그는 찬물을 가슴과 등에 끼얹으며 정해진 시각에 맞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30-31)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예술 덕분에 험하고 파란 많은 인생을 산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개인적인 면에서 예술은 정녕 고양된 삶이다.예술은 더 깊은 행복을 주었다가 훨씬 빨리 소모시킨다.예술은 자기 신하들의 얼굴에다 정신이 상상했던 모험들의 흔적을 각인시킨다. 그래서 예술은, 외적 생활이 비록 수도원에서처럼 고요하더라도, 결국에는 몹시 무절제하고, 격정과 향락에 푹 빠진 삶조차 도저히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신경과민, 악습, 피로와 호기심을 배태하고 만다.
3.베네치아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된 곳은 1908년 준공한 리도의 <엑셀시어호텔>이다.
(34-35)그의 눈앞에 목적지가 떠올랐다. 동화처럼 환상적인 일탈을 이룩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그는 곧장 가교를 건너서 증기를 뿜어대며 베네치아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어느 기선의 축축한 갑판 위로 올라갔다.
이탈리아 국적의 아주 오래된 선박이었는데, 낡은 데다 거무튀튀하게 그을리고 우중충했다.
(아센바흐에게 베네치아행 1등석을 발급하고 선원은 쉴새없이 수다를 떨었다)
(35)"아,베네치아라! 정말 멋진 도시죠! 현재의 매력으로 보나 과거의 역사로 보나 교양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도시지요."
(아센바흐는 베네치아 옆 리도에 있는 해수욕장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거기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49-50) 바로 곁에서 폴란드어 말소리가 들려왔다.한 무리의 소년소녀들이 있었다.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 셋과 열네 살 무렵의 소년이 하나 있었다.
아센바흐는 소년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흠칫 놀랐다. 창백하면서도 우아하고, 내성적 면모가 엿보이는 얼굴은 연한 금발에 감싸여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사랑스러운 입술, 우아하고 신성한 진지함이 깃든 그의 얼굴은 가장 고귀했던 시대의 그리스 조각품을 연상시켰다.가장 완벽하게 형식미를 실현해 낸 모습이었다. 아센바흐는 그 아이를 쳐다보며 자연에서도, 조형예술품에서도 그와 비슷한 성취를 본 적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 아이에게는 아주 희귀한 개인적 매력이 있었다.
---헬레니즘 예술의 걸작 '가시 뽑는소년'처럼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이마에서 귀를 거쳐, 목덜미 아래쪽 깊숙이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밑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퍼프 소매가 달린 영국식 선원복은 아직 천진난만하고 가느다란 소년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그 옷의 끈과 리본, 그리고 예쁜 자수 장식들 덕분에 어딘지 귀하고 고급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검은색 에나멜 가죽 구두를 신은 한쪽 발을 다른 발 위에 올리고, 팔꿈치를 등나무 의자의 팔걸이에다 걸친 채로, 움켜쥔 손에 볼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그의 태도에서는 꾸밈없는기품이 흘렀다.
(그 소년의 이름은 타치오였다.그 소년에 완전히 빠진 아센바흐는 타치오가 이 호텔을 떠나기 전엔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61)바다로 들어갔던 타치우는 달리면서 역류하는 물살을 다리로 걷어차며 물보라를 일으켰다.그렇게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물결을 가르면서 돌아왔다.비할 바 없이 숭고하고 준엄한 표정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고수머리를 한 그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하늘과 바다 깊숙한 곳에서 강림한 귀여운 신처럼 아름다웠다.이제 그 모습이 바다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은 신화적 상상을 불러일으켰다.이를테면 태초의 시간, 형식의 기원과 신들의 탄생에 관한 시학 자체였다.아센바흐는 눈을 감고, 자기 마음 속에서 울리기 시작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곳이 마음에 들고 더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베네치아의 더위와 습기로 인해 몸 상태가 나빠진 아센바흐는 해변호텔을 떠나기로 했으나 짐이 엉뚱한 곳으로 보내지는 바람에 다시 해변호텔로 돌아온다.)
(71)그는 정오 무렵에 타치오가 빨간 리본이 달린 줄무늬 아마직 정장을 입고 바다 쪽에서 해변 개폐문을 통과해, 판자다리를 건너서 호텔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보아라, 타치오, 너 역시 여기에 있구나!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느긋한 인사말이 그의 마음 속 진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쑥 물러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피끓는 듯한 감동, 기쁨, 영혼의 고통마저 느꼈다.마침내 그는 자기에게 베네치아와의 이별이 그다지도 어려웠던 까닭은 바로 타치오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4.널 사랑해!
(78-79)立像과 귀감이라! 그의 두 눈은 저기, 푸른 바다의 가장자리에 있는 고귀한 형상을 얼싸안았다. 그리고 그는 열렬한 황홀감에 빠져서 이 형상을 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아름다움이란 신의 사고로서의 형식이고, 정신 속에서만 살아숨쉬는 유일하고도 순정한 완전성이었다.그 완전한 아름다움의 비유적 모상이 한 인간으로 화해서 여기 경쾌하고도 아리땁게 우뚝선 채 경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이를테면 도취였다. 마침내 늙어가는 예술가는 주저할 것도 없이, 아니, 탐욕적으로 그 도취를 기꺼이 받아들였다.그의 정신은 산고의 고통을 겪었고, 그의 교양은 격랑에 휩쓸렸으며, 그의 기억은 아주 오래된 사고, 젊은 시절에 섭렵해 놓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스스로 불꽃을 댕겨보지 않았던 사고들을 새로이 떠올렸다.
---신은 우리들에게 정신적인 것을 보여주고자 젊은 인간의 형상과 색채를 사용하였으니, 신은 그것을 아름다움의 광채로 장식해서 기억할 만한 도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보노라면 고통과 희망에 불타오를 수밖에 없다.
(81)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보다 더 神的이리라.왜냐하먼 사랑하는 자 안에는 신이 있지만, 사랑받는 자 안에는 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까지 인간이 머리에 떠올린 발상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도 가장 신랄한 생각이리라. 동경이 지니는 온갖 교활함과 지극히 은밀한 쾌락은 바로 이 발상에서 유래한다.
(타치오에게 빠진 아센치오의 나날은 흥분되고 고통과 환희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85)그의 잠은 깊지 못했다.행복한 불안으로 가득 찬 짧은 밤들을 경계로, 소중하고도 단조로운 낮이 이어지고 있었다.타치오가 무대에서 사라지는 시각, 9시면 그로서는 이미 하루가 다 끝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첫 새벽의 먼동이 밝아 올 때면 부드럽게 파고드는 놀라움이 그를 깨우고, 그의 마음 역시 자기가 지금 빠져있는 모험을 기억해 내었다.
(87-88)눈으로만 서로를 아는 사람들의 관계보다 더 미묘하고 더 까다로운 것은 없다.날마다, 아니 매 시간마다 서로 우연히 만나거나 쳐다보기도 하지만, 인습이나 기우 때문에 인사, 혹은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짐짓 냉담한 낯설음을 가장한 채 뻣뻣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90)타치오의 미소:
그 미소를 받은 사람은 마치 어떤 숙명적 선물이라도 받은 양, 그것을 가지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갔다.그는 몹시 충격 받아서 테라스와 앞뜰의 불빛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고, 걸음을 재촉하며 뒤쪽 공원의 어둠을 찾아갔다.---그는 벤치에 풀썩 주저앉아서, 제 정신을 잃은 채 식물들이 뿜어내는 밤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등을 기댄 채 팔을 축 늘어뜨리고 압도된 모습으로, 그리고 여러 차례 발작적인 전율을 느끼면서, 변함없이 상투적인 동경의 밀어를 속삭였다.--이런 경우에 용인될 수 없고, 우스꽝스러운 데다 망발과 죄악에 가깝지만, 그래도 신성하고 역시 위엄있는 그 상투적인 표현을!--
"널 사랑해!"
(지금 짝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이 글을 읽고 있었다면 문장 하나하나가 얼마나 실감나게 피부에 와 닿았을까!)
5.
리도와 베네치아에 퍼지고 있는 전염병:
(92)길모퉁이에는 인쇄된 벽보들이 붙어 있었다. 요즘 날씨에 흔히 생기는 소화계통의 어떤 질병 때문에 주민들에게 굴과 조개를 먹지 말라고, 운하의 물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시정 당국의 공고문이었다.
그 공고가 심각한 사실을 미화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93)그러나 사랑에 빠진 아셴바흐는 혹시 타치오가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다.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기는 더이상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식했음에도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셴바흐는 이제 미행하거나 쫓아다니는 사람이 되어 타치오를 시야에 가두었다. 이성으로는 이제 더이상 아셴바흐의 행동을 이해할 수없었다.)
(95)타치오와 그 일행은 어디선가 곤돌라를 탔다.그들이 배를 타는 동안, 우뚝 솟은 분수 옆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센바흐는 그들이 물가를 떠나자마자 곧바로 그들의 행동을 따라 했다.
(96)베네치아!:
아첨을 잘하는, 도무지 신뢰하기 어려운 미인 같은 도시, 어쩌면 동화같고 어쩌면 나그네를 유혹하는 함정 같은 도시. 이 도시의 썩어가는 공기 속에서 한때 예술이 향락적으로 번성했던 것이다. 이 도시는 자장가를 불러주듯 유혹적인 선율을 음악가들에게 들려 주었다.
(110)베네치아에 번지는 흑사병:
금년 5월 중순 무렵, 베네치아에서, 무려 같은 날에 *병들어 검게 변한 부두 노동자와 채소 장수의 시체에서 그 끔찍한 병균이 발견되었다. 그 사건은 비밀에 부쳐졌다.
---이 수상도시에 얽힌 최초의 추문은 독일 일간지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베네치아 당국은 이 도시의 위생상태가 더할 나위없이 좋다고 대응했다.---그러나 아무리 사실을 부정하고 숨겨도 죽음은 골목 구석구석에 만연했다.---감염자의 100명 중 80명은 죽었다.
*실제로 베네치아에 흑사병이 만연한 때는1630년경이다
(116-117)재앙을 맞닥뜨린 아셴바흐는 신경이 쇠잔하고, 완전히 녹초가 되고, 무기력하게 악마의 유혹에 빠져든 것 같은 기분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타치오도 아직 남아 있었다. 이제 아무 거리낌없이 미소년의 주변을 맴도는 이 남자는 이따금씩, 마치 도망과 죽음이 모든 성가신 인간들을 내쫓아서 오로지 자기만이 아름다운 소년과 함께 이 섬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젊어 보이도록 자기 양복에다 가벼운 장신구와 보석을 달았고 향수까지 뿌렸으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화장을 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121-123)어느 날 소년을 뒤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지친 몸으로 길가에 주저앉아 버린 아셴바흐:
세상의 인정을 받은 대가이자 품위있는 예술가, <가련한 사람>의 저자, 너무나 모범적이고 순수한 형식으로 보헤미안 기질과 우울의 심연을 거부했으며 타락한 자에게 감정이입을 않고 사악한 것을 떨쳐 버린 작가, 신분 상승을 이룬 남자, 지식과 온갖 아이러니를 정복하고 성장해서 대중의 신뢰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데에 익숙했던 사람---그는 공식적으로 명예를 얻었고 귀족의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아이들은 그의 문체를 모범으로 삼아 교육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인들은 에로스가 안내자로 나서주지 않는 한 아름다움의 길에 이를 수 없다.아마도 너는 이제야 우리시인들이 어리석을 수도, 품위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우리가 구사하는 문체에서 엿보이는 거장다운 태도는 모두 허위이고 어릿광대짓일 뿐이야. 우리의 명성과 영예로운 지위는 일종의 익살극이고 대중의 신뢰는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며, 예술로써 국민과 젊은이들을 교육하겠다는 바람은 무모한 짓이고 금지해야 할 계획이야. 우리는 지식을 거부하지.지식은 결코 품위도 엄격함도 아니야. 이제부터 우리는 아름다움에만 경주해야 해. 말하자면 단순성과 위대성, 그리고 새로운 엄격성과 제2의 자유와 형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지. 형식과 자유는 도취와 탐욕으로 치닫게 하고 고귀한 사람을 무시무시한 감정적 방종에 빠뜨린단다.결국 그것들이 우리 시인들을 이끌어 간다는 말이다.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하고 타치오가 호텔을 떠나는 날 아셴바흐는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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