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장편소설/문학동네/193쪽/1판1쇄 2011.11/1판 31쇄 2024.10/읽은 때 2025.2.24~2.26
1
(첫문장)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보르헤스의 유언의 의미와 스위스 성 갈렌의 도서관과 루체른에서 본 알프스 협곡)
2침묵
(그녀는 17세에 실어증에 걸린다.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학교생활도 그녀를 배려하지 않고 선생들은 아이를 내쫓거나 뺨을 때렸다.그러나 어느 순간에 말문이 터졌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나 양육 능력이 없다며 아이는 아빠 쪽으로갔다.
대학과 고교에서 문학을 강의하던 중에 또 실어증이 찾아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실어증에서 풀려나고 싶어 어려운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예전에 불어 시간에 실어증이 풀렸던 걸 생각하며)
3. 보르헤스와 연등회와 독일 유학과 화엄경 강의:
15세 초여름 어느 일요일 밤.서점에서, 불교에 관한 보르헤스의 대중강연을 번역한 문고판 책을 샀다.
**보르헤스:1899~1986
아르헨티나 시인ㆍ소설가/라틴문학의 대표작가/현대 환상문학의 대가/유전적 요인으로 말년에(56세) 완전히 시력 잃음/한때 실어증에 걸리기도 함/저서<불한당들의 세계사>, 시<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25)연등회의 기억:
그때까지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 광경을 그 하루의 낮과 밤에 모두 경험했다.수십 장의 얇은 홍보랏빛 한지 조각들을 일일이 주름지게 말아 꽃잎을 만들어 붙인 연등들이 햇빛을 받으며 대웅전 앞마당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마침내 등들이 밝혀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紙燈들.
(26)'세상은 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보르헤스
4.희랍어 수업 시간:
(29)유월부터는 플라톤을 읽습니다. 물론 문법은 계속 병행해 공부합니다.
(플라톤이 썼던 말로 플라톤을 공부하다니, 이거야말로 환상적이군!)
5.목소리: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17세의 나와 인도인 엄마를 닮은 청각장애인 병원집 딸에 대한 회상 편지
(36)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그때 나는 불현듯 낯선 슬픔을 느꼈는데, 완전히 모든 것을 못 보게 될 나이는 아직 나에게서 멀리, 충분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 얼굴에서 ,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 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십이 다 됐지만 나는 아직 완전히 실명 상태는 아닌 채로 서울 변두리에 살고 있습니다.나는 학원에서 희랍어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15살에 독일로 가서 희랍철학 학위를 땄으니까요.
(44-45)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걸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당신의 목소리.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6
7 눈
(55)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8 독일에서 돌아와 처음 맞는 초파일에 수유리 절을 찾았다.蓮燈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9 어스름
(73-74)병아리의 기억:
교문 앞에서 종이봉지에 담아 팔던 그 따뜻한 녀석/하얀 가제 수건에 싸인 삐비는 여전히 고요했어/어떻게 됐을까, 그 작은 뼈들은.
(한강이 나를 끌고 가는 이유~~어찌 이런 섬세한 표현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 들어있을까? 내게도 똑같은 추억이 있다.
어린 동생이 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를 애지중지키우면서 더 잘 자라라고 소고기 한 조각을 먹였다.목에 걸려 죽었다. 울음바다였다. 그러곤 사직공원에 묻어주었다.)
(82)기억 속의 아버지:
고속 승진 후,독일지사에 발령 받음/일 년 후 갑자기 자진 사퇴/6개월 동안 행방 불명/돌아온 후 안과수술/실패/돌아가실 때까지 아파트 구석방에서 나오지 않음
(83)나의 눈: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은, 먹보다 진한 내 눈의 밤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10
11밤
(92)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라고 그가 말한다.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93)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 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현실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그녀는 희랍어 시간이 끝나면 자정이 될 때까지 밤거리를 이곳저곳을 마냥 지치도록 걷는 게 습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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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얼굴: 獨逸學友
독일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와 등산을 가서 그 친구가 낙상을 함/백운대와 인수봉 얘기를 하는 순간에./그 친구는 그 뒤로 이십 년간 투병생활을 한 끝에 죽음
(120)너와 함께 내가 보낸 그 긴 시간 동안,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122-123)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세차게 뛰는 심장,
부풀어 오르는 허파,
아직 따뜻한 입술, 그 입술을 누군가의 입술에 세차게 문지르는 거였지.
15
16
17 어둠
한 마리 박새가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여자는 박새를 밖으로 내보내려 문을 열고 유도하지만 박새는 지하 계단 쪽으로 날아간다. 온몸을 여기저기 부딪치며.
이때 남자도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여자는 포기하고 강의실로 올라가는데 남자도 따라 올라가려다 새의 존재를 알게 된다. 어둠 속에서 새의 탈출을 도우려다 새가 얼굴로 날아드는 바람에 손전등과 안경이 떨어지고 안경은 구둣발 아래 박살이 나고 남자는 꼼짝을 못한다.
한참 뒤 여자가 내려와서 그를 돕는다.
18 둘은 차를 기다리며 여자가 남자의 손바닥에 글을 쓴다.
'먼저 병원으로 가요'
19 어둠 속의 대화
병원치료를 끝내고 여자는 남자집까지 데려다준다. 원룸에서 여자는 듣고(?) 남자는 일방적으로 얘기를 계속한다, 날이 새도록.
20 흑점
(174~175)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 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뛰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동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새벽에 그 남자의 집을 떠났던 그녀가 다시 빗속을 뚫고 왔다. 안경을 마춰다 주겠다고.
(184)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축축한 귀밑머리에.눈썹에.먼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먼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흑점:태양 면에 보이는 검은 점
21심해의 숲
(185-190)
그때 우리는 바다 아래의 숲에 나란히 누워 있었어요.
빛도 소리도 그곳에는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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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시간이 나에게 입맞추는 것 같았어요.
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마다 막막한 어둠이 고였어요.
영원히 흔적을 지우는 눈처럼 정적이 쌓였어요.
무릎까지, 허리까지, 얼굴까지 묵묵히 차올랐어요.
0
(191)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이 소설과 함께 살았던 이 년 가까운 시간, 소설 속 그와 그녀의 침묵과 목소리와 체온, 각별했던 그 순간들의 빛을 잊지 않고 싶다.--한강
(뒷표지에서)
한강은 모든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규범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각각의 작품에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육체와 영혼, 산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지니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산문의 혁신가로 자리매김했다.--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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