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방/자작시

배추같은 그녀

맑은 바람 2009. 6. 10. 00:25

배추같은 그녀

맑은바람

 

저 멀리 아지랑이 속에서 그녀가 웃으며 걸어나온다 오늘처럼 이른 봄비 삭정이로 웅크린

나뭇가지에서 봄 재촉 하는 날이면

 

약학대학을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때려 치아뿐지고 국문과를 택해 국어선생이 된 그녀-

선생질도 따분하고 사무적인 게 천성에 안 맞는다며 또 뚝딱 때려 치와뿌리더니 어딘가에서

아들 셋 낳고 복닥복닥 산다는 얘기 귓결에 들려오고 소식이 끊겼다

 

남자를 고를 때엔 입술을 본다고 해 의아심을 자아냈던 그녀,

신혼살림 셋집도 문간방일망정 마당 넓은 집만 골라 다니는데 몇 달이 멀게 이사를 다닌다

밤행사를 하도 요란하게 치러 주인집 음전한 마님 아이들 교육에 지장 있다며 방 비워 달라는 통에

그때마다 짐을 싼다 셋집이지만 한번 놀러 오라 해서 갔더니 찬밥뎅이 양푼에 담아 김치 넣고 썩썩

비벼 내놓는다

촌년 얼어터진 볼텡이 마냥 늘 붉으죽죽한 얼굴에 구리무 한 번 발라 주지 않고 머리는 빠글빠글

빗질도 제대로 않고 다녀 성이 추씨인 그녀를 아이들은 아예 배추장사라 불렀다

짧은 다리 잰 걸음으로 헉헉거리고  진주사투리를 침 튀겨가며 어찌나 빨리 쏟아놓는지 늘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건만,

 

오래도록 소식없어

불현듯 그리워지는 건

그녀에게서 나는 갓 씻은

날배추 서걱서걱한 맛

그 때문이리

 

(200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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